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근대건축 산책] (21) 건축가 김중업 이야기 下

#. 제주대학교 구본관, 어떻게 건축되었는가?

-임시시설에서 용담동 캠퍼스의 시대로

제주대학 구본관이 건축된 배경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제주대학교의 변천사를 간략하게 기술할 필요가 있다. 도립 초급대학에서 종합대학으로 승격되는 과정속에  깊은 뜻을 가진 학장과 김중업의 인연으로 한국건축계의 대표건축물이 탄생되었기 때문이다.

제주대학교의 초창기의 캠퍼스는 1952년 6월 도립 제주초급학교(제주향교를 임시시설사용)로 출발한 이후 1955년 4월 도립 제주대학(한국피혁주식회사 건물과 부지 매입하여 학교시설로 사용. 이후 부지 이전하여 신축 사용)으로 승격되었고, 1962년 3월에 숙원사업이었던 국립대학으로 승격하게 되었다. 어느 정도 시설확충이 이루어지고 1962년부터는 국립대학으로 승격되면서 1981년까지 본격적인 용담캠퍼스의 시대를 열게 되었는데 문종철 학장, 김계용 학장, 변시민 학장, 현평효 학장으로 이어지면서 캠퍼스 시설은 많은 발전을 이루게 되었다.

1961년 1월 18일 문종철 학장이 취임한 후 국립 이관을 추진하면서 장기적 관점에서 시설 확충이 구상되기 시작하였다. 용담동 캠퍼스는 제주공항이 인접한 데다 북쪽으로 바다가 끼어 있어 시설 확충이 곤란한 조건이므로 대학 발전을 위해서는 캠퍼스 이전이 필요하다고 판단하고 용담캠퍼스는 법문학부 중심으로 활용하는 방침을 결정하고  적합한 부지를 선정하는 작업을 시작하였다.

그런데 제주시 관내에서 새로운 부지를 매입하는 데는 막대한 경비가 소요되어 제주도의 재정형편으로는 불가능하다고 보고 당시 제주 농고 부지와 제주대학 부지를 교환하기 위한 절충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이 절충이 여러 가지 사정으로 어려움을 겪게 되자 자연과학 계통의 학과만이라도 서귀포로 이전해야 하겠다는 방침을 세우게 되었다.

이러한 방침을 결정하게 된 것은 서귀포가 제주시에 비하여 토지 가격이 저렴한데다 감귤 주산지이며 온화한 기후로 아열대 작물까지 재배되고 있으므로 이농학부를 서귀포로 이전한다면 농축산에 관계되는 학과를 특성있게 운영할 수 있으며 남제주군 지역의 발전에도 기여 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또 이러한 현실적인 요청 이외에도 서귀읍(1981년 7월 1일 서귀읍과 중문면이 통합하여 남제주군으로부터 분리되어 시로 승격) 주민들의 대학 캠퍼스 유치를 위한 노력이 크게 작용했음도 사실이었다.

이농학부의 이전 방침이 확정되자 일부 도민들의 반대 여론도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이를 설득하면서 김영관 도지사를 비롯한 관계 요로에 적지의 제공을 절충하였다. 그 결과 서귀읍 동홍리 일대 7만여 평을 이전후보지로 선정하고 1961년 4월부터 부지매입을 위한 작업을 착수 하였다. 이에 따라 당시 제주도지사였던 김영관 해군제독의 적극적인 행·재정적인 후원이 뒤따랐다. 남제주군 및 서귀읍(읍장 부윤경)과 서귀읍 개발위원회(위원장 김찬익, 부위원장 허민) 에서는 자진해서 부지매수추진위원회를 구성하여 매입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또한 일부 주민들은 자기소유의 토지를 자진해서 희사해 주기도 하였다.

#. 농학부의 서귀포 이전과 시설 확충
건축가 김중업이 계획한 이농학부캠퍼스와 알려지진 않은 작품들

농학부 서귀포 이전은 제주대학이 국립으로 이관되기 1년 전인 1961년 초부터 본격적으로 추진하기 시작하여 국립 이관 직전인 1962년 2월에는 서귀읍 동홍동 1510번지에 부지 71,938평이 확보되었다.

그러나 기본 시설공사는 시설비 확보 문제로 지연되다가 1963년도 정부예산에 시설비 2000만원이 계상됨으로서 이 해 6월에야 공사가 착공되었다. 공사 내용은 건물 6동에 총 건평 747평으로, 본관 138평·강의실 182평·실험실 215평·도서관 112평·가축병원 50평·창고 50평·온실 등이었다.

기본 시설공사가 끝난 후 1964년 2월에는 농학부를 서귀포 캠퍼스로 이전하여 3월부터 농가정과를 제외한 농학부 강의가 이곳에서 실시되었다. 서귀포 이전 당시 이농학부 시설 규모는 건물 747평 외에도 대지 2만 평·체육장 5000평·농장 5만 등 총 7만5000평의 부지 외에도 부속시설로서 식물원 2만2000평·채종포 3만평, 섶섬과 문섬의 7만 평을 포함하여 목장 및 연습임업지로 197만 평 등 총 200만 평 이상의 토지를 보유하고 있었다.

농학부 이전 이후에도 부속시설을 중심으로 시설 확충이 계속되었다. 1965년에는 농장관리사·계사·돈사·우양사(牛養舍) 등 총 131평을 신축하였고, 1967년에는 실험동물 사육실·가축관리사·농장용 창고 등 93평을 신축하였다(1966년-1967년의 농학부 배치도 참조).

기본 시설계획은 김중업이 설계하고 동방공영사가 시공을 맡아 1964년 1월에 준공하였는데 본관(1966년-1967년의 농학부 배치도 참조)만이 2층일 뿐 나머지는 모두 단층으로 전원적인 특색을 살린 캠퍼스 형태였다. 특히 농학부 본관은 그리 크지 않은 규모였지만 개구부를 비롯한 입면 디자인이 독특하고 1층과 2층이 분리된 듯한 형태적 구성과 1층 부분의 제주석 사용으로 건축물 전체가 중후한 느낌을 갖게 하는 세련된 건축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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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외에 농학부 부지 남쪽으로 시설확충을 통해 현재 서귀중앙여중학교로 사용되고 있는 서귀포시 동홍동 1488-1에 수산학부도 건축되었다(1970년 농․수산학부 서귀캠퍼스 배치도 참조). 정확한 기록은 없으나 수산학부 본관의 옛 사진을 보면 3층 규모의 현대식 건축물을 신축하였는데 이후 증개축으로 인해 오른쪽 건축 일부가 철거되는 등 외관이 변경된 것으로 보이며 농과대학 건물 등으로 사용되었다가 용담캠퍼스로 통합되면서 교육청으로 소유권이 이관되어 현재 서귀중앙여중으로 사용되고 있다.

현재 남아 있는 건축물은 I자형 배치형태를 하고 있으며 증개축등으로 인해 측면으로 부속적인 기능의 건축물이 연결되어 있는 형태를 하고 있다. 수산학부 본관은 좌우대칭으로 4개면이 각각 다른 입면형태를 구성하고 있으며 정면은 수직적 요소가 강조된 반면 좌측면은 르 꼬르뷔제의 건축언어라 할 수 있는 루버가 장식되어 있다. 또한 중앙출입구의 길게 돌출된 구조물, 그리고 지면에서 분리된 듯 한 계단의 구조가 특이하다. 즉 근대건축에서 찾을 수 있는 단순하고 기능적인 요소들이 잘 반영된 건축물로 외형은 각각 상이한  입면의 요소를 갖고 있는데 르 꼬르뷔제의 작품에서 엿볼 수 있는 돌출된 창과 피로티 등의 요소들을 엿볼 수 있으며 단순하면서도 절제된 입면으로 구성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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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내부공간의 계단은 외부의 수직적 벽체와 일체화되어 단순하면서도 간결한 구조미, 난간과 분리된 자유로우면서도 강렬한 조형성, 그리고 이와는 대조적으로 간결하게 처리된 3개의 손잡이는 구조, 조형, 기능 모두가 조화롭게 디자인되어 있는 하나의 작품같이 느껴진다.

수산학부 본관 이외에 농학부 도서관도 흥미롭다. 학교캠퍼스의 시설배치 전반을 계획했다는 점과 농학부 본관에 적용된 제주석의 마감방식, 곡면처리 방식 등을 고려할 때 김중업 특유의 곡선미와 의장적 요소, 그리고 수직수평적 요소의 조화속에 강조되는 매스의 볼륨감 등은 전형적인 김중업 작품이라 생각된다. 농학부 도서관은 ㄱ자형건축의 배치형태(1970년 서귀캠퍼스 농․수산학부 배치도 참조)였는데 석조 및 벽돌조 2층으로 112.3평의 규모로 총 110석의 열람석으로 당초 운영되었다.

#. 용담캠퍼스 본관 신축과 제주대학 구본관의 탄생
 
- 문종철 학장과 건축가 김중업

국립 제주대학의 초대학장으로 문종철 선생이 발령되었다. 이때 제시된 대학 운영방안의 하나로 이농학부의 서귀포 이전을 세웠으나 용담캠퍼스의 연구 환경이 개선되지 않아 정부에 건의하여 본관 건축을 추진하게 되었다. 당시 이농학부가 서귀포에 마련한 현대식 시설로 이전함에 따라 용담 캠퍼스에는 법문학부와 가정학과만이 남게 되었으나, 강의실이나 연구실 사정은 종전에 비하여 크게 개선되지 못하였는데 별관 시설이 워낙 노후하여 일부 강의실을 폐쇄해야 할 정도로 열악한 상황이었으며  본관 면적이 고작 573평에 불과하였다.

이에 따라 1964년 정부 예산에 건물 신축 사업비 일부가 계상됨에 따라 이 해 10월 15일 도서관을 포함하게 될 용담캠퍼스 신관 건축공사가 2년 공기를 계획으로 착공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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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배경으로 인하여 문종철학장이 개인적인 친분이 있었던 김중업에게 본관설계를 의뢰하게 되어 구 제주대학 본관이 탄생하게 되었다. 좋은 건축물이 탄생하기 위해서는 역시 건축에 대한 이해가 깊은 건축주, 건축주의 의도를 잘 파악하는 건축가의 만남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김중업의 자서전성격의  작품이라고 할 수 있는 [건축가의 빛과 그림자](열화당, 1984)에서 문종철학장과의 만남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나를 아껴 주셨던 독법학자인 문종철 선생이 제주도에 제주대학교 본관 설계를 위하여 불러 주셨다. 한라산 줄기를 타고 제주 앞 바다에 이르는 용두암, 그 옆에 이상에 불타는 젊은 학도들을 위하여 전당을 꾸며 보자는 이야기였다. 건축이란 클라이언트와 건축가가 동심일체될 때 비로소 쾌심의 작품이 탄생된다. ……」
 
두 분사이의 관계를 깊이 파악할 수는 없으나 단순한 건축주와 건축가의 만남이 아니라 서로를 존중하고 이해하는 그 이상의 관계였던 것 같다. 이러한 관계가 한국건축사에 남는 건축작품을 탄생시킨 또 하나의 배경이 되었다고 평가된다.

원래 제주대학 구본관은 연건평 575평 규모의 4층 건물로서 1층(119평)은 학생회관, 2층(191평)은 도서관, 3층(193평)은 행정사무실과 교수연구실, 4층은 민속박물관으로 사용할 계획으로 1964년 10월 15일에 착공되어 순조롭게 진행되는 듯하였으나, 예산의 뒷받침이 제대로 되지 않아 구본관은 완공을 하지 못한 체 일부 공사만을 끝낸 후 1967년 3월15일 본부와 도서관, 학과사무실이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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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관 건축공사는 김계용 학장이 취임한 이후인  착공으로부터 6년이 지난 1970년에야  완공하게 되었는데 공사 중에 설계가 변경되어 1층의 학생회관은 완전 백지화되는 등 수많은 산고(産苦)를 겪으며 탄생하게 되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제주대학 구본관은 제주대학이 국립대학으로 승격되는 첫 해에 이루어진 중요사업이며 제주대학이 오늘의 제주대학으로 발전을 이루게 한 토대가 되어 제주대학 발전사에 있어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 기념비적인 건축물이며, 제주대를 거쳐 간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포근한 서정시 같은 이미지를 간직하고 있을 것이다. 한 걸음 나아가, 한국 현대 건축사에 영원히 남을 몇 되지 않은 역사적 가치가 있는 건축 작품이기도 하다.

- 제주대학 구본관의 건축적 의미

김중업의 자서전적인 작품집인 [건축가의 빛과 그림자]의 표지에는 프랑스대사관과 제주대학 구본관의 사진이 표지 앞과 뒤로 나란히 게재되어 있다. 그만큼 김중업의 혼과 열정이 담긴 대표적인 작품임을 짐작케 하고, 이 사실 자체만으로도 그 건축사적 가치를 가지는 것이다.

제주대학 구본관은 철저하게 르 꼬르뷔제의 규칙과 방법이 적용되면서도 지역적인 조건이 배려된 공간성과 장소성이 어우러진 대표적인 작품이다. 
 
입면과 평면의 공간구성에 있어서 르 꼬르뷔제의 근대건축 5원칙이 적절히 적용되었다. 각 층의 평면은 기둥에서 벽체가 분리됨으로서 자유로운 평면을 구성하고  뿐만 아니라 자유로운 입면 형식을 취할 수 있게 하였다. 또한 부분적으로 분절된 형태이지만 3층의 연속적인 창, 기둥과 분리된 2층과 3층의 외부 벽체에 의한 자유로운 입면, 우측면의 3층 돌출부분을 지지하는 외부기둥은 피로티의 기능을 가지는 것이다. 그리고 옥상의 노천스탠드는 옥상정원의 변용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철저한 르 꼬르뷔제의 기능주의적 규칙과 방법을 적용하면서도 지역 풍토와 주변경관을 배려하고 장소성과 공간성을 강조하듯 조형적 이미지를 강렬하게 전달하고자 하였다.  1층과 2층 부분이 기둥과 벽체가 분리되고 단순한 구성을 함으로서 교수연구실로 사용하였던 3층 부분의 매스는 마치 날아갈 듯한 항공기의 이미지이거나 혹은 두둥실 떠있는 듯 한 선박의 형상을 하고 있다. 실제로 제주대학 구본관의 대지는 바다에 가까운 들판이었고, 한 때는 일본군의 군용비행장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는데, 구 본관은 멀리서 보면 하늘로 웅비할 듯 한 모습이다.

아마도 부지가 바다에 접해 있고 제주도가 섬이라는 장소의 이미지를 의식한 것이리라. 또한 조개껍질을 펼쳐 놓은 듯 한 현관, 2층과 3층으로 연결되는 후면 경사로의 기하학적 곡선은 해초류의 이미지를 연상시키며 바다가 가지는 생명력이나 제주도가 가지는 역동적 이미지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적 정서에 맞게 결합시킨 르 꼬르뷔제의 건축적 이념이 담긴 건축교과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문종철학장과의 만남을 통해 어느 누구보다 이상과 꿈에 가득 차 의욕적으로 추진하였던 작품만큼이나 제주대학 구 본관은 기능적인 측면과 구조적인 측면에서 몇 가지 문제점을 가지게 되었다. 1층 부분은 기둥에서 과도하게 분리하였고 결과적으로는 공간의 활용도가 떨어지고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없어 공간적 일체감이 없다. 또한 외부의 경사로가 지나치게 강조됨으로서 외부공간과 내부공간의 유기적인 결합이 없다는 것이다. 특히 옥상 지붕에서 볼 수 있듯이 기둥의 기능적 한계를 넘은 듯한 과장된 형태의 표현은 김중업의 건축작품이 가지는 한계성으로 언급되었던 구조적 일체감이 떨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당시 제주도의 건축 시공기술에서 볼 때 곡선의 형태가 많은 건축물의 완공 그 자체가 놀라운 것이니 당연히 건축물에 하자가 많았을 것이며, 게다가 바다 모래의 사용, 준공 후 내부공간의 잦은 변경 등 건축물관리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것 등이 건축물에 심한 균열이 발생하게 한 주요 원인이었는지 모른다.

- 제주대학 구본관 철거와 보존을 둘러싼 논쟁이 보여준 한국건축의 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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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건축계에서도 대표적인 건축물이었던 구본관은 부속고등학교가 들어선 이래 내부 벽면을 일부 철거하여 교무실과 교실로 이용하였다. 그러나 이 땅에 사는 우리들의 무관심과 몰상식으로 인하여 제주대학 구본관이 심하게 균열되고 보수되지 않은 채 마치 난파선의 모습으로 표류하다가 1985년 이래 건물 옥상으로부터 누수현상이 발생하여 2차례에 걸친 방수공사를 하였고 1992년에 다시 누수현상의 문제가 발생하였다. 1992년 9월에 방수공사를 하던 중 붕괴 위험이 있다고 판단되어 공사를 중단 건물 출입을 통제하는 등 급기야 구조적으로 문제가 제기되어 대한건축사협회에 의뢰하여 건물안전도 조사를 추진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김중업 건축연구소(대표 안병의) 의 자체적인 현장답사(1992년 12월)와 대한건축가협회 주관 세미나(1993년 2월)를 거쳐, 이 건물의 역사성과 상징성을 들어 대한건축사협회 등의 지원으로 건물을 보전할 것으로 잠정 결론지음으로서 제주대학 구본관을 둘러싸고 철거와 보존 의견이 활발히 논의되면서 한국 건축계의 중요한 이슈가 되었고 최초의 근대건축물의 보존운동으로 전개되기도 하였다.
 
당시의 건축운동은 [건축가] 2월호~4월호에서 제주대학 구본관 보존문제를 연재될 정도로 활발하게 전개되었는데 한국건축가협회에서 1992년 11월25일에 이사회에서 구본관의 보존에 관한 안건을 상정하여 논의하였고, 같은 해 12월15일에는 김중업의 제자들이 제주를 방문 관계자들과 기초조사 및 논의를 하였다.
 
해를 넘겨 1993년 2월15일에 한국건축가협회와 제주대학교 공동주최로 보존방안에 대한 세미나를 열어 본격적인 논의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 자리에서는 사회를 맡은 이상해 교수(성균관대)를 비롯하여 안병의(김중업건축사사무소), 김정동교수(목원대), 김종수(C․S구조연구소)의 주제발표와 강병기교수를 비롯한 많은 분들의 자유토론이 진행되었다. 토론의 주요내용은 제주대학 구본관이 가지는 예술성과 상징성, 그리고 역사적 가치를 높이 평가하여야 하며 이를 위한  교육부, 제주도, 제주대학, 건축3단체의 협력과 지원, 그리고 구체적인 활동주체로서의 구본관 살리기 위원회구성 등이었다. 이와 같은 논의를 통해 제주대학 구본관은 원상복구와 함께 보존되는 듯 보였다.

그러나 1994년 대한건축학회에 의뢰하여 이뤄진 건물구조안전진단조사 용역(11월 14일부터 12월 24일까지)결과, 건물 지반이 약하고 콘크리트 중성화에 따른 성능저하와 염분에 의한 철근 부식 등 구조적으로 보수·보강이 불가능하다는 판단을 내렸다. 이와 함께 학교 측의 보수비용, 건물용도 등에 대한 검토 끝에 1995년 3월 1일에 이 건물을 철거하기로 최종 결정하였다. 같은 해 10월 2일에 예산 7600만원을 투입 철거하면서 이러한 활동이 지속되지 못하였고, 불행하게도 많은 사람들이 난파선과 같이 구본관의 근대건축물로서의 가치를 알지 못한 채 원형보존조차도 하지 못하고 시간을 보내다 철거되었다.

아마도 김중업도 미래의 운명을 예측이나 했던 것처럼, 그의 자서전적인 작품집 [건축가의 빛과 그림자](열화당, 1984)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나에게도 소중한 작품이어서 오늘에 이르러 쇠퇴해 가는 모습을 볼 때 무척이나 가슴 아프다. 길이 남겨두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필자는 제주도에 생활하는 도민의 한 사람으로, 제주대학에서 건축교육과 연구를 하는 당사자로서  분노와 함께 책임감을 통감하지 않을 수 없다.

제주대학 구본관은 제주대가 국립대학으로 승격되면서 첫 시설 확충사업으로 지어졌고 많은 사람들의 가슴속에  영원한 제주대학의 상징으로 자리 잡고 있다. 건축적으로는 문화재로서의 가치까지 거론되는 우리시대 거장(巨匠) 김중업의 역작이기도 하다. 게다가 김중업의 제주도에 대한 관심과 애착은 건축가의 역할을 넘는 것이었기에 제주대학 구본관의 빈 자리가 더욱 커져 보이기만 하다.
 
#. 구 소라의 성, 김중업의 작품인가?

일부에서는 김중업 작품집에 구 소라의 성이 소개된 적이 없어 그의 작품이 아니라는 주장도 있다. 여러모로 면밀하게 검토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필자의 사견으로는 몇 가지로 미루어  김중업의 작품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되며 이러한 이유 때문에 본고에서 소개를 하고자 하는 것이다.

첫째, 입면에서 적용되고 있는 곡선의 처리방법이 상당히 김중업이 제주대학 구본관과 같은 초기작품에서 구사하였던 곡선이 유사하다는 생각이 든다. 특히 출입구의 피로티 상부의 곡면은 단순한 곡면이 아니라 안과 밖이 일체화된 곡면구조를 이루고 있다.

둘째, 제주석의 사용방법에 있어서도 농학부 본관이나 농학부 도서관에서 볼수 있었던 잘 다듬어진 제주석쌓기와 동일한 기법을 적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셋째, 벽체구조물이 내부공간 안쪽으로 파고드는 공간처리기법을 적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르 꼬르뷔제 특유의 곡선이 외부에서 내부로 혹은 내부공간에서 독자적인 공간을 형성하는 기법이기도 하지만 김중업의 작품인 서산부인과의원, 제주대학교 구본관 등에서도 적용된 기법이기도 하다.

물론 필자의 이러한 주장만으로 김중업 작품으로 단언하기에 한계가 있을 것이다. 좀더 많은 관련자료 수집을 통해 명확히 밝힐 필요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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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 소라의 성은 단순하면서도 곡선이 갖는 아름다운 미적 요소가 돋보이는 소규모 건축물이다. 건축물의 입면은 1층은 개방적이면서도 2층부분은 다소 폐쇄적으로 입면처리를 하고 있으며 매스의 분절, 곡선중심의 선적 요소의 적용 등 수평적 수직적으로 대립적으로 처리함으로서 강한 입면의 장식적 요소로 처리한 것이 특징이다.

특히 단조로운 원형 공간에 작은 원형과 변형된 타원체가 겹쳐지고 삽입됨으로서 내부공간을 더욱 역동적으로 변하게 할뿐만 아니라 매스의 분절효과를 높이기 위해 사용재료를 검은색의 제주석, 붉은 벽돌과 대비되는 재료를 사용하는 등 세심한 배려가 돋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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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곡선과 직선 요소에 의해 4면 각각 다른 표정을 갖고 있는 독특한 형태의 건축은 급한 경사절벽과 완만한 해안선으로 구성되어 있는 제주해안의 장소적 특성에 거슬리지 않게 자리잡고 있다. 각각 다른 표정의 입면형식 못지않게 주변의 풍경 역시 바다와 해안, 숲 등의 자연풍경이 아름다워 건축물을 더욱 멋들어지게 느끼게 한다.

이전에 음식점으로 사용되었으나 제주특별자치도가 매입하여 (사)제주올레 사무실로 사용되다가 현재는 지반안전문제로 인하여 보존 및 활용방안에 대하여 검토되고 있다. 구 소라의 성은 조형적 형태가 특이하여 철거보다는 보존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찾아 볼수 있는 색다른 건축문화자원으로 거듭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참고문헌
김중업(1984), 건축가의 빛과 그림자, 열화당.
김태일(2005), 제주건축의 맥, 제주대학교 출판부
격월간PA(Pro Architect) 김중업 편, 1997.01, 건축세계사.
레이너 밴험 著, 강혁 譯(1988), 거장들의 시대, 태림문화사.
제주도(2003), 제주도 근대문화유산 조사 및 목록화 보고서
제주대학교 40년사 편찬위원회(1993), 제주대학교 40년사.
제주대학교 60년사 편찬위원회(2012), 제주대학교 60년사.
Stanislaus Von Moos 著, 최창길, 예명해 譯(1997), 르 꼬르뷔제의 生涯, 기문당.
日本建築學會(1993), ル․コールビュジエとカーンにおける建築の思索ー近代建築再考の試み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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