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로 터전을 옮기는 이주민의 숫자가 한해 1만명을 훌쩍 넘어서고 있다. 특히 이들 중에는 적지 않은 문화예술인들이 청정한 자연환경에 매료돼 바다 건너 제주로 향한다. 여기에 제주사회는 자연, 사람, 문화의 가치를 키우자는 분위기가 그 어느 때보다 뜨겁다. 유례 없던 이런 변화 속에 제주문화의 미래를 고민하는 목소리 역시 높다. 전통과 변화 사이에서 제주문화의 정체성을 지켜내면서 끊임없이 진화해야 하는 상황이다. 이런 고민을 녹여내기 위해 제주출신 양은희 건국대학교 글로컬문화전략연구소 연구교수가 [제주의소리]를 통해 '양은희의 예술문화 이야기'를 연재한다. <편집자 주>


[양은희의 예술문화 이야기]  제주 속의 글로벌 예술...원도심 빈건물 활용 '신선'

오늘날 대부분의 예술은 자본에 의해 결정된다. 자본이 권력이 되고 문화와 예술의 방향을 정한다. 과거의 문화와 예술은 권력과 집권자가 속한 계급의 취향과 기호가 좌지우지 했었다. 이런 관습과 싸우며 쟁취한 것이 예술만의 논리를 보장하는 근대 예술이었다. 그러나 글로벌 시대의 예술은 천재적인 예술가나 창의적 아이디어를 가진 인물들이 일군 근대 예술과 달리 창작가 1인에 의해 만들어지지 않는다. 자본이 뒷받침하지 않는 창작은 지역의 문화 속에서 잠시 꽃피우다 조용히 사라진다. 

자본과 함께 움직이는 문화와 예술은 세계 어느 곳을 가던 비슷한 질을 가진 ‘글로벌 예술과 문화’로 변모한다. 외국자본이 주식시장에 들어오거나 영토분쟁과 테러가 발발할 때 민족주의와 국가주의가 작용하면서 긴장감이 흐르지만 한류 가수의 콘서트장이나 칸느의 영화관에서 누리는 문화는 오히려 그 긴장감을 풀어준다. 획일화를 지향한다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글로벌 예술과 문화는 분쟁과 갈등을 넘어서 인류가 하나가 될 수 있다는 꿈을 꾸게 하며 점점 공동으로 만드는 자산이 되어간다.  

세계인이 찾는 제주도에도 글로벌 예술이 들어왔다. 안도 다다오, 이타미 준(유동룡), 제임스 터렐, 야요이 쿠사마 등 굵직한 거장의 작업이 눈에 띈다. 이들은 세계의 어디를 가도 ‘글로벌 예술’을 대표할 만한 작가들이며, 높은 비용을 지불하지 않으면 구매하기 어렵다. 

시멘트 패널과 유리로 현대적 건물의 단순미를 잘 표현한다고 평가되는 안도는 일본 예술의 섬 나오시마의 지중미술관으로 유명하다. 기존의 미술관 공식을 뒤집고 지하에 세운 이 미술관은 놀라운 공간감각을 보여주면서 섬을 유명하게 만들었다. 안도가 제주에 설계한 <지니어스 로사이>는 그보다 규모가 작지만, 지하로 뻗은 통로와 방에서 자연과 인간의 조화에 대해 숙고하게 하는 작업으로 다른 곳에 있는 안도의 작업과 견주어도 손색이 없다. 
▲ 안도 다다오의 지니어스 로사이. 돌 정원 지하에 숨어있다. 사진제공=양은희. ⓒ제주의소리

제임스 터렐은 미국 아리조나의 한 분화구에서 평생 빛과 공간을 가지고 작업하면서 이 시대의 예지자로 일컬어진다. 그가 제주에 만든 <스카이 스페이스>는 대표 시리즈 중 하나로 하늘과 공간을 접목한 작업이다. 이 시리즈는 제주뿐만 아니라 나오시마 섬, 미국의 오스틴과 포모나, 호주의 캔버라 등에도 세워졌는데, 주로 천장을 사각으로 뚫은 방에서 자연의 빛과 인공적인 빛의 교차로 시간을 체험할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다.  

재일교포 건축가 이타미 준의 주요 작업은 제주에 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가 제주에 세운 <방주교회>와 수, 풍, 석 박물관 시리즈는 이미 주요 건축상을 수상할 정도로 동양적 철학이 담긴 작업으로 유명하다. 2014년 국립현대미술관은 그의 회고전 <이타미 준: 바람의 조형>을 열었는데, 제주에 있는 그의 작업을 포함해서 그가 추구했던 물, 바람, 빛과 그림자, 돌 등 자연에서 찾은 조형과 미학을 세련되게 조명한 바 있다. 
▲ 이타미 준의 풍 박물관. 사진제공=양은희. ⓒ제주의소리

위 세 작가의 작업은 아쉽게도 제주의 고급 리조트 단지와 타운하우스 단지에 들어서 있다. 주로 2000년대 들어 설립된 휴양과 관광시설의 부속시설로 유치된 것이다. 이들의 작업을 보려면 성산포에 있는 리조트, 서귀포 안덕에 있는 타운하우스 레스토랑, 서귀포 상효동에 있는 골프장 클럽하우스를 방문해야 한다. 이런 까닭에 제주에 들어온 그들의 작업이 토박이에게 널리 알려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제주의 예술과 만나 승화작용을 일으키지 못하고 있다. 민간 자본의 기호에 따라 수입되어 소유자의 재산으로 사유화된 글로벌 예술의 현실이다. 

풍광이 아름다운 자연에 이끌린 자본과 리조트 산업이 제주에서만 글로벌 예술의 수입에 앞장서고 있는 것은 아니다. 최근 강원도 원주의 한 고급 리조트 내에 안도의 건축과 터렐의 작업이 들어간 미술관이 개관하면서 안도와 터렐의 조합은 이제 한국에서 하나의 유행이 되었다. 나오시마 섬에서 시작된 두 사람의 조합은 자연 속의 예술을 구현한 좋은 사례였다. 그런데 한국에 상륙하면서 고급 리조트의 한쪽 구석에서 ‘고급 휴양’을 위한 장식물로 대접받고 있는 것이다. 

최근 이런 지형을 바꾸는 미술관이 제주와 서울에 생겼다. 아라리오 뮤지엄이다. 서울에서는 유명 건축가가 쓰던 오래된 건물을 미술관으로 만들었고 제주에서는 제주시 원도심의 빈 건물 4개를 전시장으로 바꾸고 영국의 yBA 작가, 앤디 워홀, 리처드 세라와 같은 현대미술의 대가와 피에르 위그, 수보드 굽타와 같은 유명작가들의 작품을 선보이고 있다. 뉴욕, 런던, 파리 등 세계 유수의 현대미술관에 견주어도 손색이 없는 글로벌 예술을 보여준다. 
▲ 아라리오 동문모텔 I. 영국작가의 작품을 볼 수 있다. 사진제공=양은희. ⓒ제주의소리

아라리오 미술관도 ‘마이다스의 손’이라고 불리는 소유주의 자본이 없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미술관은 ‘고급 휴양’이 아니라 전통적인 도시의 오래된 건물을 미술관으로 만들어 공공에 봉사하는 글로벌 컬렉터의 모델을 따르고 있다. 이탈리아 베니스에는 프랑스 기업가이자 유명 컬렉터인 프랑소와 피노가 만든 미술관이 2개 있다. 조국이 미술관 건립을 허가하지 않자 베니스로 향한 그는 17-19세기에 지어진 건물을 사들이거나 임차해서 리모델링한 후, ‘팔라조 그라시’와 ‘푼타 델라 도가나’를 만들었다. 문화와 예술 관광으로 유명한 베니스에서 피노의 미술관은 꼭 봐야할 명소이다. 제주의 아라리오도 제주 문화예술 관광의 중심이 될 때가 올 지 모른다. 그때가 되면 예술을 좋아해서 CI KIM이라는 예술가로도 활동하는 소유주의 이야기는 스토리텔링의 소재가 될 것이다. 
▲ 베니스의 푼타 델라 도가나. 17세기 세관 건물을 리모델링했다. 사진제공=양은희. ⓒ제주의소리

▲필자 양은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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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고교 시절 미술에 흥미를 갖기 시작했고, 영어교육학으로 대학을 졸업했지만 예술과 철학에 대한 호기심을 포기할 수 없어서 미학, 미술사, 박물관학까지 공부했다. 제주에서 나고 자라 대학까지 졸업한 뒤 서울, 뉴욕 등 세계를 다니며 공부와 일을 병행했다. 그동안 큐레이터, 갤러리 디렉터, 프로젝트 매니저, 교수 등 미술과 관련된 여러 일을 하면서 예술과 사회의 역학관계를 체험하고 연구하고 있다. 11년간 체류한 뉴욕을 현대미술의 눈으로 조명한 『뉴욕, 아트 앤 더 시티』 (2007, 2010)를 저술했으며, 『개념미술』(2007) 등 다수의 책을 번역했다. 현재는 건국대학교 글로컬문화전략연구소 연구교수로 재직 중이다. 세계를 돌면서도 언제나 마음은 고향을 향해 있었다. 특히 요즘 문화예술의 섬으로 떠오르는 고향 제주를 주목하고 있다. <제주의소리>를 통해 글로벌 시대의 제주의 문화예술 비전을 고민하는 일은 또다른 고향사랑의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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