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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故 양병윤 화백. 대한민국 언론사에 시사만화 '황우럭'을 남긴 그의 족적은 매우 깊고 크다. 양 화백이 생전 모습. 그의 고향인 한림읍에서 비양도와 한림의 눈부신 바다를 배경으로 포즈를 취했다.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거목이 우리 곁을 떠났다. 

주인공 캐릭터 ‘황우럭’을 통해 시사만화의 대부로 평가돼온 양병윤 화백(71. 한라일보 시사만화가)이 27일 오전 급환으로 별세했다. 

'시사만화의 불모지' 제주에서 시사만화의 꽃을 활짝 피운 '황우럭' 양 화백은 시사만화 입문 40여년 만인 지난 2012년 11월30일로 대한민국 언론사에 빛나는 '1만회' 연재 돌파라는 대기록을 세운 인물이다. 

양 화백은 1944년 제주시 한림읍 한림리 출신이다. 

24세(1968년) 때 제주신문(현 제주일보) 화백 겸 기자로 입사해 시사만화 ‘황우럭’ 연재를 시작했다. 이후 편집국장과 이사, 논설위원을 역임했다.  

1968년 5월10일자 제주신문에 4컷 시사만화 1회 연재를 시작으로, 제민일보 논설위원과 제주매일 논설위원·화백을 거치면서도 붓을 놓지 않았다. 

2009년부터는 한라일보로 자리를 옮겨 여전히 붓을 든 그는, 2012년 11월30일자 한라일보 4컷 만화로 우리나라 시사만화 역사상 두 번째 1만회 연재라는 대기록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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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우럭' 양병윤 화백의 시사만화 1회 연재(그림 왼쪽)는 제주신문(현 제주일보) 1968년 5월10일자이고, 마지막 연재가 된 10600회는 한라일보 2015년 4월27일자에 실렸다.
   
일간지 시사만화 1만회는 국내에서 김성환 화백의 '고바우 영감'에 이은 두 번째 기록으로, 양 화백은 '황우럭'을 통해 40여 년 동안 유신과 독재정권이라는 격랑의 시대 속에서도 부정과 불의에 맞선 목소리를 붓으로 표현해온 역사의 산 증인이다. 

1960~70년대 유신 독재정권과 80년대 서슬 퍼런 신군부 시절에는 혹독한 검열과 탄압을 특유의 익살과 해학, 촌철살인의 기지로 이겨냈다. 

칠순을 넘긴 고령임에도 '황우럭 양병윤'은 마지막까지 여전히 세상의 모든 불평등을 향해 칼날 같은 붓끝으로 황우럭에 생명력을 불어넣어 왔다. 

그의 마지막 연재가 된 27일자 한라일보의 '황우럭' 10600회에도 서민들의 어려운 서민경제난을 해학과 풍자로 해석한 그림이 실렸다. 

제주시 한림읍 한림리 출신의 양 화백은 한국시사만화가회.한국만화가협회 회원, 제주만화작가회 고문, 제주언론인클럽 이사로 활동하고 있다. 한라일보 논설위원 겸 화백이다. 제주도 문화상, 송하언론상, 덕산문화상 등을 수상했다. 

과거와 현재, 미래를 넘나들며 시대를 꿰뚫어온 ‘황우럭’ 양병윤 화백. 이제 그의 목소리는 들을 수 없지만 그의 그림은 앞으로도 영원히 우리 곁에 살아 숨 쉴 것이다. 

유족으로 부인 김유자씨와 2남1녀가 있다. 장례는 가족장으로 치러진다.

빈소는 제주시 중앙성당에 마련됐다. 30일 오전10시 장례미사가 열린다. 장지는 한림읍 금악리 가족묘지. 연락처 010-2534-2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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