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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장, 발길 닿는 대로 역사다

고창군 무장면, 동학농민운동의 발상지

장태욱 taeuk30@naver.com 2015년 04월 16일 목요일 23:30   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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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창군 무장면에 있는 무장읍성이다. 동학농민운동 당시 전봉중이 이끄는 농민군은 아전들과의 교감으로 무장읍성에 무혈입성할 수 있었다.

선운사 입구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사찰 주변이라 그런지 밤 거리엔 사람 구경을 할 수 없었다. 전날 내린 비로 불어난 하천은 밤새 계곡을 흔들어 깨웠다. 오랜만에 낯선 곳에서 하룻밤을 보내는 설렘은 도랑을 흐르는 물소리를 만나 크게 증폭되었다. 산사 주변의 잠못 이루는 밤은 그렇게 깊어만 갔다.

알람 소리 때문인지, 새 지저귀는 소리 때문인지 이른 아침에 잠에서 깨었다. 다행히도 비구름이 가시고 화창하게 맑은 날이다. 전날 긴 여정을 감안하면 잠이 부족할 만도 했지만, 나뭇가지 사이로 스며드는 햇살이 너무도 반가워 피로를 느낄 틈도 없었다. 난 3월의 투명한 햇살을 통해 새로운 고창을 만나고 있었다.

고창은 인근 부안, 정읍과 더불어 갑오년 동학농민운동 과정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곳이다. 보국안민의 기치를 높이 들었던 농민군의 흔적이 군데군데 남아있어, 발길 닿는 대로 역사가 와 닿는다.

옛 무장현(茂長縣, 지금의 고창군 무장면과 공음면) 구수내마을(고창군 공음면 구암리)에 있는 '무장기포지'를 찾았다. 포(包)는 동학의 포교단위를 말하니 '기포(起包)'란 포를 일으켜 세웠다는 말, 즉 동학의 조직을 세워 혁명에 참여시켰다는 의미다. 이곳은 녹두 전봉준 장군이 고부(정읍시 고부면)에서의 전략적 실패를 거울삼아 전력을 재정비하고 새롭게 혁명의 불씨를 점화한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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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장기포지. 고창군 공음면에 구암리에 있다. 고부민란이 실패로 끝난 후, 전봉준은 이 곳으로 내려와 농민군을 조직해 혁명을 준비했다.

1994년 1월, 탐관오리 조병갑의 횡포에 분노한 농민들은 전봉준의 지휘아래 고부관아를 점령하여, 잠시 해방의 기쁨을 맛봤다. 하지만 신임군수로 파견된 박원명이 '시정조치'를 약속하며 농민군 지도부를 회유했고, 농민군은 스스로 해산의 길을 선택했다. 하지만 박원명의 약속은 지켜질 리가 없었다. 오히려 농민들이 마주한 것은 동학교도 학살, 부녀자 겁탈, 민가 방화 등을 서슴지 않는 안핵사(현지 조사관) 이용태의 만행이었다.

무장기포지, 실패를 거울삼아 다시 일어었던 곳

전봉준은 다시 혁명을 준비할 장소로 동학 대접주 손화중이 있는 무장을 선택했다. 전봉준은 손화중을 설득하여 거사에 동참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냈고, 무장의 여시뫼 언저리에 있는 구수내마을에 농민군 훈련장을 만들어 혁명의 근거지로 삼았다.

그리고 무장과 고창, 정읍 등지에서 농민 4천명이 구수내마을로 몰려들었다. 농민군은 인근 석교리 세창을 헐어 군량을 충당하며 사기를 높이 올렸다. 호남의 붉은 들녘에서 그렇게 혁명의 불길은 타올랐다.

'무장기포지'는 훈련장이라기 보다는 조그만 놀이터 처럼 소박하게 꾸며져 있다. 동학농민군을 상징하는 동상과 죽창, 그리고 몇 개의 표지와 표석이 세워져 있어 이곳이 동학농민운동과 관련이 있는 곳임을 겨우 알수 있었다. 고창읍내에서 온 주민에게 물어도 이곳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고 답하는 것을 보면, 이제 고창 주민들도 동학농민운동에 대한 관심은 점점 식고 있었다.

무장기포지를 지나 방문한 곳은 무장읍성이다. 호남에서도 읍성 내 동헌과 객사가 잘 보전되었다고 알려진 성이다. 갑오년 당시 전봉준이 이끄는 동민군이 무장에서 기포한 후 처음으로 접수한 관아가 무장이었다.

농민군이 무장읍성에 무혈입성하게 된 건..

공교롭게도 우리가 방문한 날, 무장읍성은 문화재발굴조사가 진행 중에 있었다. 조사 현장을 피해 토성 위로 올라 성 둘레를 걸었는데, 토성 너머로 푸른 하늘과 붉은 땅이 대비를 이뤄 참으로 평화로워 보였다. 120년 전, 수탈을 견디지 못한 농투성이들은 스스로를 해방시켜 이 아름다운 대지의 주인으로 우뚝 서고자 목숨을 걸고 조총과 죽창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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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침 무장읍성에서 문화재 발굴조사가 진행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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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창 들녘이다. 120년 전 수탈을 견디지 못한 농민들은 이 아름다운 대지의 주인으로 우뚝 서기 위해 총과 칼을 들었다.

갑오년 당시, 구수내마을에서 전봉준이 이끄는 농민군이 봉기하는 것을 본 무장현감은 이미 몸을 피했고, 포졸들도 거의 달아나 관아가 텅 비어 있었다. 무장의 아전들은 농민군에게 성문을 열어줬고, 농민군을 이끌고 무장읍성으로 무혈입성한 전봉준은 아전들의 입장을 고려하여 아전이 아닌 객사에서 창의문을 선포했다. 아전들과 농민군 지도부의 교감으로 무장관아는 조금도 손상을 입지 않아, 지금까지 관아의 형태가 잘 보존되고 있다.

무장읍성을 접수한 농민군은 그 여세를 몰아 고부를 향해 출발했는데, 농민군이 고부관아에 당도했을 때 관아역시 이미 텅 비어 있었다. 관아를 접수한 전봉준이 각지로 통문을 보내자 고부 인근 백산으로 농민들이 몰려들었는데, 그 수를 헤아리기 어려울 지경이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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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창읍성. 국토해양부에서 정한 가장 아름다운 길에 선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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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장 관아를 접수한 농민군은 황토재 전투에서 관군을 격파한 후 전주성 입구까지 진격했다가, 다시 남하하여 흥덕현과 고창현을 점령했다. 그 과정에서 전라도 일대를 해방구로 만들었다.

농민군은 이후 전주성을 향해 진군하는 도중, 태인과 부안을 차례로 점령했다. 그리고 다시 고부로 되돌아오던 중 도교산과 인접한 황토재에서 관군과 맞닥뜨렸다. 관군과 처음으로 싸운 황토재 전투에서 농민군은 대승을 거뒀다.

가장 아름다운 길, 가장 비장했던 길

황토재에서 승리를 거둔 농민군은 다시 남하하여 흥덕현과 고창현을 점령했다. 농민군은 고창읍성의 옥문을 열어 죄수를 풀어주고 굶주린 백성들에게 곡식을 나눠줬다. 무장에서 출발하여 전주성 앞에까지 이르렀다 남하하여 다시 고창에 이르는 과정에서 농민군은 전라도 대부분 지역을 해방구로 만들었다. 이 과정에서 더 많은 농민들이 합류하였고, 그들의 기세는 점점 세져갔다. 호남의 농투성이들은 그렇게 되돌아올 수 없는 길을 가도 있었다.

고창읍성에는 정부에서 정한 가장 아름다운 길이라는 표지가 붙어있다. 실제로도 황톳빛 성담 길이 창공을 향해 오르다 옆으로 휘어지고, 다시 대지를 향해 내려가다 휘감기를 반복하여, 하늘과 땅을 배경으로 곡선이 아름답게 춤을 추는 듯 하다. 그런데 그 길이 더욱 아름답게 느껴지는 건 농투성이들이 목숨을 내걸고 걸었던 비장한 길이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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