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교과서 국정화로 나라가 들끓고있다. 각종 조사에서 반대 여론이 확인됐는데도 정부는 대통령까지 나서 "국정화!"를 외치고 있다. 범위를 좁혀, 제주에서는 4.3 왜곡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다. 국정화 추진의 배경과 몰고올 폐해 등을 릴레이 칼럼을 통해 짚어본다. <편집자 주>

[한국사 국정화 ⑤] 박 대통령 말마따나 역사를 정권이 재단해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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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 고시 확정 이후인 지난 4일 규탄 기자회견을 연 제주시민사회노동단체. ⓒ제주의소리DB

“광기란 개인에게서 찾아보기 어려운 예외가 되지만 집단, 당파, 민족 등에는 규칙처럼 광기가 존재한다”는 독일 철학자 니체의 말이 있다. 역사교과서 국정화 논쟁에서도 비슷한 상황을 목도할 수 있다. 보수측은 좌편향, 종북이라는 낙인찍기에 몰입하고 진보는 이를 부인하고 막는 데 급급하다. 국가발전의 토대를 만드는 정책 논쟁에서 알맹이는 사라지고 집단적 광기에 빠지는 현상이 역사교과서를 놓고 되풀이 되고 있는 것이다.

역사는 국가라는 틀 안에서 국민을 이어주는 핏줄이다. 사실의 존재, 사료와 해석방법, 시기, 개인과 집단의 관점에 따라서 다양하게 형성되어 국민의 지적성장을 돕고 창조성을 배양하는 토대가 된다. 국가의 지식자본인 역사는 다양성을 통해서만 발전할 수 있다. 현재 벌어지고 있는 논쟁의 핵심은 역사의 핏줄을 다양하게 살려 과거로부터 창의적인 미래의 방향을 설계할 수 있는 지혜를 얻게 하느냐, 아니면 단일한 애국주의 역사관으로 무장하게 만드느냐에 있다. 다양한 시각, 균형감, 개방, 관용의 정신을 배우는 것이 ‘올바른’ 역사인식의 기본이다. 박 대통령이 말한 것처럼 “역사에 관한 것을 정권이 재단해서는 안 된다”.
    
국가적 아젠다를 논의하고 합의를 도출하는 공론장이 70년전 정부수립 당시의 이념논쟁을 탈피하지 못한채 지속적으로 황폐화되고 공황상태를 야기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선 좌편향, 종북이라는 낙인은 포퓰리즘을 자극하는 선전술로 정략적으로 먹기 쉬운 먹잇감이기 때문이다. 북한 공산주의자로부터 피해로 받은 트라우마와 학교에서 승공, 반공교육을 받고 이를 내면화한 기성세대는 이념논쟁에서 이성적인 판단이 어려울 수 밖에 없다. 이들에게는 역사해석의 본질인 다양성, 공정성보다는 반공에 입각한 극단적인 국가주의가 최우선적인 선택의 대상이 된다.

정책논쟁이 국가관을 검증하는 이념전쟁으로 쉽게 발화하는 것은 정치집단이 정의보다는 정파의 패권주의와 권력유지에 골몰하기 때문이다. 권력이 논쟁에 과도하게 개입하기 시작하면 분별력을 상실하고 사악한 동물적 본성을 드러낸다. 낙인찍기, 독선과 배제의 정치만이 난무하는 권력투쟁으로 변질되어 좌파, 빨갱이, 적화통일 대비용과 같은 무책임한 언어폭력이 빈번해진다. 검정교과서로 가르치거나 배운 사람은 종북주의자, 검정교과서 99.9%는 좌편향이라는 극단적인 언사를 사용하는 데 거리낌이 없다. 기업의 면접시험에서 국정화 찬성 여부를 묻는 일처럼 줄세우고 다양한 의견을 억제하는 보이지 않는 탄압기제도 발흥한다.

이와 함께 승부에 집착하는 일방적인 소통전략을 세우고 좌편향, 종북, ‘올바른 역사교과서’ 라는 프레임을 만들어 국민을 그 틀안에 가두려는 다양한 선전술이 총동원된다. 이러한 기획을 주관하는 비밀 태스크 포스를 구성하고 프레임에 입각한 메시지 관리, 반대측 논리에 대응하기 위한 논리개발, 대언론 전략, 사회 모든 세력의 우군화를 위한 전술이 치열하게 펼쳐진다. 정부는 단일한 목소리를 내기 위한 관계기관과의 협조체제를 강화할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논쟁의 핵심은 온데간데 없고 정쟁의 모습만 국민에게 비치게 된다.

여기에 미디어 시장의 집중구조가 논쟁의 다양성을 실종시키고, 공론장을 특정 정파의 프로파간다로 하여금 지배하게 만들고 있다. 미디어 시장을 독과점하는 매체들이 경쟁적으로 이념 이슈에 올인하고 다양한 논의가 이루어지는 것을 차단한다. 하루종일 이념전쟁을 확대 재생산하고 부채질하면서 이슈에 대한 사실 확인보다는 선정적으로 치달아 ‘하이에나 저널리즘’과 다름없을 정도의 부정적 상황이 연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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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영후 소통기획자.
중요한 국가정책이 이념전쟁으로 확대되어 설득과 합의 없는 일방적인 추진으로 귀결되는 악성 구조가 고착되고 있다. 자유주의 사회에서 갈등은 발전을 위한 중요한 기제다. 갈등해결 능력은 선진사회로 가는 데 있어 중요한 기준이 된다. 갈등 해결을 위해 광기로 가득찬 진영논리와 마녀사냥에만 몰두하는 사회는 발전할 수가 없다. 우리 공동체는 복잡한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아직도 이념이라는 낡은 무기만 꺼내드는 유아 수준을 넘지 못하고 있다. 정부가 국정화를 확정고시한 마당에 역사교과서 문제를 이념전쟁의 블랙홀에서 벗어날 수 있는 계기로 삼고 싶은 건 허황된 꿈에 지나지 않는 일이 되어 버렸다. / 권영후 소통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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