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해녀 밀착취재 <이호테우> 낸 사진작가 권철 "제주, 온전히 지켜졌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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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간에서 '늑대같다'는 표현은 주로 음흉한 남자를 가리킬 때 쓰인다. 그에게서 풍기는 늑대같은 인상은 다른 차원의 이야기다. 날 것 그대로의 분위기랄까. 야생에 가까운 느낌. 압도되는 무언가가 있었다. 아우라라고 해도 되겠다. 그가 경상도 남자여서, 해병대 저격수 출신이어서, 맨 몸으로 극한(?)의 보도현장을 누벼서만은 아니다. 

다큐멘터리 사진가 권철(49). 그의 명성은 한국보다 일본에서 더욱 자자하다. 1994년에 일본으로 건너가 사진전문학교에서 보도사진가인 히구치 겐지(樋口健二)로부터 사진을 사사받으며 사진계에 발을 디뎠다.

그 후로 20년 넘게 보도 사진가, 다큐멘터리 사진가로 활동하며 '한국인 사진가로서 최초'라는 수식어가 들어가는 다양한 공적을 남겨온 그다. 아시아 최대의 환락가로 꼽히는 도쿄 신주쿠 가부키초의 밤거리 풍경을 묶어낸 <가부키초>(2013, 후쇼샤)로 일본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고단샤 출판문화상 사진상을 타기도 했다. 

일본에서 이름을 떨치던 그가 귀국을 결심한 건 지난 2011년 3월 동일본 대지진을 겪으면서다. 그저 쉴 생각으로 지난해 4월 제주로 건너와 방을 얻어 지냈다. 우울증으로 카메라를 내려놓고 지내던 그를 자극한 것은 제주 해녀, 그것도 이호테우해변의 해녀들이었다. 

이곳에서 본 해녀들은 그가 평소에 알던 것처럼 깊은 수심을 휘젓고 다니는 게 아니라 양식장을 드나들었다. 아무래도 이상했다. 개발로 해변이 매립되면서 평생의 터전을 잃을 위기에 놓인 것이다. 그네들의 삶과 고충을 알게 되면서 카메라를 다시 쥐었다. 이른바 직업병이었다.

꼬박 100일을 따라다녔다. 작업장인 물속은 물론 탈의장과 병원까지 쫓아갔다. 처음엔 경계하던 해녀 할머니들도 차츰 마음을 열었다. 외부인은 잘 끼워주지 않는다는 마을 제사에도 불려갔다. 이렇게 낱낱이 포착한 순간들은 최근 <이호테우>(2015, 눈빛출판사)라는 제목을 붙여 책으로 냈다. 제주에 가장 먼저 선보이고 싶은 마음에 전시도 준비했다. 제주대학교 박물관(관장 허남춘)에서 22일 개막해 28일까지 열린다. 한국에 돌아와 번역본이 아닌 작업으로 낸 첫 책이자 전시다. 

한 번 꽂힌 테마는 평생 붙든다는 그는 말한다. 제주도는 대한민국의 마지막 보루라고. 이곳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앞으로 제주의 상처난 곳을 찾아다닐 참이란다. 이번 전시를 앞두고 아예 온 가족이 제주로 옮겨왔다. 10년 후에도 똑같은 자리에서 이호의 해녀 할머니들을 찍고 싶은 그의 목표는 '제주가 온전히 지켜졌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담고 있다. 

전시 개막을 하루 앞둔 21일 오후, 제주대학교 박물관에서 권철 작가를 만났다. 

다음은 권 작가와 1문1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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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 여 년의 일본 생활 접고 귀국해 택한 곳이 하필 제주다. 이유가 있었나.

= 일본에서 오래 살다보니 돌아와 지낼 곳을 서울로 생각하고 있었다. 갑자기 가면 적응이 안 될 것 같아 일본과 한국 중간 지점을 고민해보니 제주였다. 4살 아들에게 아빠 노릇을 제대로 못해오기도 해서 가족에게 서비스하는 차원에서 휴양지를 골랐다. 노형에 월세를 얻어 지냈다. 시내에서 가까운 해수욕장을 찾다 보니 이호를 알게됐다. 해수욕장 옆 매립장과 해녀 할머니가 눈에 띄었다. 

솔직히 그 전까지는 제주에는 큰 관심이 없었다. 유명한 관광지라는 소문만 들었을 뿐이었다. 지난해 4월 5일에 제주에 들어왔다. 오자마자 세월호 사건이 터졌다. 중국과 일본에서 지진취재를 하면서 얻은 트라우마가 도졌다. 우울증이 와서 카메라를 손에서 떼고 있었다. 가끔 육지 다녀오고, 일본 다녀오며 지냈다. 매립장에 놀다가 해녀들의 물질하는 장면을 봤다. 해녀가 많은 제주의 여느 마을과는 작업 환경이 달라보였다. 수심이 깊은 바다에서 캐오는 게 아니라 양식장에서 뭘 캐오는 모습이었다. 이호테우해변의 해녀들이 (개발로) 다른 삶을 살고 있구나, 알게 됐다. 

- 이른바 '직업병'인가?

= 다큐멘터리 작업을 10여 년을 하다 보니 직업병이라고 해야 하나. 아 이거 안 되겠다, 작업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카메라를 닦았다. 제주에 온 지 4개월만이다. 2014년 8월부터 10월까지 할머니들을 따라다녔다. 물에도 카메라 가지고 들어갔다. 100일 간의 기록을 가지고 눈빛출판사에서 사진집을 내자는 제안을 했다. 제주에 이런 상처가 있다는 걸, 대한한국 사람들이 알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작업을 하며 특히 눈 여겨 본 것이 있다면. 

= 올해 85세인 홍순화 할머니를 집중적으로 찍었다. 최연장자라는 점도 있지만 홍 할머니는 상군해녀이면서 가장 힘이 세다. 소라 채취할 때 할머니는 50kg짜리 자루를 지고도 도와달라는 소리를 안 하신다. 궂은일도 손수 도맡아 하신다. 그러면서 할머니께 더 많은 관심을 갖게 됐다. 할머니께서 촬영을 할 수 있게 많이 도와주셨다. 저희 어머니가 82세로 할머니와 나이가 비슷하다. 무릎이 아주 안 좋으셔서 고생을 많이 하셨는데 할머니도 무릎이 안 좋아서 일주일에 두어 번 병원에 다녀오신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도 모르게 카메라를 들고 따라갔다. 병원에서 촬영을 완강히 거부했는데, 할머니가 찍게 해달라고 말씀해주시는 걸 듣고 뭉클했다. 

- 마음을 많이 터놓으셨나보다. 사진에서도 티가 난다. 스스럼이 없는 모습이다.

= 이번 전시에 선보이는 60여 점 작품 가운데 연출된 사진은 탐라문화제 때 찍은 단체사진 정도밖에 없다. 한 번은 해녀 할머니들께 얘기를 전해 들었는지 마을 토박이 어르신들이 '우리도 사진 찍어줄 수 있냐'고 물어왔다. 마을에서 1년 중 가장 큰 제사에 참관해 사진도 찍었다. 아무나 근처에도 갈 수 없다고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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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년 만에 한국에 돌아와 지내보니 어땠나.  

= 서울서 겪어보니 대한민국은 치유하기 어렵다. 나만 잘 살면 되고, 배려할 줄 모른다. 제가 1994년 일본 갈 때 삼풍백화점이 무너지고 성수대교가 무너질 때랑 지난해 세월호가 가라앉을 때랑 변한 게 하나도 없다. 거기에 울분을 느꼈다. 

- '제주에서 살려면 이런 사진 찍지 말라'는 이야기도 들었다던데. 

= 아마 노파심이었을 것이다. ‘제주가 지역사회고 작은 동네인데 속살을 건드리고 소위 바른 말을 하면 좋지 않을 지도 모른다. 사진작가로 한국에 돌아왔기에 사진으로 뭘 하겠다고 하면 이왕이면 다른 작가들처럼 제주의 아름다운 모습에 초점을 맞추는 게 좋을 거다’라고 조언을 해준 분들이 종종 계셨다. 서울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제 이력을 아는 사람들 사이에선 달갑게 생각하는 경우가 드물더라. 질투나 시기, 못마땅함 등 복합적인 면들을 피부로 많이 느꼈다. 오히려 어떤 관계자는 '잘 됐다. 주목받고 있다. 좋은 현상이다' 말씀해 주셨다. 좋게 생각하려고 한다.

- 상투적인 질문이지만 묻지 않을 수 없다. 제주에서 전시하게 된 소감이 어떤가. 책 발간에 앞서 제주에 먼저 선보이는 전시다.  

= 일본어로 칸무료(かんむりょう)하다. 말 그대로 감개무량하다. 예전에 가부키초나 텟짱 사진전도 하고 책도 번역본으로 냈지만 이번은 한국에서 한 첫 작업이자 첫 전시다. 2015년 5월이 저에겐 정말 의미 있는 달이다. 이번 책 발간과 전시가 제 인생에서 큰 과도기, 돌파구, 첫 명함이 되리라고 생각한다.

- 게다가 전시에 맞춰 제주로 이주했다. 

= 이주라기보다는 글쎄, 일본에서 20여 년 살았으니 새로운 신세계에 살아보는 것도 좋지 않겠느냐고 돌아오면서 제주로 왔다. 이호에 드나들면서 해녀 할머니들과 정도 많이 들고 대자연으로부터 힐링도 많이 받았다. 서울에서는 내 일도 그렇고 아이도 그렇고 적응하기도 힘들더라. 아등바등 살 것 같으면 한국에 돌아온 의미를 못 찾겠다고 가족회의도 했다. 특히 내 아이가 제주, 제주 노래를 불렀다. 제주도 가자고 졸랐다. 

잘 된 일이 지난 2월에 서울대학교에서 ‘텟짱’ 전시를 하고, 3월에는 소록도에서 전시를 했다. 내년이 소록도 100주년이 된다. 여기에 맞춰서 100년사 편찬하는 프로젝트를 맡게 됐는데 서울서 드나드는 것보다 제주서 가면 녹동항으로 바로 가고 훨씬 가깝고 수월하다. 저는 한번 찍은 테마는 죽을 때까지 해야 한다. 가부키초도 그랬고, 야스쿠니도 그렇고 1년에 한두 번씩 가서 계속 작업을 하고 있다. 소록도는 제가 죽을 때까지 기록해야 할 테마이다. 그래서 가까운 제주도가 여러 모로 좋다. 뭐 그러다 내년엔, 10년 뒤엔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다큐멘터리 작가는 어느 노랫말처럼 정처가 없다. 제가 선택한 제 삶이기에 주어진 대로 살아가려고 한다.    

- 앞으로 제주에선 뭘 할 참인가. 

= 이호뿐만 아니라 상처 난 제주를 기록을 해야 할 것 같다. 치유할 수 있는 방법이 있으면 치유도 하고, 덜 곪은 곳은 기다렸다가 기록도 남기려고 한다. 이호도 자본에 넘어가긴 했지만 되찾을 수도 있다고도 본다. 제 바람 중에 하나는 이호테우해변이 다시 제주도민의 땅이 됐으면 한다. 계속 기록을 해나갈 것이다. 이번에 이호의 해녀분들을 모시고 기념촬영했는데, 10년 후에 사진 찍은 그 자리에서 그대로 찍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믿거나 말거나, 제3차대전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태평양전쟁처럼 대한민국이 샌드위치가 되지 않았으면 좋겠지만, 샌드위치가 된다면 제주도가 타깃이 될 확률이 높다. 그렇기에 더욱 제주도를 유심히 볼 수밖에 없다. 서울은 포기했지만 제주도는 포기하지 않겠다. 또한 중국 자본에 이미 노른자는 먹혔지만 더 이상은 먹혀서도 안 되고, 이미 먹힌 것도 되찾을 수 있는 건 되찾을 수 있도록 재조명하고 싶다. 그러기 위해선 제주도민들에게 욕 먹을 소리겠지만, 우리가 각성해야 한다. 똘똘 뭉쳐서 지켜내야 한다. 심하게 표현하면 제주도는 일본의 오키나와처럼 버림받은 땅이었다. 역사적으로 그래왔다. 제대로 된 진정성과 생각으로 이에 대항하지 않으면 전쟁이 났을 땐 컨트롤타워로부터 총받이로 쓰일 가능성이 크다. 한국, 중국, 일본, 미국 이 네 개 나라에 얽히고설킨 이해관계에 의해 제주도가 희생되지 않기를 바란다. 제주도는 대한민국의 마지막 보루라고 생각한다. 지켜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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