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로 터전을 옮기는 이주민의 숫자가 한해 1만명을 훌쩍 넘어서고 있다. 특히 이들 중에는 적지 않은 문화예술인들이 청정한 자연환경에 매료돼 바다 건너 제주로 향한다. 여기에 제주사회는 자연, 사람, 문화의 가치를 키우자는 분위기가 그 어느 때보다 뜨겁다. 유례 없던 이런 변화 속에 제주문화의 미래를 고민하는 목소리 역시 높다. 전통과 변화 사이에서 제주문화의 정체성을 지켜내면서 끊임없이 진화해야 하는 상황이다. 이런 고민을 녹여내기 위해 제주출신 양은희 건국대학교 글로컬문화전략연구소 연구교수가 [제주의소리]를 통해 '양은희의 예술문화 이야기'를 연재한다. <편집자 주>


[양은희의 예술문화 이야기] ④ '광주정신' 아래 정치인·행정·전문가 혼연일체


11월 말 광주광역시에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이 문을 열었다. 5.18 민주화운동의 현장이었던 (구)전라남도 도청 일원에 착공 11년 만에 완공된 이 기관은 16만㎡가 넘는 면적에, 건축비만 7000억원이 들어갔다. 전당 내에는 문화정보원, 문화창조원, 예술극장, 민주평화교류원, 어린이문화원이 들어서 있으며, 유네스코 기록유산 아시아-태평양위원회 사무국 등도 유치할 계획이다. 서울의 예술의 전당보다 큰 한국 최대의 문화시설이자, 아시아문화를 표방하는 세계적인 규모의 기관이 등장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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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지하로 뻗은 거대한 단지이다. 사진제공=양은희. ⓒ제주의소리
이 전당은 2000년대 들어 광주광역시가 표방한 ‘아시아문화중심도시’의 결과물이다. ‘아시아문화’ 도시 조성을 위해 지금까지 2조4000억원 이상을 집행했다. 전당의 완공으로 1995년 광주비엔날레 탄생 이후 꾸어왔던 ‘문화도시 광주’의 꿈은 형식상 성공적인 것 같다. 이 비엔날레는 세계 5대 비엔날레로 성장했고, 2014년에는 ‘동아시아 문화도시’로, 이어서 유네스코가 지정하는 ‘미디어 아트 창의도시’로 선정되었기 때문이다. 이로써 광주는 자칭 타칭 ‘문화도시’의 면모를 갖추고 한국을 넘어 세계 문화지도에 이름 올리고 있다. 

필자가 광주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뉴욕에 체류하던 시절인 2000년 광주비엔날레의 홍보행사를 맡게 되면서부터이다. 뉴욕에 와서 비엔날레를 홍보하는 시도와 막강한 예산의 힘이 놀라웠다. 귀국 후 2005-2006년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을 위한 기반조성사업에 참여하여 국제전시와 아시아문화포럼 등을 기획하게 됐고 당시 접한 열기와 혼란에 고무돼 이후 줄곧 ‘문화도시’ 광주의 변화과정을 지켜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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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5년 필자가 국립아시아문화전당 기반사업의 일환으로 기획했던 전시장면. 사진제공=양은희. ⓒ제주의소리
그 사이에 필자가 활동하던 광주문화예술위원회는 광주문화재단으로 변했다. 이 재단은 이후 지역민을 위한 문화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대신에 아시아문화중심도시추진단이 광주로 이전해 전당사업을 맡았다. 광주비엔날레는 ‘광주정신’을 이은 ‘진보적 예술’을 외치면서 성장했고, 재능있는 인력이 모여들면서 ‘광주 폴리’ 등 도시풍경을 바꾸는 프로젝트가 진행됐다. 

또한 신정아 사건을 계기로 외국인 큐레이터에게 총감독을 맡기기 시작했고, 해마다 외국도 부러워하는 예산을 확보하면서 한국미술의 세계화 현장으로 자리를 잡았다. 뿐만 아니다. 지역 대학들은 ‘문화전문대학원’을 만들거나, 기존의 학과명을 수요에 맞게 전환했고, 여기서 길러진 인력들은 새로 생기는 문화기관에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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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년 역사를 자랑하는 광주비엔날레. 사진은 호평을 받았던 2012년 만인보의 한 전시실. 사진제공=양은희. ⓒ제주의소리
광주에서 제주는 무엇을 배워야할까? 신자유주의적 도시마케팅에 힘쓰는 광주는 제주가 지향해야 할 모델이 아닐 수도 있다. 대통령 공약사항으로 ‘문화수도 광주’가 들어갈 정도로 정치적 힘을 가진 도시 앞에서 무기력해질 수도 있다. 그러나 정권이 바뀌어도, 공적 자금에 의존해서라도, ‘문화도시’를 사수해 온 곳에서 배울 점은 있다.  

첫째. 역사와 문화에 대한 비전을 가진 정치인과 행정가들이 필요하다. 광주비엔날레는 미술인이 주도한 것이 아니라 우연히 ‘베니스 비엔날레’의 존재를 접한 한 정치인이 시장으로 취임하면서 추진됐다. 20세기 문화올림픽중 하나인 베니스 비엔날레의 개념을 광주에 이식하겠다는 비전이 그 시작이었고 1994년 ‘세계화’ 화두를 던진 김영삼 대통령이 전폭적으로 예산지원을 했다. 문화 기득권을 지키려는 서울의 견제에도 불구하고 5.18민주화운동의 흔적을 문화로 치유하겠다는 명분이 작용했다. 이후 비엔날레의 성공에 힘입어 ‘문화도시’ 화두가 회자되기 시작했고, 노무현 대통령은 2003년 ‘아시아문화중심도시’를 공약으로 제시했다. 

둘째. 시대정신을 포착할 수 있는 전문가들을 활용하는 것이다. 한때 광주비엔날레는 지역예술가와 정치가, 그에 편승한 관료들이 주도권을 행사하면서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그러나 기회가 될 때마다 ‘광주정신’은 광주주도권 유지가 아니라 ‘진보적 예술’ 즉 현대미술의 포용이라고 설득한 평론가들 덕분에 지역이기주의와 관료주의를 탈피하고 세계미술인의 축제가 될 수 있었다.

본격적으로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사업이 시작되자 자신이 속한 예술분야의 기관을 추가하자는 등 종종 이해관계가 충돌하기도 했다. 그러나 국내외의 문화행정가, 지식인들을 초대해 수십 번의 심포지엄과 포럼을 통해 ‘문화중심도시’의 이념, ‘아시아’의 타당성과 ‘아시아문화’ 범위를 논하면서 전당의 방향과 구도를 정립해 온 것은 전문가 집단의 공이라고 할 수 있다.  

셋째, 지역 예술인과 지식인들의 적극적인 의견표명과 토론이다. 여느 도시와 마찬가지로 광주의 예술분야도 이념과 인연으로 얽힌 갈등구도를 보일 때가 있다. 더구나 광주라는 문화적, 정치적 토대를 정체성으로 삼는 일이 운명처럼 여겨지는 곳에서는 더욱 그렇다. 큰 일 일수록 분열된 지형을 아우르고 양측을 초대해 토론하고, 타협하는 지난한 과정을 거치지 않을 수 없다. 그런 과정에서 타 도시가 누리지 못하는 기회를 활용해 문화의 생산, 유통, 소비를 아우르는 ‘생태계’를 만들려는 애향심이 작동하기도 한다.  

넷째. 예산과 입법을 확보하기 위해 앞장선 국회의원들이다. 노대통령 임기가 끝나자 5조원을 투자하겠다던 원래 계획은 수정이 불가피해졌다. 그래도 지역 국회의원은 좌절하지 않고 특별법 개정안을 발의해서 전당이 지속가능할 수 있도록 노력해왔다. 건물은 완공됐으나 그 안을 채우려면 ‘문화도시’에 걸맞는 질적 성장, 문화산업 유치 등을 위해 앞으로도 엄청난 운영예산을 확보해야 할 것이다. 

다섯째. 특성화 전략을 통해 세계문화도시로 인정받으려는 지속적인 노력이다. 제주가 유네스코의 세계자연유산 등재에 주력했던 것처럼, 광주는 최근 유네스코의 ‘창의도시’에 선정되고자 노력했으며 작년에 ‘미디어 아트 창의도시’로 등재를 마쳤다. 이런 등재가 얼마나 효과적인지 미지수이나 적어도 세계 69개의 창의도시 중 하나라는 자부심을 얻었고 향후 미디어 아트의 플랫폼 역할을 하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세우고 있다. 


▲필자 양은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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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고교 시절 미술에 흥미를 갖기 시작했고, 영어교육학으로 대학을 졸업했지만 예술과 철학에 대한 호기심을 포기할 수 없어서 미학, 미술사, 박물관학까지 공부했다. 제주에서 나고 자라 대학까지 졸업한 뒤 서울, 뉴욕 등 세계를 다니며 공부와 일을 병행했다. 그동안 큐레이터, 갤러리 디렉터, 프로젝트 매니저, 교수 등 미술과 관련된 여러 일을 하면서 예술과 사회의 역학관계를 체험하고 연구하고 있다. 11년간 체류한 뉴욕을 현대미술의 눈으로 조명한 『뉴욕, 아트 앤 더 시티』 (2007, 2010)를 저술했으며, 『개념미술』(2007) 등 다수의 책을 번역했다. 현재는 건국대학교 글로컬문화전략연구소 연구교수로 재직 중이다. 세계를 돌면서도 언제나 마음은 고향을 향해 있었다. 특히 요즘 문화예술의 섬으로 떠오르는 고향 제주를 주목하고 있다. <제주의소리>를 통해 글로벌 시대의 제주의 문화예술 비전을 고민하는 일은 또다른 고향사랑의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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