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로 터전을 옮기는 이주민의 숫자가 한해 1만명을 훌쩍 넘어서고 있다. 특히 이들 중에는 적지 않은 문화예술인들이 청정한 자연환경에 매료돼 바다 건너 제주로 향한다. 여기에 제주사회는 자연, 사람, 문화의 가치를 키우자는 분위기가 그 어느 때보다 뜨겁다. 유례 없던 이런 변화 속에 제주문화의 미래를 고민하는 목소리 역시 높다. 전통과 변화 사이에서 제주문화의 정체성을 지켜내면서 끊임없이 진화해야 하는 상황이다. 이런 고민을 녹여내기 위해 제주출신 양은희 건국대학교 글로컬문화전략연구소 연구교수가 [제주의소리]를 통해 '양은희의 예술문화 이야기'를 연재한다. <편집자 주>


[양은희의 예술문화 이야기]③ 젊은 전시기획자를 위하여: <터와 길>을 보고

11월 마지막 주 주목할 만한 전시가 끝나간다. 옛 제주대학교 병원 건물에 들어설 (가)제주종합문화예술센터의 TF팀이 기획한 <터와 길>이다. 미술잡지도 없고, 도내에서 열리는 전시에 대한 평론을 발표하는 이도 없는 제주에서 이 전시만큼은 기억되어야 할 것 같아서 이 글을 쓴다.

제주종합문화예술센터에서 열린 터와 길의 전시 장면.  오른쪽은 조습의 사진이고 가운데는 고승욱의 설치작업이다. 사진-양은희.JPG
▲ 제주종합문화예술센터에서 열린 '터와 길'의 전시 장면. 오른쪽은 조습의 사진이고 가운데는 고승욱의 설치작업이다. 사진제공=양은희. ⓒ제주의소리
이 전시는 그동안 제주에서 열린 전시 중에서 창의성과 세련된 디스플레이 측면에서 손에 꼽을 정도로 빼어나다. 오래된 시멘트 건물은 공사에 들어가기 전이라 천장과 바닥이 그대로 노출되어 상식적인 전시장과는 거리가 멀다. 지하 전시장에는 조명도 변변치 않았고, 시멘트 벽은 냄새가 나고 눅눅하기까지 했다. 마치 폐허 건물을 헤집고 다니듯이 돌아다니며 사진, 영상, 설치 등의 작업을 보아야 했다. 일부러 설치한 벽돌과 건축 자재 사이에서 보는 전시 감상은 불편하고 위험할 정도였다.   
  
이 전시는 관람객을 기분 좋게 하거나, 아이들이 많이 오도록 기획된 전시가 아니라 일부러 불편하고 낯설게 만든 전시다. 낡고 거친 시멘트 건물에서도 예술을 보는 방법이 있다는 것을 제시한다. 병원 건물을 새로이 전시장으로 조성하는 사업의 시작을 알리듯이, 제주의 미술문화에 새로운 바람이 필요하다고 강변하듯이 의도적으로 장소를 해체하고 재구성했다.
 
여러 개의 방과 층이 연결된 전시장은 벽면에 작품으로 채우고자 하는 욕심도 없었다. 공간과 작품이 적절한 긴장을 유지할 정도로만 채워 넣은 것이다. 기획자이자 작가로 참여한 고승욱은 전시효과를 극대화하기위해 벽돌 더미와 건축자재를 여기저기 배치하여, 예술작품과 건축자재가 사실은 동전의 앞뒷면처럼 보는 시각에 달려있다는 점을 강조하기도 했다. 그의 기획이 돋보이는 것은 바로 잘 보이려고 치장하지도 않고, 채우려고 욕심을 부리지도 않는 정신적인 여유, 전시장의 규범이라고 할 수 있는 흰 벽과 조명기구에 연연하지 않는 자신감, 그리고 서로 다른 매체와 서로 다른 조형언어를 구사하는 작업들을 어우러지게 하는 기술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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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시 '터와 길', 2015 옛 제주대 병원. 사진제공=양은희. ⓒ제주의소리

이런 나의 시각에 반대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보다 선명하게 전시기획 의도가 드러나고, 더 알기 쉬운 작품을 전시하지 않았다는 아쉬움을 표할지도 모른다. 병원이었던 건물의 역사를 더 분명하게 주제로 삼지 않았다거나, 추상적인 ‘터와 길’이라는 제목이 지향하는 철학도 모호하다고 불평할지도 모르겠다. 또는 세금으로 만든 전시가 너무 난해하다고 평가할지도 모른다.
 
미술은 문학이나 영화와 달리 이미지와 형상에 의존하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추상적이며 즉각 이해하기 어렵다. 더구나 새로움과 독창성을 기반으로 돈과 권력의 영향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여정을 선택한 근대이후의 미술은 미술의 언어를 배우거나 직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일부 전문가의 자산이 되었다. 물론 이 자산은 예술가의 손을 떠나 미술시장으로 들어가 자본주의 논리에 의해 유통되곤 한다. 그러나 적어도 창작과 전시의 과정에서 예술은 과거의 것과 달라야 하고, 동시대 타 예술과도 다른 언어를 구사해야 존재 가치를 부여받는다.
 
지난 150년간 새로움과 독창성을 기반으로 독자적 영역을 확보한 ‘예술’은 이제 문명사회 어디서나 비슷한 논리로 작용한다. 예컨대 브라질의 미술과 한국의 미술이 서로 다른 논리가 아니라 ‘예술’의 과제, 즉 과거보다 더 새롭게 변해야 하는 임무를 안고 있다. 물론 각각의 지역이 처한 현실과 문제에 대해 반응하는 방식은 다를지 몰라도 큰 틀에서 볼 때 그렇다. 그래서 세계의 미술은 서로 소통하고 교류하고 평화의 언어가 되곤 한다.
 
새로움과 독창성은 창작뿐만 아니라 전시에도 도입되었다. 전시기획자(큐레이터)도 ‘창의적 기획’을 지향해야 한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이나 파리의 팔레 드 도쿄 등 세계의 주요 전시장에서 열리는 전시에 창의적인 큐레이터들이 나타나 창의적인 예술을 보여주는 개념과 기법을 사용하여 시각문화를 선도하고 있다. 대안공간, 비엔날레, 공공미술관 등 비영리 전시공간에서 활동해온 그들은 상식적인 시각을 탈피하여 낯설고, 불편하기도 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전시를 선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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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9년 기무사(현재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열린 전시 '신호탄'. 사진제공=양은희. ⓒ제주의소리

큐레이터는 두 가지 선택을 할 수 있다. 너무 새로워서 생경해 보인다는 보통 사람들을 위해 이해하기 쉽게 새로움과 독창성을 과감히 포기하고, 그들의 취향에 맞게 만들 수도 있다. 소위 미술의 ‘포퓰리즘’이다. 유행이다 못해 병처럼 퍼져가는 벽화 그리기 프로젝트나, 어린이를 위한다고 전시장을 놀이터나 디즈니랜드로 만드는 전시는 그 예이다.   
 
두 번째는 세계문명의 최전선에서 지금 이 시간에도 창의적인 개념과 사고를 구현하기 위해 애쓰는 공동체를 의식하면서 어렵고 모호하더라도 새로움과 독창성을 위해 나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창의성이 중요한 인류의 자산으로 간주되는 한, 주변의 냉소와 무관심에도 불구하고 그 창의성을 위해 어떤 타협도 하지 않는 것이다. 그들의 정신은 나이를 먹지 않는다. 새로움을 먹고 사는 그들은 생물학적 나이를 넘어선 ‘젊은 기획자’들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미술의 역사와 전시의 역사에서 이름을 남기는 이들은 바로 두 번째 기획자들이다. 그 길은 외롭고 가난하지만, 간혹 공적 자금을 받는 공공 미술관이나 전시장에서 그들을 받아줄 때가 있다. <터와 길>은 그렇게 나온 전시이다. 세계 미술인의 시선을 받는 문화예술의 섬 제주가 되려면 정신이 젊고 창의성을 위해 헌신하는 전시기획자가 더 필요하다. 


▲필자 양은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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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고교 시절 미술에 흥미를 갖기 시작했고, 영어교육학으로 대학을 졸업했지만 예술과 철학에 대한 호기심을 포기할 수 없어서 미학, 미술사, 박물관학까지 공부했다. 제주에서 나고 자라 대학까지 졸업한 뒤 서울, 뉴욕 등 세계를 다니며 공부와 일을 병행했다. 그동안 큐레이터, 갤러리 디렉터, 프로젝트 매니저, 교수 등 미술과 관련된 여러 일을 하면서 예술과 사회의 역학관계를 체험하고 연구하고 있다. 11년간 체류한 뉴욕을 현대미술의 눈으로 조명한 『뉴욕, 아트 앤 더 시티』 (2007, 2010)를 저술했으며, 『개념미술』(2007) 등 다수의 책을 번역했다. 현재는 건국대학교 글로컬문화전략연구소 연구교수로 재직 중이다. 세계를 돌면서도 언제나 마음은 고향을 향해 있었다. 특히 요즘 문화예술의 섬으로 떠오르는 고향 제주를 주목하고 있다. <제주의소리>를 통해 글로벌 시대의 제주의 문화예술 비전을 고민하는 일은 또다른 고향사랑의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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