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세통Book世通, 제주읽기]⑧ 한스게오로크 가다머  《진리와 방법》이길우, 이선관, 임호일 옮김. 문학동네 2012년 / 이유선(서울대 기초교육원 교수)

▲ 한스게오로크 가다머《진리와 방법》이길우, 이선관, 임호일 옮김. 문학동네 2012년. ⓒ제주의소리

필자로서는 '4.3'이라는 단어가 제주도 토박이에게 어떤 느낌을 불러일으키는지 알 수 없다. 더욱이 그 단어는 오랜 시간 일종의 금칙어였다. 가해자도 피해자도 그 단어를 공공연히 말하려고 하지 않았다. 당연히 교과서에서도 다루지 않았기 때문에 필자는 대학교에 입학해서 소위 대자보를 보고서야 그런 일이 있었다는 걸 알았다. 오늘날에는 4.3을 소재로 한 영화도 제작된 바 있고, 많은 책과 연구논문들이 출간되었기 때문에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영화에서 본 대로 4.3은 무고한 일반인들이 국가적 차원의 폭력에 의해 희생당했던 사건이라고 말하면 안 될 것 같은 분위기다. 작년에 한 시민단체 주도로 열린 광복 70주년 기념 토론회에서 전직 장관, 전 경찰서장 및 대학교수들이 4.3을 민주항쟁으로 해석해서는 안 되며 그 역사적 진실을 밝혀야 한다고 강변하는 일이 있었다. 


역사적 사건의 해석과 관련해서 내가 옳다고 믿고 있는 것을 말하면 누군가 와서 잡아갈 것 같은 이상한 분위기를 감지하는 것이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라는 것은 역사교과서 집필을 둘러싼 일련의 사건들로 분명해졌다. 누가 집필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집필되고 있는 그 교과서는 필자가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대한민국의 역사는 사소한 것으로, 반대로 필자가 수치스럽게 생각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역사는 오히려 자랑스럽게 서술하고 있는 것 같아 우려스럽다. 만약 그 교과서가 옳다면 필자가 가진 대한민국의 역사에 대한 견해는 대부분 잘못된 것이어서 역사를 다시 공부하지 않을 수 없겠기에 말이다. 더욱이 기존의 수많은 역사교과서들을 부정하는 새로운 역사 교과서는 ‘올바른’ 역사교과서라고 하니 필자의 우려는 더 깊어진다.

이런 상황을 바라보는 필자는 일종의 역사적 아이러니를 느낀다. 왜냐하면 오늘날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고 ‘역사적 진실’을 밝혀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필자는 예전에 정 반대로 역사해석을 했던 사람들에게서 들었기 때문이다. 4.3을 금칙어로 만들었던 사람들에 항거했던 사람들은, 부당한 권력이 아무리 덮으려 해도 역사적 진실은 반드시 밝혀진다고 말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그 ‘진실’, 혹은 진리를 위해 스스로를 기꺼이 희생했다. 그런 희생을 통해 밝혀진 역사적 진실을 두고 이제 반대편에 있는 사람들이 ‘역사적 진실’은 반드시 밝혀진다고 주장하고 있으니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상황이 이렇게 되면 과연 ‘역사적 진실은 반드시 밝혀진다’는 말을 믿어야 할지 의문이 들기 시작한다. 역사적 진실이 드러난다는 믿음은 역사적인 사건들이 어떤 초월적인 존재의 섭리, 혹은 필연적인 역사 법칙에 따라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우연적인 것으로 보였던 단편적인 사건들은 최종적으로 거대한 의도나 역사적 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것이었음이 밝혀진다는 믿음으로 볼 수 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기독교적인 구원의 약속이나 역사법칙의 필연성에 따라 인간이 해방될 것이라는 역사법칙주의적 신념을 떠나서는 역사적 진실이 반드시 밝혀지리라는 믿음을 가질 수 없다. 그런데 종교적 구원에 대한 믿음이나 역사법칙의 필연성에 대한 믿음은 말 그대로 믿음일 뿐이다. 그런 믿음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우리는 신의 관점을 갖거나, 아니면 역사의 시작과 끝을 관조하는 초역사적 시점을 가져야 할 것이다. 그런데 역사적인 존재로서의 우리는 아무도 그런 지점에 위치할 수 없다.

독일의 철학자 한스 게오르크 가다머는 <<진리와 방법>>을 통해 역사의식에 대한 새로운 서술을 제시했다. 하이데거의 수제자였던 그는 스승의 해석학적 관점을 계승 발전시켜 철학적 해석학이라는 학문 영역을 개척했다.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에서 주관과 객관을 대립적인 것으로 설정하고 인식주관이 어떻게 객관적인 세계를 알 수 있는가 하는 물음을 던졌던 근대인식론의 기본적인 틀을 허물어뜨렸다. 그의 “세계-내-존재”라는 개념은 인간과 세계는 서로 분리된 채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만들어낸 것이다. 이런 아이디어를 이어 받은 가다머는 인간과 역사를 마치 분리되어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주장한다. 

가다머는 역사적 사건을 이해하는 것을 마치 우리와 무관하게 저 바깥에 존재하는 외부의 사물을 인식하는 것인 양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유한한 역사적 존재로서의 우리는 이미 우리가 이해하고자 하는 역사적 사건으로부터 비롯된 존재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결코 역사적 사건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역사가 우리에게 속해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역사에 속해 있는 것이다. 객관적인 실체로서의 역사적 진실을 밝히겠다고 하는 태도는 바로 이런 점을 깨닫지 못하고, 마치 계몽주의자들이 선입견 없는 이성의 눈으로 세계에 관한 진리를 밝힐 수 있다고 잘못 믿었던 것과 같은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우리의 이해는 역사적 전승이 만든 선입견들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선입견이 없는 이해는 없다는 것이 가다머의 철학적 해석학의 기본적인 테제이다.

가다머는 역사적 사건의 의미를 이해하고자 하는 해석학적인 시도가 가진 특징을 설명하기 위해 ‘영향사 의식’이라는 어휘를 만들어 내고 있다. 영향사 의식이란 우리가 역사적 사건의 이해에 있어서 그 사건이 미치는 영향의 순환고리 속에 있다는 것이다. 예컨대 4.3의 의미를 이해하고자 하는 사람은 4.3에 대한 선입견으로부터 출발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이미 역사적 전통에 속해 있고 그 전통에 의해 만들어진 선입견이 우리의 존재를 구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가진 선입견은 지나간 역사적 사건이 나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 증거이다. 선입견이라는 형식으로 역사적 사건은 끊임없이 나에게 자신의 의미를 말하고 있는 셈이다. 따라서 4.3의 의미를 묻는다는 것은 거꾸로 4.3이 나에게 말하는 것에 응답하는 것을 뜻한다. 내가 4.3의 의미에 대해 어떤 답을 얻었다면 그것은 다시 4.3이라는 역사적 사건의 의미를 구성하는 역사적 이해지평 속으로 융합된다. 나의 이해의 시도가 내가 이해하고자 하는 사건의 의미를 구성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역사적 사건의 의미에 대해 묻고 답하는 대화적 이해의 과정은 나 자신을 포함하고 있는 역사적 이해의 지평 속에서 지속된다. 4.3의 역사적 의미는 그 과정 속에서 스스로를 드러내면서 감추고 감추면서 드러낸다. 

가다머가 <<진리와 방법>>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가 역사적 유한성을 극복하고 역사적 사건의 진실을 밝힐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계몽주의적인 오만함에서 비롯된 잘못된 생각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유한한 역사적 존재이다. 아무도 진리에 대해 독점적인 주장을 할 수 없다. 우리는 각자의 선입견에 입각해서 부분적인 진리를 말할 수 있을 뿐이다. 우리가 바랄 수 있는 것은 부단한 이해의 노력을 통해서 그릇된 선입견들이 제거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이다. 

이런 결론은 아마도 4.3을 정반대로 이해하고 있는 양 쪽 모두를 화나게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최소한 자신의 역사 해석이 유한한 것이라는 생각을 하는 쪽이, ‘올바른’ 역사 인식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보다는 나은 세상을 만드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런 세상에서는 적어도 나의 역사 이해가 올바르지 않다는 이유에서 잡혀갈 걱정을 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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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유선 교수

현 서울대학교 기초교육원 강의교수
고려대학교 철학과 및 동대학원 졸, 철학박사
전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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