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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가 우리 곁으로 온다. 매주 한편씩. 시보다 사람이 큰 시인 김수열. 제주 섬에서 나고 자란 그가 30여년 정들었던 교단을 떠나며 시를 담은 도시락(島詩樂)을 들고 매주 월요일 아침, 독자들과 산책에 나서기로 했다. 살다가 시가 된 제주 시인과 그들의 시를 김수열 시인이 배달한다. 섬(島) 시인들이 토해 낸 시(詩)가 주는 소박한 즐거움(樂)이 쏠쏠할 테다. 시 낭송은 시를 쓴 시인이 직접 맡고, 김수열 시인은 시 속에 살아 숨 쉬는 소리를 끄집어내 우리에게 들려주기로 했다. 우리의 일상과 너무나 가까운, 우리의 생각과 너무나 닮은 시인의 목소리로. 한 주를 시작하는 월요일 아침, 머릿속을 떠나지 않고 가슴을 든든히 채워줄 ‘김수열 시인의 도시락 산책’에 <제주의소리> 독자들도 함께 동행하길 기대한다. [편집자] 

[김수열 시인의 도시락(島詩樂) 산책](34) 안개 주행 / 장영춘

무작정 비상등 켜고
천백도로 달린다

꿈의 경계선이
여지없이
무너진

차창 밖 그렁그렁한
점선들이 
맺힌다

떠날 때 이 길 같다면
오리무중이라도 좋아
통화권 이탈지역
전원조차 꺼버리고

하루쯤 안개 숲에 묻혀
바위처럼
쉬고 싶다

끝처럼 끝 아닌 길
또 하나의 길을 간다

어리목 갈림길
급경사가 끝날쯤에

저장된 기억의 저편
내 파일을 
지운다


장영춘 : 『시조세계』로 등단. 시집으로 『쇠똥구리의 무단횡단』,『어떤 직유』등이 있음. 

가을빛이 사위어갑니다.
늦은 밤에 소리 없이 찾아와 이른 아침에 새벽길 떠나는 나그네를 닮았습니다.
그렇게 떠나는 날엔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새벽안개가 낮고 짙게 드리워져 떠나는 이의 발목을 동여맵니다. 결국 안개 속에 구속이 되고 맙니다.
제 스스로 갇힌 자발적 구속인 셈이지요.

그 길을 달려 산길을 넘습니다.
오리무중 산을 넘다 잠시 상념에 잠깁니다. 산 속에 묻힌 바위처럼 온갖 상념에서 벗어나 모든 관계에서 고립된 채 거기 이대로 머물고 싶지만 끝이라고 생각한 곳에 다시 길이 있습니다. 안개 속에서 저장된 내 파일은 삭제되고 맙니다.
산도 들도 지금은 온통 새벽길 안개주의보입니다.
불현듯 길을 잃고 싶은 사람은 일찍 서둘러 길을 나서기 바랍니다. / 김수열

김수열: 『실천문학』으로 등단. 시집으로 『어디에 선들 어떠랴』, 『생각을 훔치다』, 『빙의』 등이 있음. 제4회 오장환문학상 수상.

* 시·시낭송 / 장영춘 시인
* 도시락(島詩樂) 배달 / 김수열 시인
* 영상 제작 / <제주의소리> 박재홍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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