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리숙한 농부의 농사일기> (1) 터전을 옮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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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우스 한 켠 빈 터에 옮겨심은 나무. ⓒ 김연미

두서없이 심어졌던 나무들을 정리한다. 한라봉 사이 천혜향, 천혜향 사이 황금향, 성격도 다르고, 취향도 다른 나무들이 서로 엉겨 살기가 팍팍했다. 나무가 생길 때마다 욕심 부려 여백을 채웠던 것이 화근이 되어 버린 것이다. 나무와 나무 사이 최소한의 여백까지 점령하려는 나무들과, 만만한 천혜향에게 위력을 가하는 한라봉을 솎아낸다.

마지막 힘을 놓아버린 나무가 삶의 가지들 사이에서 뽑혀 나오자 햇살이 공간을 채운다. 어두침침하던 나무 사이가 밝아졌다. 삶의 가시만 키워가던 천혜향이 조금 편안한 얼굴이 되었다. 한라봉 몇 그루 베어낸 것 뿐인데 과수원 안의 분위기가 확 달라졌다.

하우스 한 켠 빈 터에 나무 두 그루를 옮겨 심었다. 이파리가 무성하여 뿌리가 깊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너무 쉽게 나무는 뽑혔다. 흙 한 줌 움켜쥐지 못하고 맨살이 드러난 나무를 구덩이에 놓고 흙을 덮는다. 흙심이 제법 깊다. 우리 어머니 가슴팍 같은 자갈투성이 밭이었는데 부지런을 최고의 재산이라 여기시던  그 분의 노고이리라.  부드러운 흙을 골라 뿌리 사이를 메우고 물을 대었다.  몇 년동안 거르지 않고 짚을 깔았던 흙이 가볍게 물 위를 부유하다 가라앉는다. 들떠 있던 것들이 차분해지면서 나무의 자세도 제법 제자리를 찾는다.

이식한 나무의 가지는 최대한 많이 잘라줘야 한단다. 뿌리가 제자리를 찾아 기능을 다 하기까지 최소한의 양분으로 버텨야 하므로... 뭉텅뭉텅 자라온 시간들을 자르고 최소한의 가지만 남겼다. 볼품없다. 그러나 이제 곧 새순이 자라고  이파리를 늘리고, 그 사이 꽃을 피우리라. 노랗게 익어갈 귤을 꿈꾸며 시간을 넘기게 되리라.

20년 가까이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었다. 무성한 게으름의 그늘과, 수시로 내 옆구리를 찌르는 회의감의 가시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동안 뻗은 나의 뿌리를 포기하는 거였으므로 결론은 쉽지 않았다. 그러나 5년생 귤나무 뿌리보다 더 쉽게 내 시간의 뿌리는 뽑혔고, 뽑힌 자리는 흔적도 없이 곧 메워졌다. 무성한 과수원의 귤나무 하나같은 존재였음을 새삼스레 느끼지만 거기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는 말자. 과거보다 미래가 더 중요하므로...

최소한의 양분을 가지고 새로운 땅에 적응하려 노력하고 있다. 잘려진 내 가지와 뽑혀진 뿌리가 제자리를 찾기까지 조금은 힘에 부치는 시간들이 이어질 것이다. 혹여 끝내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말라버리지는 않을까 하는 두려움도 없지 않다. 그러나 너무 앞선 생각은 버리자. 지금 내게 필요한 것은 지금 이 순간 최선을 다하는 것. 그렇게 시간을 채우다 보면 앙상했던 내 몸에도 잎이 나고 꽃이 필 것이다. 운이 따른다면 달콤하게 익어갈 열매 몇 개 열릴 것이고...

가지 두 개 겨우 얻어 서 있는 이식된 나무의 흙을 지긋이 눌러본다. 움찔움찔 몸을 비틀던 나무가 어느 순간 얌전해졌다. 저나 나나 똑같은 입장이라는 걸 아는지 나를 보는 나무의 눈빛이 부드러워졌다. 그래, 잘 부탁한다. 네가 살아야 나도 산다. 서로 힘이 되어보자. / 김연미(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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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미 시인은 서귀포시 표선면 토산리 출신이다. 『연인』으로 등단했고 시집 『바다 쪽으로 피는 꽃』을 펴냈다. 2010년 제2회 역동문학상 우수상을 수상했다. 젊은시조문학회, 한국시조시인협회, 제주작가회의 회원으로 활동 중이다. 최근 서귀포시 표선면 가마리에서 감귤 농사를 시작한 ‘초보 농부’인 그는 <제주의소리>에 ‘어리숙한 농부의 농사일기’를 통해 하루하루 직접 흙을 밟으며 겪은 일상의 경험들을 풀어놓을 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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