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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한국작가회의 제주도지회는 18일 제주 동부지역을 대상으로 <4.3 추념 문학기행>을 실시했다. 4.3 현장 증언을 해준 남원읍 신흥1리 어르신들과 함께한 문학기행 참가자들. ⓒ제주의소리
제주작가회의 4.3문학기행, 4.3당시 민간인 구한 의인들...“제대로 조명할 공간 필요”

이념이 모든 것을 집어삼킨 그때, 상식을 말하는 것이 생명과 맞바꿔야 할 만큼 위험했던 폭력의 광풍이 몰아친 60여년 전 제주4.3.

자기 몸 하나 간수하기 위태로웠던 학살의 시간 속에, ‘생명’을 우선시하며 무고한 민간인들의 희생을 막고자 애쓴 위대한 휴머니스트(humanist)들을 기억하는 소중한 시간이 마련됐다.

(사)한국작가회의 제주도지회(지회장 김수열, 제주작가회의)는 18일 오전 9시부터 오후 4시까지 <4.3 추념 문학기행> 행사를 실시했다.

이번 행사는 4.3사건 67주기를 맞아 조천읍, 남원읍 등 제주 동부지역 일대를 둘러보며, 60여년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4.3 당시 수많은 도민들의 목숨을 살린 의인들을 만나는 시간이었다.

제주작가회의는 “아직 아물지 않는 4.3의 상처가 묻혀있는 제주땅에서 전쟁이 아닌 평화를, 분단이 아닌 통일을, 죽임이 아닌 살림으로서의 문학을 실천하기 위한 의지”라고 4.3문학기행의 목적을 설명했다.

제주작가회의 회원들과 일반인 참가자 등 30여명은 김경훈 시인의 안내를 따라 조천읍 신촌리, 함덕리, 제주4.3평화기념관, 남원읍 신흥리, 신례리를 순서대로 방문했다.

겉보기에는 작고 소박한 마을이지만, 그곳에는 끔찍했던 4.3의 흔적과 인도주의를 실천한 숭고함이 공존하고 있었다.

# 조천읍 신촌리 김순철
신촌리에는 학살 위기에 놓인 주민들을 구한 ‘지미둥이 순경’ 김순철이 있다.

이북 출신인 김 순경은 4.3 당시 조천지서 신촌파견소에 근무했다. 9연대 군인들이 신촌 주민들을 기관총으로 한꺼번에 쏴 죽이려한 상황에서 몸을 던져 수백 명을 구해냈다.

당시 9살이던 김낭규(76) 할머니는 현장 증언에서 김 순경에 대한 기억을 어렴풋이 풀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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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한국작가회의 제주도지회는 18일 제주 동부지역을 대상으로 <4.3 추념 문학기행>을 실시했다. 김순철 경사의 도움을 받아 살아난 김낭규(76) 할머니.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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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한국작가회의 제주도지회는 18일 제주 동부지역을 대상으로 <4.3 추념 문학기행>을 실시했다. 4.3 당시 학살터였던 신촌초등학교. ⓒ제주의소리

김 할머니는 “마을에 온 군인들이 ‘집에서 안나오면 모두 총살시킨다’고 하면서 지금 신촌초등학교 인근 즈음 마당에 마을사람을 모두 앉혀 놨다. 그리고 기관총으로 사람들을 모두 죽이려고 했는데, 김 순경이 기관총 앞을 막아서서 ‘(주민을 죽여서는) 안된다’고 했다”고 말했다.

‘제주4.3진상조사보고서’, 4.3희생자들의 육성증언, 김익렬 장군의 회고록 등을 바탕으로 2008년 김경훈 시인이 작성한 픽션 드라마 <한라산>에는 이 같은 내용이 상세히 적혀 있다.

<한라산>에 따르면 기관총을 막아선 김 순경은 “총을 든 우리 순경들도 무장대들에게 대항을 못했는데 집에서 잠자는 주민들은 어찌 그 사람들과 대항할 수 있겠느냐. 나도 이북에서 온 사람이다. 나부터 죽여놓고 이 사람들 다 죽이라”고 군인들을 만류했다.

김 순경의 용기가 없었다면 북촌리에서 벌어진 대규모 학살이 재현됐을 수 있었다.

김 할머니는 “그 뒤로부터 신촌사람들은 4.3때 돌아가신 분들 제사할 때마다 김 순경에게 제삿밥을 가져다줬다. 순경은 잔인하고 무서운 줄만 알고 살았는데 그 분은 아니었다”고 회고했다.

4.3사건 이후 제주시 부두파출소에 근무하며 제주에서 아내도 만나 정착한 김 순경은 1960년경 목선을 타고 바다에 나갔다가 행방 불명됐다. 김 순경의 장례식때 신촌리 주민들이 십시일반 쌀을 모아 마차로 전달한 것은 유명한 일화다.

# 조천읍 함덕리 한백흥, 송정옥
함덕리에는 주민들을 죽이려한 토벌대를 만류하다 안타깝게 목숨을 잃은 마을 이장 한백흥, 마을 유지 송정옥씨의 사연이 깃들어 있다.

1948년 11월 어느 날 모래밭(관됫모살)에 함덕 주민들을 집결시킨 토벌대는 "무장대와 연락하거나 식량을 제공하지 말라"고 엄포를 놓으며 마을청년 몇 명을 처형하려 했다.

이때 한백흥 씨와 송정옥 씨가 나서서 “청년들의 신원을 보증할테니 죽이지말라”고 설득한다. 그렇지만, 토벌대는 결극 마을청년은 물론 이를 막아선 이 두명까지 무참히 처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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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한국작가회의 제주도지회는 18일 제주 동부지역을 대상으로 <4.3 추념 문학기행>을 실시했다. 한백흥, 송정옥 기념비를 설명하는 한하용 제주4.3희생자유족회 제주시 지부회장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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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한국작가회의 제주도지회는 18일 제주 동부지역을 대상으로 <4.3 추념 문학기행>을 실시했다. 한백흥, 송정옥 기념비 내용.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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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한국작가회의 제주도지회는 18일 제주 동부지역을 대상으로 <4.3 추념 문학기행>을 실시했다. 왼쪽부터 한하용 제주4.3희생자유족회 제주시 지부회장, 김수열 제주작가회의 지회장, 이종형 제주문학의 집 사무국장.ⓒ제주의소리
이 같은 내용은 현재 함덕리에 설치된 ‘의사(義士) 한백흥, 송정옥 기념비’를 통해 후손들에게 전해지고 있다. 비석은 2010년 1월 함덕리민들이 자발적으로 설치한 것이다.

이날 작가들과 만난 한하용 제주4.3희생자유족회 제주시 지부회장은 한백흥 선생의 손자다. 

그는 “1919년 2월 21일 일어난 조천 독립만세운동을 한석영 선생과 저희 할아버지께서 함께 하셨다. 조천 만세동산에도 할아버지 사진이 걸려있다”며 “그런데 한석영 선생에 대해서는 국가가 독립유공자로 인정했지만 저희 할아버지는 인정하지 않고 있다. 2004년부터 몇 번 신청했지만 아직까지 안됐다. 거부하는 이유는 4.3희생자라는 이유 밖에 없다”고 억울함을 토로했다. 

그렇지만 한 지부회장은 “저희 자녀들, 손자들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은 한백흥 할아버지”라며, 자신의 할아버지가 언젠가는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을 것이란 희망을 전했다.

# 남원읍 신흥리 김성홍, 장성순
서귀포시 남원읍 신흥리에는 뛰어난 정치력으로 주민들을 지켜낸 구장(區長)과 경사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4.3은 말한다> 5권에 보면 김성홍 구장과 장성순 경사의 활약이 고스란히 적혀 있다. 

4.3 당시 토벌대는 김 구장에게 신흥리 주민들의 성향을 자주 물었다. 자신의 말 한 마디에 여러 사람의 목숨이 달려있다고 판단한 그는 무조건 ‘모른다’고 일관했다. 공문에서조차 모른다고 처리하지 않으면서 붙여진 별명이 ‘몰라 구장’이었다. 

다만 여러 사정을 종합해볼 때 김 구장은 정말 아무 것도 몰라 외면하는 모습이 아닌, 토벌대들의 비위를 잘 맞추면서 불똥이 튀지 않도록 슬기롭게 대응했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는다.

신흥1리 노인정에서 만난 김 구장의 여섯 번째 딸 김복순(82) 할머니와 동시대를 살았던 정성용(80) 할아버지의 증언에서 김 구장의 성품을 확인할 수 있었다.

당시 10대 초반에 불과했던 김 할머니가 기억하는 아버지의 모습은 ‘술 잘 마시고 사람들과 두루 어울려 지내는 어른’이었다. 김 할머니는 “그 당시 나는 집에 오는 경찰들 밥 해주느라 정신이 없었다”고 말했다. 

정 할아버지는 “김성홍 어르신은 4.3 지나면서 3년 정도 구장 임기를 마치고 물러나셨다. 그만두고 나서도 주민들이 욕 한번 안할 만큼 잘 지내시다 84세에 병으로 돌아가셨다”고 밝혔다.

경찰, 주민과 돈독한 친분관계를 유지하면서 위기를 헤쳐나갔을 것이란 추측이 가능한 대목이다. 
▲ (사)한국작가회의 제주도지회는 18일 제주 동부지역을 대상으로 <4.3 추념 문학기행>을 실시했다. 왼쪽은 김성홍 구장의 여섯 번째 딸 김복순(82) 할머니, 오른쪽은 정성용(80) 할아버지 ⓒ제주의소리
▲ (사)한국작가회의 제주도지회는 18일 제주 동부지역을 대상으로 <4.3 추념 문학기행>을 실시했다. 문학기행 참가자들이 신흥1리 노인정에서 '몰라구장' 김성홍과 장성순 경사에 대해 현장 증언을 듣고 있다. ⓒ제주의소리
주민 희생을 최소한으로 막고자 부던히 노력한 장 경사의 미담도 확인된다.

정 할아버지는 “당시 무장대를 도왔다는 이유로 많은 사람들이 처형됐는데 장 경사가 신흥리 주민들의 처형을 막았다”고 밝혔다.

정 할아버지에 따르면 토산에서 온 군인들이 마을 여성 수십 명을 모아놓고 ‘무장대에게 반찬이나 쌀을 제공했다’며 전부 죽이려고 했다. 그때 장 경사가 나서서 ‘무장대가 협박하고 괴롭혀 어쩔 수 없이 도왔다. 이들은 죄가 없다’고 적극적으로 해명했다.

결국 군인들은 나머지는 돌려보내고 8명을 주동자로 판단해 토산으로 끌고 갔다. 그럼에도 장 경사는 말을 타고 직접 토산으로 가서 설득한 끝에 8명도 데려와 모두 무사히 살아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정 할아버지는 “내 사촌누이도 그 당시 군인들에게 죽을 뻔 했는데, 장 경사 덕에 살아나서 아이도 낳고 살 수 있었다”고 고마움을 전했다.

김순철, 한백흥, 송정옥, 김성홍, 장성순 등 이들 모두는 자신의 목숨도 얼마든지 위험할 수 있는 상황에서, 내 가족과 이웃을 위해 기꺼이 앞으로 나서는 용기를 실천한 분들이다.

참가자들은 제주4.3평화기념관을 찾아 이런 의인들을 더욱 널리 알릴 수 있는 공간이 별도로 마련돼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현재 제주4.3평화기념관에는 ‘집단학살 속의 의로운 바람’이란 제목으로 상설전시장이 마련돼 있다. 

4.3초기 평화적인 해결을 위해 노력한 김익렬 연대장과 예비검속자 학살을 거부한 문형순 경찰서장 등 대표적인 4.3의인들을 비롯해 김성홍, 장성순 등 의인들을 소개하고 있다.

그러나 다른 전시공간과 비교할 때 위치나 규모도 상당히 열악하고, 의인들에 대한 설명도 상세하지 못해 ‘수박 겉 핥기’에 머무르고 있다는 지적이다. 
▲ (사)한국작가회의 제주도지회는 18일 제주 동부지역을 대상으로 <4.3 추념 문학기행>을 실시했다. 제주4.3평화기념관의 상설전시장 ‘집단학살 속의 의로운 바람’ ⓒ제주의소리
▲ (사)한국작가회의 제주도지회는 18일 제주 동부지역을 대상으로 <4.3 추념 문학기행>을 실시했다. 김익렬 연대장, 문형순 경찰서장 등이 소개된 상설전시관 ⓒ제주의소리
실제 '애꿎은 희생을 막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무고한 주민들을 살리는데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는 식으로 당시 활약상을 불분명하게 서술하거나, 축약하는데 그친다.

새로운 인물의 추가도 몇 년째 이뤄지지 않으면서 전반적인 개선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높았다.

김수열 지회장은 “자라나는 미래 세대들에게 4.3을 알려줄 때 역사적인 사실을 전해주는 것도 중요하면서, 어려운 상황 속에서 의로움을 지켜낸 분들의 감동적인 사연도 반드시 널리 알려져야 한다”며 4.3평화재단과 제주도의 관심을 촉구했다.

참가자들은 제주도개별특별법 저지를 위해 1991년 스스로 목숨을 끊은 양용찬 열사의 묘소를 참배하는 것으로 이날 일정을 마무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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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한국작가회의 제주도지회는 18일 제주 동부지역을 대상으로 <4.3 추념 문학기행>을 실시했다. 양용찬 열사의 묘소를 참배하는 문학기행 참가자들.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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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한국작가회의 제주도지회는 18일 제주 동부지역을 대상으로 <4.3 추념 문학기행>을 실시했다. 양용찬 열사의 묘소.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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