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생 110주년, 그리고 귀천 32주기. 제주 근현대 문화예술계의 큰 산 ‘청탄 김광추(聽灘 金光秋, 1905~1983)’ 선생이 다시 우리 곁으로 찾아왔다. 서귀포시 소암기념관이 10월3일부터 11월29일까지 ‘청탄 김광추 - 탄향유구(灘響悠久)’ 기획전을 마련했다. 제주 예술사에 있어서 ‘산북의 청탄, 산남의 소암’으로 회자될 만큼 청탄 김광추 선생은 소암 현중화 선생과 함께 근현대 제주 문화예술계를 대표하는 ‘어른’이다. 이번 기획전 도록에 실린 청탄 선생의 소평전을 소암기념관(명예관장 현영모)과 필자인 언론인 김종민 씨의 동의를 얻어 매주 월요일과 목요일에 2차례 씩 연재한다. 빛나는 가을 이 계절에, 삶을 예술처럼 살다간 어른 ‘청탄’ 선생의 깊은 울림과 청아한 향기를 느껴 보시기 바란다. ※표시된 각주 내용은 원고 하단에 별도의 설명을 달았다. [편집자] 

①탄생에서 서울유학까지

③해방과 시련…제주도의원 당선

④대표 예술 없는 종합예술인

⑤삶을 예술처럼, 예술을 삶처럼

⑥어진이, “그믐달 지듯 깨끗이 살고파”

 일본 유학

<1편에 이어> 일본에서 그림을 배운 고희동의 영향 때문인지, 김광추는 1928년경 배재고보를 졸업하지 않은 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김광추는 그림 공부에 매진해 2년 만인 1930년에 ‘풍경’이라는 제목의 유화 그림을 그렸다.※11 

1934년 일본에서 한 달간 수채화를 배운 김인지가 조선미술전람회에 입선함으로써 ‘제주도 최초의 서양화가’라는 칭호를 얻게 되는데, 1930년 김광추가 그린 유화가 그보다 앞선 제주도 최초의 서양화인 듯하다.

 독학으로 이룬 서예

당초 김광추가 일본으로 유학 간 까닭은 그림을 배우기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김광추는 유학시절 서예를 배우는 데도 힘을 쏟았다. 김광추는 훗날 소암 현중화의 스승이 된 쓰지모토 시유[辻本史邑]로부터 서예를 배웠다고 한다.※12  같은 시기는 아니지만 동문인 셈이다. 두 거장의 놀라운 인연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김광추가 쓰지모토 시유에게서 서예를 배웠다.’라고 표현하는 것은 약간 조심스럽다. 쓰지모토 시유를 김광추가 사사(師事)했다는 것은 김광추 또는 현중화의 말에서 비롯된 듯한데, 이에 관해 현중화는 아래와 같이 말했다.

“청탄 선생의 서예는 내 스승이기도 한 쓰지모토 시유 선생께서 매주 한 번씩 대판에 가서 지도할 때에 그 선생의 지도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얼마동안 그 선생님과 접촉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우리 스승은 육조(六朝) 글 숭상하여 지도했기 때문에 우선 위(魏), 진(晋)의 비문을 많이 임서(臨書)시키곤 했습니다. 특히 행서일 경우 2왕[二王: 王獻之, 王義之(王羲之의 오기인 듯-필자 주)]를 근본적으로 삼았는데, 청탄 선생의 글씨에는 전혀 그런 맛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의 전형적인 서풍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당시 자신이 꼭 누구에게 배웠다고 꼬집어 말한 적은 없습니다.”※13

위에 인용한 현중화의 말에 의하면, 청탄 김광추가 일본에 있을 때 쓰지모토 시유로부터 일시적으로 가르침을 받았거나 약간의 영향을 받았을지는 몰라도 단아한 김광추의 글씨는 독학으로 이루어진 ‘김광추체’라고 할 것이다. 

김광추는 평생 세 번에 걸쳐 일본에서 살았다. 제1차 도일(渡日)은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1928년 배재고보를 중퇴한 후 그림 공부를 위해서였다. 이 시기에 유화 그림 ‘풍경’을 그렸던 김광추는 1932년 귀국했다. 

김광추는 귀국 후 화북사립보통학교에서 1년간 훈도 생활을 하다 1933년 두 번째로 일본으로 떠났다. 일본에 체류하고 있을 때인 1936년에 제주 조천 출신인 김문준(金文準)이 사망하자, 김광추는 장례위원장을 맡아 옛 은사인 김문준의 유해를 제주로 봉환하는 데 앞장섰다. 사회주의자인 김문준은 일본에서 유명한 노동운동가였다. 김문준의 유해 봉환은 해방 후 김광추의 삶에 큰 영향을 끼친다.

김광추는 1933년 제2차 도일 후 1937년 귀국할 때까지, 김문준의 유해 봉환에 앞장섰던 것 외에 어디에서 무엇을 했는지 알려져 있지 않다. 김광추가 이 시기에 대해 입을 열지 않은 까닭은 해방 후 우리사회에서 민감한 ‘사상 문제’ 때문일 것이라고 추정된다.

그런데 김광추는 왜 1937년 일본을 떠나 귀향했던 것일까? 일제강점기는 일본이 중일전쟁을 일으켰던 ‘1937년’을 기준으로 하여 그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고 할 수 있다(1937년 12월 난징을 함락한 일본군은 불과 6주 동안에 난징시민 30만 명을 학살했다). 중일전쟁을 계기로 일제의 군국주의가 노골화했기 때문이다. 

이 시기에 나치즘과 파시즘이 본격적으로 창궐했다는 점을 놓고 본다면, 1937년을 전후한 시대적 의미는 세계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중산층과 노동자·농민을 대변하며 선거를 통해 정권을 잡은 공화파에 대해 파시스트 군부세력인 프랑코가 쿠데타를 일으킴으로써 시작된 ‘스페인 내전’은 그 대표적 사건이다. 

파시스트에 맞서기 위해 전 세계 자유주의자들이 자원해 스페인 내전에 참전했던 사실은 헤밍웨이의 소설이자 영화로도 잘 알려진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에 묘사되어 있다. 프랑코의 지원요청을 받은 독일의 폭격기가 1937년 4월 26일 게르니카 주민을 학살한 사건은 피카소의 유명한 그림 ‘게르니카’의 배경이기도 하다. 이어 세계의 역사는 1939년 9월 1일 독일의 폴란드 침공을 시작으로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된다. 

1937년 7월 발발한 중일전쟁은 식민지 조선에도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민족말살의 세상이 온 것이다. 이 때문에 10여 년 전 민족문학작가회의는 친일작품 목록을 발표하면서 그 기준을 중일전쟁 이후 작품으로 삼았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식민지 청년 김광추가 일본에 계속 머물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한편 김광추는 귀국 후 화북마을 초대 의용소방대장과 구장(區長. 현재의 里長)을 맡기도 했다. ※14  1942년에는 일본 "아사히 카메라"지 주최 사진공모전에서 ‘나루터’라는 작품으로 응모해 입선으로 입상했다.※15

※11  김병택, "제주예술의 사회사" 상, 제주대학교 탐라문화연구소, 2010, 112쪽.

※12  강봉석, ｢청탄 김광추(1905~1983) 서예의 미술사적 연구｣(제주대 사학과 석사학위논문), 2015.

※13  오문복, ｢이 지방 서예의 대가 소암 현중화 옹이 말하는 청탄｣, "월간 관광제주" 제23호, 1986, 21쪽.

※14  김광추의 일본에서의 삶은 김병택의 앞의 책과 강봉석의 앞의 논문에 의지한 것이다.

※15  김병택, 앞의 책; 강봉석, 앞의 논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