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정홍의 또 다른 이야기> 삶의 터전을 지키려는 그들과 ‘아픔’을 함께 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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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공항 예정지. ⓒ제주의소리DB

자기 정체성을 위하여

이른바 ‘제2공항’예정지를 설명하며 제시한 지도에는 마치 땅위에 사람이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종이에 그려진 지도가 다 그렇습니다. 우리들의 인식의 한계입니다. 그러나 그곳에는 누대로 내려오는 땅을 일구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을 고려하지 않는 개발은 아무리 거창한 목적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본의 아니게 삶의 터전을 잃은 ‘철거민’이라는 난민을 만들어 냅니다. 그건 ‘아픔’입니다. 성산읍 온평리를 비롯한 인근 마을의 ‘결사반대’도 그런 관점에서 이해해야 합니다.(제주의소리11월 25일자)

아무런 갈등 없이 평화스럽게 일이 추진될 수 있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누구나 원하는 이상적인 상황일 뿐, 현실적이지 않습니다. 다툼과 갈등은 이상적이지는 않지만, 현실을 표현하기에 적합한 단어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직시해야 합니다. ‘평화스럽게 일이 추진되는 이상적인 상황’을 현실적인 질문으로 바꾸면, 우리는 그 반대하는 이유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른바 ‘평화의 섬’답게 진정으로 평화스럽게 일이 추진되길 원한다면, 평화가 무엇인지 정의하기보다는, 인근 주민들이 ‘결사반대’에 나선 까닭에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강정문제’가 그렇듯, 그것에 대해 모두가 말하지만, ‘생각’은 하지 않는 듯합니다.

자신들의 이익만을 위해 ‘결사반대’에 나선다고 ‘반대의 동기’를 이해하는 건 잘못입니다. 그런 생각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그들의 반대는 보상금을 더 받기 위한 탐욕도, 트집도, 투정도 아닙니다. 그들의 ‘결사반대’는 단순히 물질적 이익을 위한 투쟁과는 다릅니다. 그렇습니다. 삶의 터전을 지키려는 절실함은 보상금을 더 받으려는 물욕으로 환원될 수는 없습니다. 삶의 터전을 잃음으로써 부정당할 수밖에 없는 자기 정체성을 지키기 위한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이른바 ‘제2공항’이 우리에게 딱히 ‘정크푸드’라는 말은 아니지만, 누군가 이야기했듯, ‘정크푸드의 달콤한 속삭임에 익숙하게 되면’ 주민들의 깊은 속내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지역사회의 의무

우리들은 그들의 목소리를 제대로 들어야 합니다. 그건 지역사회의 의무입니다. 그게 바로 정상적인 사회입니다. 아무리 ‘제2공항’이 우리에게 필요한 시설이라고 하더라도, 삶의 터전을 지키기 위해 ‘결사반대’를 벌이는 사람들에게 침묵을 강요할 수는 없습니다. 더 더욱 ‘다수의 의지’로 ‘소수의 절실함’을 묵살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묻습니다. “삶의 터전을 지키기 위한 주민들의 ‘결사반대’를 인정하고, 그것에 참가하고 있는 주민들의 목소리를 듣기 위한 귀를 갖고 있는가?” 국가와 지역사회가 그들과 ‘아픔’을 공유하지 않는다면, 그 국가와 지역사회는 정당성을 상실한 이익집단에 불과합니다.

저는 지금 주민들과 대화에 나서는 사람들의 진정성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만에 하나, 주민들의 반대를 ‘과잉반응’으로 매도하고, 그리하여 이른바 ‘제주미래 100년 프로젝트’라는 구호로 치장하고, 아무리 숙원사업이라지만, 그것도 부족하여 ‘환영현수막’으로 제주사회를 도배하고(제주의소리 11월 19일자), 마침내 인근주민들의 ‘결사반대’를 정면 돌파의 대상으로만 느껴진다면, 그 이유는 전적으로 우리 지역사회가 ‘비정상’이며, 그만큼 ‘지금 여기’가 부끄러운 성숙도를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기회 있을 때마다 하는 소리지만, 그 어떤 경우에도 주민들은 ‘정면 돌파의 대상’이 아닙니다. ‘일방적인 설득대상’도 아닙니다. ‘결사반대’에 나선 주민들과 ‘아픔’을 함께 해야 합니다. 특별반상회를 여는 등 주민들과 대화에 나서고 있는 모양이지만, 무조건 설득하려고만 드는 건 문제를 더욱 키울 뿐입니다. 그것은 ‘소통’으로 위장한 사이비입니다. 우리가 이미 경험했듯, 지역주민들의 목소리를 듣는다고 해놓고, 무조건 설득하려고만 드는 행태야말로 세상의 모든 다툼의 원인(遠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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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 거리에 나부끼는 환영 현수막. ⓒ제주의소리DB

사회적 갈등의 도덕적 형식

우리가 참을 수 없는 건 ‘무엇이 주민들에게 좋은 것인지’를 관료와 전문가들만이 잘 알고 있다는 오만입니다. 이해당사자인 주민들과는 한마디 상의도 없이 ‘문을 걸어 잠그고 앉아 결정된 문제’를 막무가내로 관철하려는 억지입니다. 이번도 예외가 아닌 듯싶습니다. 온갖 장밋빛으로 채색하고…. 그게 바로 ‘개발독재시대’가 우리에게 남긴 불행한 유산입니다. 소득의 낙수효과는 일어나지 않았지만, 부끄러운 낙수효과만 잔뜩 짊어진 꼴입니다. 이제 그걸 해체해야 합니다. 거기엔 ‘진실의 말’이 없습니다. ‘강정문제’가 ‘우리의 아픔’으로 남아 있는 것도 따지고 보면, 이렇듯 ‘진실의 말’이 사라지고, 그리하여 ‘참다운 관계’가 끊어졌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 지역사회의 운영방식도 달라져야 합니다. 전체의 뜻에 거역하는 개인은 통합대상에서 제외되고, 대의에 거슬리는 개인은 ‘뿌리 뽑혀도 상관없는 사소한 존재’로 취급되는 사회는 결코 정상적인 사회라고 할 수 없습니다. 전체의 이익을 위해서는 개인의 특별한 사정쯤은 묵살되어도 괜찮다는 사고가 지배적인 사회에서는 ‘개인의 특별한 사정’을 옹호하려면, 때로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포퓰리즘적 생각이라고 조롱을 받기 십상입니다.

그러나 ‘전체의 이익’이라는 명분으로, 아니, 그것을 정당화하기 위해 ‘개별적이고 부분적인 것’을 사소한 것과 동일한 것으로 여기는 것은, 한마디로 전체주의적 사고입니다. 주민들의 완전한 순응만을 강요하는 것도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게 하나 있습니다. ‘개별적이고 부분적인 것’으로 회귀한다고 하여 그것이 사적인 영역으로 퇴행하는 것은 절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개별적이고 부분적인 것’에 대한 관심은 오로지 ‘나의 이익’에 대한 관심이 아니라, 개별적이고 부분적이라는 작은 단위 속에서 반복되는 지역사회라는 더 큰 단위에 대한 생각입이다. 그래서 “소수에 대한 위해(危害)는 결국 전체에 대한 위해로 되돌아온다”는 말은 틀리지 않습니다.

소수도 배척되지 않는 사회

그렇습니다. 이른바 ‘제2공항’예정지 인근 주민들의 ‘결사반대’를 이해하는 건 ‘개별적이고 부분적인 것’을 대하는 지역사회의 태도를 문제 삼을 때 가능해집니다. ‘전체의 이익’을 앞세워 집단적 통일에 집착하고, 그리하여 개인의 이익쯤은 전체를 위해 희생돼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개별적이고 부분적인 것’에 대한 관심이 개인의 이기심을 부추긴다고 협박하지만, 아무리 아니라고 우겨도, 그것은 전체주의와 공모하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일 뿐입니다. 이른바 ‘제2공항’예정지 인근 주민들의 ‘결사반대’에 관심을 가질수록 우리는 최종책임의 담지자와 마주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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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정홍 언론인.
우리가 원하는 사회는 단순히 잘 사는 사회가 아닙니다. 그것뿐 만 아니라, 비록 소수이지만, ‘자기 속에서 사회를 발견하는 사람’을 소홀히 하지 않는 정의로운 사회입니다. 그런 사회에서만 우리들은 ‘인간’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설프지만, 이게 바로 제가 여기저기서 얻어들은 ‘사회적 갈등의 도덕적 형식’입니다. / 강정홍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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