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관후의 4·3칼럼> (54) 친일인명사전에 오른 초대 제주법원장 최원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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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정숙은 1902년 2월 10일, 최원순과 박효원 사이에 태어난 2남4녀 중의 큰 딸이다.

친일인사 최원순의 생애

‘오랫동안 심의 중이던 사법관 인사는 드디어 15일 군정청으로부터 발령되어 경성을 위시 지방도시의 전(全) 일본인 사법관이 파면되고 조선인 사법관 70여명이 임명되었다. 고등법원은 대법원으로, 동 판사는 대법관으로, 복심법원은 공소원으로, 지방법원 검사정을 검사장으로 개칭하였으며 경성지방법원 춘천지청, 광주지방법원 제주지청을 각각 지방법원으로 승격시키며 각각 전 재직자로 판검사를 임명하였고 그 외에 법무국장이 위탁하는 문제에 관하여 경성재판소에서 심문 판결하는 특별형사검찰위원회를 신설하고 그 위원 9명을 임명하였고, 그 서기 조사부장 동 부장 기록관 회계부장은 추후 임명된다. 재경 3법원 6장관은 전 사법관을 대표하여 15일 오전 12시 군정청에서 우달 법무장관과 공식인사를 하였다. (중략) △제주지방법원 : 판사 겸 법원장 최원순(崔元淳), 검사장 양홍기(梁洪基), 검사 박종훈(朴鍾壎). (후략)’-조선인민보 1945년 10월 16일

최원순(崔元淳, 일본명 山津元淳, 1876~1954)의 본명은 최창순(崔昌淳)이며, 1900년 12월  제주목 주사에 임명되어 1902년 9월까지 재직했다. 1905년 10월 제주목재판소 검사시보에 임명되어 근무하다가 1906년 11월 제주재판소 검사로 승진했다. 1908년 6월 광주지방재판소 제주구재판소 판사로 임명되어 합병 직전까지 재직했다. 법원과 검찰이 분리되지 않았던 시대이다. 합병 후에도 광주지방재판소 제주구재판소 판사로 근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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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농업학교에 설치된 미59군정중대(1948.5).
1912년 3월 평안북도 회천군수로 임명되었으며, 1912년 4월 전라남도 제주공립소학교에 기구 구입비를 기부해 이듬 해 6월 목배를 받았다. 1912년 8월 한국병합기념장을 받았으며, 1915년 10월 평안북도 창성군수로 옮겼으며, 같은 해 11월 다이쇼(大正)천황 즉위기념 대레기념장을 받았다. 1916년 8월 평안북도 희천공립학교에 장학금을 기부한 공로로 목배를 받았다. 1917년 8월부터 1918년 3월까지 평안북도 지방토지조사위원회 임시위원을 겸임했다.

1918년 7월 종6위에 서위되었으며, 같은 해 12월 고등관 5등으로 승급되었다. 1923년 2월 최원순은 변호사를 개업하였으며, 1925년 3월부터 제주전기주식회사 취체역을 맡고, 1925년 6월 제주통운주식회사 감사역에 선임되었다. 1927년 4월 전라남도 도평의회원(道評議會員)에 당선되었으며, 5월 전라남도 제주면 면협의회원 선거에 출마해 당선되었다. 1928년 11월 쇼와(昭和)천황 즉위기념 대레기념장을 받았다. 1929년 제주상선주식회사 감사역을 지냈다.

1930년 전라남도 도평의회원에 재선했으며, 1931년 5월 전라남도 제주읍 읍회의원에도 선출되었다. 1934년 제주세무서 관할 내 소득조사위원으로 위촉되었다. 1935년 제주읍 읍회의원 선거에서도 재선했으며, 7월에는 쇼와운송주식회사 취체역에 선입되었다. 1936년 5월 제주도 내에 중등학교 설립을 위한 제주중등학교기성회 고문을 맡았다. 1937년 4월 제주금융조합 감사를 사임한 후 곧이어 조합장에 취임하였으며, 같은 달 쇼와운송주식회사 대표취체역으로 취임했다. 1937년 10월 광주보호관찰소의 촉탁보호사로 임명되었다. 촉탁보호사의 임무는 사상범이 출옥 후에 다시 항일운동을 하지 못하게 “사상적 과오를 청산하고 황도정신(皇道精神)을 자각하여 충량(忠良)한 황국신민이라는 본연의 자세에 복귀”하도록 전향시키는 것이었다.

1937년 전라남도 어업조합연합회 특별위원으로 활동했다. 1936년 6월 광주세무감독국 제주세무서 관할 내 소득조사위원에 임명되었으며, 1939년 5월 제주읍 읍회의원에 다시 당선했다. 1941년 9월 조선인들의 전쟁협력을 최대한 이끌어내기 위해 흥아보국단과 임전대책협력회를 통합해 조선임전보국단을 조직할 때 전라남도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같은 해 11월 제주목재주식회사 취체역에 취임해 1942년 3월까지 재직했다. 1942년 6월에도 광주세무감독국 제주세무서 관할 내 소득조사위원에 임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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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공립농업학교.

해방이 되자 재조선 미육군사령부 군정청 임명사령에 따라, 1945년 10월 11일 조선군정장관 미국육군소장 에이 브이 아놀드(Archibald V. Arnold)는 제주도지방재판소 판사 겸 소장에 촤원순을, 검사장에 양홍기(梁鴻基)를, 검사에 박종훈(朴鍾薰)을 임명하였다. 그리고 1947년 10월 경찰후원회 결성식에서 고문으로 추대되었다. 1948년 3월 국회의원선거위원회 제주도위원회 위원장에 선임되었다. 최원순  제주지방재판소 소장도 끌려와 고문을 받는 상황이었다. 

1948년 10월 말경부터 살벌해지기 시작한 읍내 분위기는 11월 중순경에 이르자 절정에 달했다. 9연대 정보과와 헌병대, 경찰 특별수사대와 사찰과, 미군CIC, 서청 등 6대 토벌당국에서는 경쟁이라도 하듯 도민들을 구금, 폭행, 처형했다. 토벌당국은 읍내 유지 대부분을 9연대본부가 있던 농업학교에 감금했다. 농업학교 운동장에는 연행자들을 수용하기 위한 천막이 여러개 쳐져 천막마다 발 뻗을 틈 없이 가득 찼다. 농업학교에서 ‘아무개 석방!’하고 호명당해 불려나가면 이는 곧 처형을 의미했다. 

최원순은 유지사건에 연루되어 혹독한 고문을 받은 후 무혐의로 풀려났다. 1955년 영주음사(瀛州吟社) 사장으로 동인들을 규합하여 시음(詩吟)에 몰두하였다. 초대 제주도교육감 최정숙은 그의 딸이며 제주농업고등학교장을 역임한 최남식은 그의 아들이다.

민족문제연구소가 편찬한 『친일인명사전』에는 제주출신 친일인사로 최원순을 비롯, 강명옥(康明玉)·고권삼(高權三)·박종훈(朴鍾壎)·차윤홍(車潤弘)·홍양명(洪陽明)·고문규(高文奎)·양봉화(梁鳳華)·오건일(吳健一)·임관호(任琯鎬)·임두욱(任斗旭) 등 11명을 거론하고 있다 

‘【제주 3일 합동】지난 26일 제주에 도착한 서울지방법원 합의부 부장판사 양원일(梁元一)씨는 5월 25일부로 제주지방법원장 대리에 임명되었는데 이는 6월 1일부터 실시된 법원조직법에 의하여 전(前)원장 최원순(崔元淳)씨가 정년 퇴직하게 된 때문이라 한다.’-경향신문 1948년 6월 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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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시 산지항 풍경.

최원순의 3·1사건 재판

‘3·1사건 이후 파업, 검거 연달아 본도를 불었던 선풍이 21일에 이르러 그 청산인 공판이 조선인 법정에서 시작하였는데 그 회를 거듭하기 4회에 이르른 심리공판의 총결산! 판결언도가 28일 상오 9시 40분 여러가지 추측과 억설로 긴장한 방청인으로 초만원이 된 심리원 법정에서..... 이어서 11시에 24일 오후 심리된 피고 11명에 대해서 최원순(崔元淳) 심판관으로부터 △김창순(金昌淳) 김상년(金商年 1,000원 벌금) 강희순(姜熙舜 2,000원 벌금) 송경욱(宋京郁 2,000원 벌금) 이상 각각 체형 5개월, 집유 3년. △차두옥(車斗玉) 강창순(姜昌順) 이상 각각 체형 6개월, 집유 3년, 벌금 2,000원. △문기호(文基好 4,000원 벌금) 김완배(金完培 6,000원 벌금) 이상 각각 체형 8개월, 3년 집유. △문달화(文達華) 양치명(梁致明)(각각 체형 6개월) △장진봉(張珍奉 체형 8개월) 각각 판결언도함과 동시에 심판관은 양치명 문달화에 관하여 “경찰의 보고에 의해서 보면 극렬분자로 인정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구류 중에도 개전(改悛)의 상(狀)이 전무이므로 이는 집행유예할 여지가 없는 것이다”라는 설명이 있는데 대해서 피고 양치명으로부터 “구류 중에 많은 고생을 했으므로 검속기일로부터 통산해 주기를 원한다”는 진정이 있었는데 주심은 “복역한다 하더라도 단기이므로 안된다”고 부인, 상오 11시 15분 폐정되었는데 상고를 희망하는 자는 5일 내로 청원서를 제출하도록 하고 벌금을 납입치 못하는 자는 1일 125원으로 해당 벌금액을 환산하여 노역장에 유치하게 된다고 한다.’-제주신보 1947년 4월 28일

1947년 3월 1일 오전 11시 ‘제28주년 3·1기념 제주도대회’ 가 열린 제주북국민하교 주변에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기념행사가 끝난 후 가두시위가 시작되었으며, 기마경관이 군중을 향하여 발포를 하고, 민간인 6명이 숨지고 6명이 중상을 입었다. 3월 10일부터 제주도에서는 유례가 없었던 민·관 총파업이 시작되었다.

3·1사건에 대한 공판은 주로 최원순 재판소장의 주심으로 계속 열렸다. 주로 포고령 2호와 군정법령 19호 위반죄였다. 1948년 8월 21일 해주에서 열린 남조선인민대표자대회에 제주도인민대표로 차마한 안세훈· 김달삼· 강규찬· 이정숙· 문등용과 함께 참가한 고진희는 체형 5개월, 벌금 2,000원(단, 3년 집행유예)형 판결을 받았다. 그 후 계속된 재판에서 조천중학원 생도 이성규(李性圭)· 김진태(金鎭台)(18) 양인에게 체형 5개월 단, 3년 집행유예, 전 도민전(島民戰)의장 안세훈(安世勳)에 대하여 집행유예 5년, 5,000원 벌금 판결하였다.

고창무(高菖武)에게는 벌금 3,000원, 김두훈에게는 체형 6개월 벌금 3,000원(단 집행유예 3년), 김응추에게는 벌금 1,000원을 판결 언도하였으며, 삐라 첩포(貼布)로 말미암아 검거되어 기소되어 있던 강평옥(姜平玉)·임석현(林錫鉉)·김병수(金柄洙)·김항윤(金恒潤)·변승규(邊承珪)·김준혁(金準赫)·신동문(申東文)에 대한 사실심리 공판에서는 체형 6개월의 구형 논고가 있어 6월 18일 판결언도를 선언하였는데 기소된 11명 중 3명 즉 남 1명, 여 2명은 기소유예 처분을 내렸다.  삐라 첩포(貼布)로 말미암아 포고령 제2호, 군정법령 제19호 위반으로 기소된 초등교원양성소 생도 강평옥(姜平玉)·김항윤(金恒潤) 양인에게 체형 5개월, 임석현(林錫鉉)·김병수(金柄洙)·강동천(姜東天)·신동문(申東文)·김준용(金準龍)·변승규(邊承珪)에게 각각 체형 5개월 단, 3년 집행유예 언도가 있었다.

‘20일 상오 10시부터 초만원이 된 제주지방심리원 법정에서 무허가 삐라, 집합 등 포고령 위반의 각 피고에 대한 공판이 있었는데 그 내용은 여좌하다. 먼저 최(崔)주심으로부터 거(去) 22일 사실심리를 마친 한문옥(韓文玉)에게 체형 8개월, 오순배(吳順培)에게 체형 6개월 단 3년 집행유예의 각각 판결언도가 있은 다음 일단 휴정. 이(李) 심판관 주심으로 속개, 먼저 조천리(朝天里) 부동선(夫東善, 26세)에 대한 사실심리로 들어가 미소공위 성공 만세 등 내용의 삐라 첩포(貼布)에 대한 신문이 끝난 다음 박(朴)검찰청장으로부터 피고에 대한 범죄사실은 1건 서류에 의하여 증거가 충분하므로 체형 6개월을 구형한다는 논고가 있어서 일단 심리를 마치고, 이어서 하도리 고기화(高起化, 38세)에 대한 사실심리에 들어가 주심으로부터 “피고는 1945년 10월에 하도(下道) 인위(人委)에서 전리품 대금 1만원을 사용한 사실과 부락민에게 1원씩 징수한 사실이 있는가”의 신문에 피고로부터는 “여사(如斯)한 사실 없다”는 진술이 있음과 동시에 “증인을 재조사하여 달라”는 요청이 있었으나, 주심 이를 인정치 않고 증거서류를 제시함에 피고는 “그 서류는 누가 작성 발행하였는지 피고는 모르겠다”고 주장했으나, 주심은 “누가 발행하였든 피고가 당시의 인위(人委) 재정부장이었던 만큼 책임이 있다”고 긍정하고 사실심리를 끝마친 다음 박(朴)검찰관으로부터 유죄 주장의 논고[구형 10개월]가 있어 끝마치고 이어 강대석(康大錫)씨에 대한 심리로 들어가 주심의 간단한 심문이 있은 후 채(蔡)검찰관의 벌금 3,000원 구형에 주심으로부터 벌금 1,000원의 판결언도가 있은 후 약 11시 반경 일단 폐정. 하오 2시에 속개, 이(李)주심으로부터 전기 부동선(夫東善)에 체형 6개월 단 3년 집유, 고기화(高起化)에 체형 10개월 단 4년 집유의 판결언도가 있었다.’-제주신보 1947년 6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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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3 당시 '라이프'지에 실린 사진들.

장남 최남식의 정치활동

‘금반의 총파업에 대한 대책을 강구하고자 지난 12일 오전 11시부터 도지사실에서 박도지사와 내무국장 김두현씨를 비롯한 각계각층의 유지, 각 파업단체의 대표자 50여명이 회합하여 파업에 대한 요구조건이 속히 관철되어 종전상태로 회복하도록 할 것과 파업중 30만 도민의 민생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제주도 민생문제 임시대책위원회를 조직하고 사무는 13일부터 개시하리라 하는데 당일 선정된 부서 책임위원은 다음과 같다. 위원장에 박명효(朴明效)씨, 부위원장 김두현(金斗鉉)씨, 총무부 김원중(金元仲)씨, 조사부 최남식(崔南植)씨, 교섭부 임관호(任琯鎬)씨, 식량부 백낙희(白樂希)씨, 상공부 이인구(李仁九)씨, 교통통신부 오규일(吳奎一)씨’-제주신보 1947년 3월 14일

최남식(崔南植, 1895~1957)은 최원순과 박효원의 장남이다. 1918년 인천공립상업학교를 졸업하고 제주공립보통학교와 화북사랍보통학교의 교사로 재임하였다. 그 후 메이지(明治)대학 법과를 졸업하고 이듬해 조선식산은행 행원으로 들어갔다. 1925년 5월 제주청년회 서무부를 담당하였으며, 1943년 제주도흥업조합장으로 활동하였다.

1945년 조국이 해방되고 새로운 건국운동에 앞장서면서, 건국준비위원회 제주읍위원장으로 활동하였고 동년 9월 10일 각읍면 대표 1백여명이 제주농업학교 강당에 모여 제주도 건국준비위원회가 결성되었다. 위원장에 오대진(吳大進, 대정면), 부위원장에 최남식, 총무부장에 김정노(金正魯, 제주읍), 치안부장에 김한정(金漢貞, 중문면), 산업부장에 김용해(金容海, 애월면)가 선출되었다. 또 집행위원으로 김시택(金時澤, 조천면) 김필원(金弼遠, 조천면) 김임길(金壬吉, 대정면) 이원옥(李元玉, 대정면) 조몽구(趙夢九, 표선면) 현호경(玄好景, 성산면) 문도배(文道培, 구좌면) 등 10여 명이 선임되었다.

건준의 지방조직이 ‘인민위원회’로 불리게 된 것은 중앙의 건준이 9월 6일 조선인민공화국 창건을 선언한 이후부터였다. 제주도 건준조직은 1945년 9월 22일 행정조직을 표방한 인민위원회로 개편되었다. 그러나 미군정과 제주도 인민위원회의 협력관계도 1947년 3·1절 발포사건을 계기로 첨예한 대립관계로 접어들게 된다.

제주4·3은 본도로서는 당시 치안사무를 담당하고 있는 경찰에서는 제주도 당국과 함께 4월 4일 관·민 대표자 20여 명을 초청하여 의견교환이 있었다. 여기에 출석한 인사는 관공서측에서 최원순을 비롯하여 박경훈(朴景勳)·박종훈(朴鍾壎)·김영진(金榮珍)·김문희(金汶熙)·권헌(權憲)·장영한(張永翰)·양치순(梁致珣)·오규일(吳奎一)·김대현(金大鉉) ·박태훈(朴泰勳)·이인구(李仁九)·전인홍(全仁洪), 민간측에서 최남식(崔南植)·조대수(趙大秀)·박명효(朴明效)·이윤희(李允熙)·백찬석(白璨錫)·김덕부(金德富)·양홍기(梁洪基), 경찰측에서 강인수(姜仁秀)·이호(李虎)·강동효(姜東孝) 등이다. 이 자리에서 최원순의 아들 최남식은 “이청천 장군의 ‘극좌는 우로 가고 극우는 좌로 가라’는 말이 있는데 실로 적절한 말이다. 어떠한 정치이념이라도 민족적 자주성을 떠나서는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극좌로 흘러 소련화를 획책하는 등은 민족적 양심으로써 용서 못할 일이며 절대 경계치 않으면 아니 되리라고 생각한다”고 발언하여 눈길을 끌었다. 

‘경찰후원회 결성식에서 선출된 역원은 여좌하다. △회장 홍순용(洪淳容)씨 △부회장 백형석(白亨錫)씨 강성익(康性益)씨 △이사 이윤희(李允熙)씨 박우상(朴雨相)씨 윤성종(尹性鍾)씨 홍순재(洪淳宰)씨 김의현(金宜鉉)씨 최남식(崔南植)씨 오창흔(吳昶昕)씨 조대수(趙大秀)씨 김희수(金希洙)씨 부기선(夫基善)씨 김신현(金信鉉, 애월면)씨 박창희(朴昌熙, 한림면)씨 김임길(金壬吉, 대정면)씨 김봉규(金奉圭, 안덕면)씨 이기후(李基厚, 중문면)씨 강성건(姜成健, 서귀면)씨 정한익(鄭漢益, 남원면)씨 송권은(宋權殷, 표선면)씨 김성은(金性殷, 성산면)씨 김대홍(金大洪, 구좌면)씨 김문규(金문奎, 조천면)씨 △간사 최제두(崔濟斗)씨 홍종언(洪宗彦)씨 김온희(金溫熙)씨 박태환(朴泰煥)씨 △고문 유해진(柳海辰)씨 최원순(崔元淳)씨 박종훈(朴鍾壎)씨 김영배(金英培)씨 김영진(金榮珍)씨 양치순(梁致珣)씨 김문희(金문熙)씨 김근시(金根蓍)씨 박명효(朴明效)씨 그리고 거(去) 20일에는 읍사무소 읍장실에서 경찰후원회 규약수정위원이 회합하여 동 규약을 수정하였다 한다.’-제주신보 1947년 10월 24일

최남식은 조선민족청년단 활동에도 참여하였다. 조선민족청년단 제주도단부에서는 1947년 11월 5일  하오 3시부터 제주읍사무소 회의실에서 발기인 총회를 개최하여 도 단부 창립위원회 및 이사회를 결성하고 본 궤도에 서게 되었다. 피선된 위원은 위원장 최남식, 부위원장 문봉택(文奉澤), 오광해(吳光海) 등이다. 이날 무슨 영문인지 당일 최님삭은 사퇴하였다. 조선민족청년단은 1946년 10월 미군정의 후원을 받으면서 이범석이 조직한 우익청년단체이다.  

이어 최남식은 정당활동에도 관여하였다. 당시 도지사 유해진을 중심으로 민독당(民獨黨) 제주도지부 결성식이 1947년 12월 18일 오전 10시 열렸으며 준비위원은 다음과 같다.  준비위원 대표 최남식, 부대표 안지훈(安志勳), 서무 책임부원 이종형(李鍾珩) 김형전(金亨銓) 고경화(高京和), 재무 책임부원 홍종언(洪宗彦) 김조현(金祚鉉) 조성규(趙城奎) 김덕수(金德洙) 이공림(李公林), (조직선전 책임위원) 제주읍 방면 박무(朴茂) 강기삼(康箕三) 공성수(孔性洙) 김정순(金廷淳) 송상오(宋相五) 등이다. 

최원순과 최남식은 한 때 빨갱이로 몰려 군부대에 끌려가 일시 감금당하는 수모를 당하기도 했다. 최남식은 여러 우익단체 결성에 앞장섰다. 최남식은 1949년 제주농업중학교 교장에 취임하고 1952년 학제 개편으로 자동적으로 제주농업고등학교장이 되었다. 1956년 제주시의원에 당선되어 의장이 되었다. 

1949년 12월 28일 1,200명의 병력으로 편성된  해병대(사령관 신현준 대령)가 제주에 도착했다. 1950년 한국전쟁이 벌어지자 해병대 사령관은 제주도지구 계엄사령관을 겸임하게 되었다. 특히 그는 ‘유지사건’이라 불리는 ‘인민군환영준비위원회 사건’을 조작해 제주도내 유력인사들을 고문했다. 1950년 8월 초순 법원장·검사장·제주읍장 및 변호사·사업가·교육자 등 유지급 인사 16명이 ‘인민군환영준비위원회’를 결성하였다는 혐의로 제주지역 계엄사령부로 연행되었다. 피의자들은  7월 10일 밀회를 열어 인민군환영준비위원회를 조직하고 위원장에 최남식을 비롯하여 각 부서별 임원을 선정한 후 가입금을 1만원씩 거둘 것을 결의하였다는 것이다. 결국 정보참모실 제2과장 신인철 대위는 제주도립병원 원장 김대홍 등을 체포하였고, 제주지방법원장 김재천 등 도내 고관 및 지방유지급 인사들을 체포 구금하였다. 구금 후 물고문, 곤봉 구타, 총살 위협 등을 가하였다.  

제주지역 사회를 대표하는 법원장·검사장·제주읍장 등이 검속되자,  결국 현지 조사를 위해 내무부에서 선우종원 치안국 수사지도과장이 제주에 급파되었다. 군경합동수사대의 조사 결과, 소위 제주도인민군환영준비위원회는 전혀 실재하지 않은 조직으로 불순분자의 중상모략으로 인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 사건에 연루된 유지급 인사 16명은 김재천(제주지방법원장, 판사), 원복범(제주지방검찰청 검사장), 홍순원(제주도 총무국장), 전인홍(제주도 지방과장), 최남식(제주농업학교장), 이인구(전 제주도 사회과장), 백형석(상업, 제주적십자사 지부장), 최원순(변호사), 김차봉(제주읍장), 김무근(변호사), 김재홍(제주도립병원장, 의사), 이윤희(제주조흥자동차부 대표), 김영희(주정회사 사장), 장용문(총후보국회 서기), 한상용(제주농업중학교 준교사), 조규환(제주농업중학교 훈련교관) 등이다.

‘사건 발생이래 본도의 행정 부문에도 전시 태세를 취하기 위한 적극적인 인사행정 사무가 요청되어 오던 바 작일 신빙할 만한 모 관변측이 제공한 바에 의하면 금반 김지사의 영단으로 교육계의 모든 애로와 평화적 체제를 타개하고 새로운 전시적(戰時的) 인사 조치가 수립될 것으로 기대되는 바 교육계에 한정될 것으로 보인다. 현재 제1차로 제농(濟農) 교장 최남식(崔南植)씨, 한림수중(翰林水中) 교장 오승진(吳承鎭)씨가 각각 정직처분을 당했다 하며 과거 본도 사건 당시 공적이 많고 열렬한 교육가로서 부득한 사정으로 휴직 중이던 강계돈(康季敦)씨를 농교장으로 기용케 되었다한다. 그리고 현 도 장학관서리이며 청년방위대 간부의 중책을 지고 있는 고정일(高正一)씨는 뜻한 바 있어 북교(北校) 교원으로 자진하여 장학관서리직을 사임하였다 하며 동 부서 및 한림수중 교장석은 아직 미정으로 근근 2~3일 내로 교육계 진용에 일대 개편이 있을 것이라 한다.’-제주신보 1950년 8월 6일

‘해병대 정보참모부(G-2)는 제주도 저명인사 13명이 7월 10·15·22일에 북한군이 제주도에 올 경우에 그들을 환영하기 위한 절차를 논의하기 위하여 회합을 가졌다고 주장했다. 이 정보는 소위 공산주의 선전삐라를 뿌리다가 체포된 두 사람의 자백에 근거하고 있다. 그들은 차례로 제주도 유지 13명을 삐라 살포의 배후로 지목했고, 위에서 언급한 회합의 개최에 연관되었다고 지목했다. 그 뒤 체포된 13명 중 4명이 회합의 개최와 성격에 대해 자백했다. 해병대는 이들 중 몇 명이 3년 전 제주도 반란에 연관된 혐의로 체포되었다고 주장함으로써 자신들의 행동을 정당화하려고 한다.’-Memorandum for the record, Subj.:Conditions on Cheju Island, John P. Seifert, Naval Attache, Donald S. MacDonald, Third Secretary of Embassy, Philip C. Rowe, Vice Consul, Aug 17, 1950.

최정숙, 당국에 연행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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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대 제주도교육감 최정숙.
최정숙(崔貞淑, 1902~1977)은 1902년 2월 10일, 최원순과 박효원 사이에 태어난 2남4녀 중의 큰 딸이다. 아버지 손에 이끌려 프랑스 외방선교회 소속 천주교 사제인 구마실(Pr.Marcel Sacrouts) 신부가 세운 신성여학교에  여덟 살에 입학하였다. 서울 진명여고에 이어 경성관립여고보에서 수학하던 중 3.1만세운동에 참여하여 유관순과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됐고, ‘79소녀결사대’의 주모자로 지목돼 온갖 고초를 겪어야 했다.  

제주로 복귀하면서 ‘여수원’과 ‘명신학교’를 설립하는 등 제주여성계몽과 민족교육기관의 강립(强立)에 집중했다. 38세의 늦은 나이에 경성여자의과전문학교에 도전해 의사면허를 취득한 뒤, ‘정화의원(貞和醫院)’을 개원해 지역봉사활동에도 힘썼다. 이후 신성여고의 초대교장을 역임하는 등 제주여성교육의 텃밭을 일구었다. 이후 1964년 제주도 초대 교육감(우리나라 최초 여성교육감)으로 선출됐다.  

1945년 8월 15일 조국이 해방되고, 드디어 1946년 10월 18일 아쉬운 대로 야간 1학급으로 3년제 신성여자중학원 인가를 얻은 신성여자중학원. 제주천주교회가 소속된 광주교구에 신성여중학원의 재단이 되어줄 것을 청원했다. 1949년 8월 3일 4년제 신성여자초급중학교가 주·야간을 겸하는 학교운영이 가능한 인가가 났다.  

제주4·3은 도민 개개인에게 깊은 상처를 주었다. ‘3·1사건’과 ‘3·10총파업’, 그리고 ‘5·10단선’ 반대운동이 들불처럼 번져나가자 연일 수습책을 모색하는 지역유지들 회의가 열렸다. 신성여중은 비교적 평온했다. 이기형(李璂亨)·고영일(高瀛一)·고창호(高昌浩)·김종철(金鍾喆) 선생들이 학생들의 동요를 막고 오직 배움에 전념하도록 열성을 다했다.  

어느 날. 군기대(軍紀隊)에서 왔다는 군인들이 최정숙을 끌고 간 곳은 농업고등학교 운동장 천막 안이었다. 「선생이 신성여중 교장이요?」 취조관은 무섭게 입을 열었다. 「그렇습니다.」 최정숙은 정중하게 그를 대하였다. 「또한 여성동맹 위원장직도 맡고 있죠?」  두 번째 질문을 받고서야 왜 자신이 이들에게 끌려왔는지 짐작이 갔다.  최정숙은 부녀회와 부녀동맹은 다른 조직이라고 설명을 했으나 취조관은 상투적인 수법 그만 부리라면서 묵살하였다. 당시 제주도부녀동맹(濟州道婦女同盟)위원장은 김이환(金二煥)이었다. 「여보시오. 교장선생님. 선생이 공산주의자이며 이번 폭동을 일으킨 남로당을 지원하고 있는 증거까지 확보했는데 왜 이러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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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성여학교가 처음 시작했을 때의 모습.
최정숙은 수많은 제자들과 부녀회원 그리고 친구들이 끌려와 있음을 보고는 말문이 막혔다. 최원순과 최남식도 총파업 사태에 연루 되어 그들대로 곤욕을 치르고 있었다. 당시 송요찬 사령관이 최정숙을 직접 만나보겠다는 전갈을 보내와 최정숙은 사령부로 넘겨졌다. 송요찬은 뭔가 오해가 있었다면서 정중하게 사과하고는, 박경훈(朴景勳) 지사와 함께 도민에게 선무강연을 해줄 것을 부탁하였다. 그 길로 박경훈과 함께 약 보름에 걸쳐 제주섬을 한 바퀴 일주하였다. 

1948년 11월 유지들이 농업학교에 갇히기 시작할 무렵 읍내 여성들도 헌병대에 줄줄이 끌려 들어갔다. 읍내에서도 내로라는 여성들로서 대개 20대 후반에서 40대 초반 나이였다. 당시 수감되었던 여성들은 다음과 같다. △강어영(康御英, 道부녀동맹 부위원장) △강염숙(姜念淑) △고숙자 △고지영(高芝英, 의사 朴永勳의 아내) △고혜영(高蕙英, 조선소 사장 高昌基의 아내) △김보배(民戰조사부장인 鄭相朝의 아내) △양청열(梁淸烈, 邑부녀동맹 부위원장. 민족청년단 창설멤버인 文奉澤의 아내) △이순실(李順實, 도청 金王辰 과장의 아내) △이순손(李順孫) △최정숙(崔貞淑, 의사. 최원순 법원장의 딸. 제주도교육감 역임) △한여택 △홍종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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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정숙 영결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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