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세통Book世通, 제주읽기] ⑨ 이토 마모루 《정동의 힘》 김미정 옮김. 갈무리 2016년 / 장이지 제주대학교 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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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토 마모루 《정동의 힘》 김미정 옮김. 갈무리 2016년.
이토 마모루(伊藤守)의 『정동의 힘』이 번역되었다. ‘미디어와 공진하는 신체’라는 그럴 듯한 부제가 붙어 있다. 전자미디어 네트워크 환경이 정교해짐에 따라 인간의 신체도, 그리고 사회 자체도 급격한 변화에 직면해 있다는 데 착안한 제목으로 여겨진다. 디지털 네트워크 공간에서의 ‘연대’와, 커뮤니케이션의 ‘절단’ 등 현상은 ‘정동’의 중요성을 부각시킨다.

저자는 질 들뢰즈(Gilles Deleuze, 『스피노자의 철학』)를 원용하여 ‘정동’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즉, ‘정동’이란 개념은 “촉발하는 외부의 신체의 본성과, 촉발된 신체의 본성 모두를 포함하는 상=흔적과 그 관념, 그리고 이 상과 관념이 형상화되는 심신 상태의 지속적 계기로부터 이루어지는 변용, ‘신체자신의 활동역능이 그것에 의해 증대 혹은 감소하고, 촉진 혹은 저해되는 신체의 변용’”이다.

‘정동’의 강조는 새로운 양상의 사회운동이 출현하고 있는 것과 관련이 있다. 한국에서는 월드컵 때 ‘붉은 악마’의 길거리 응원, 광우병 소고기 반대 촛불집회, 가수 싸이 신드롬 등이 그 대표적인 예다. 그러나 그 외에도 SNS를 기반으로 거의 우리의 일상이 되어가고 있는 다양한 정치적인 담론들도 그 새로운 풍경 중 하나가 되고 있다. 공동체나 계급을 운동주체․단위로 했던 구래의 무거운 사회운동이나 시민․속성․의제를 주체․단위로 한 신사회운동과는 분명히 다른 면이 여기에는 있다. 이러한 사회운동을 ‘포스트 사회운동’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인데, 포스트 사회운동의 주체는 ‘행위체’다. 이 ‘행위체’의 속성은 아직 제대로 해명되었다고 할 수 없다. ‘행위체’의 신체적 반응이 ‘정동’에 의해 크게 자극을 받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관심이 커지고 있는 단계다. 

 『정동의 힘』은 19세기 사회학자 타르드(Jean-Gabriel Tarde)의 커뮤니케이션 이론을 논의의 실마리로 삼고 있다. 타르드는 ‘군중’과 ‘공중’을 구분한 바 있다(『여론과 군중』, 1901). 즉, 군중이 “육체의 접촉을 통한 심리적 전염의 무리”인 데 대해, 공중은 “광대한 영역에 흩어져서 각자의 집에서 같은 신문을 읽으면서” “서로 휩쓸리고 서로 암시를 주는(아니 오히려 위에서부터의 암시를 서로 주고받는) 사람들”이다. 타르드는 거리로 나선 ‘군중’들보다 오히려 ‘공중’들에 더 호기심이 있었다. ‘거리에서의 모더니즘’의 시대가 끝나고 전자미디어가 인간의 사회적 신체를 바꾸어가고 있는 시대에 타르드의 ‘공중’에 대한 관심은 재조명을 받게 된 것이다. 

타르드의 이론을 바탕으로 이토 마모루는 ‘미디어, 신체’를 ‘정치’와 결부시킨다. 특히 ‘가메다(龜田) 사건’을 통해서 ‘민의’의 실체에 접근하고 있는 4장은 흥미롭다. 2007년 일본 복싱계의 유망주였던 ‘가메다 형제’의 인기와, 그 이후 이 형제의 반칙과 욕설 등을 중심으로 한 추문이 미디어를 통해 어떻게 ‘마사지’ 되었는가를 다룬 이 사례 연구는 ‘신체’가 ‘미디어’에 의해 ‘정치적으로’ 얼마나 쉽게 ‘동원’될 수 있는지 보여준다. 종합편성채널들이 거의 하루 종일 ‘민의’와 ‘여론’을 참칭하면서 공중을 정치적으로 동원하고 있는 한국 사회에서 이 사례 연구는 가볍게 보고 넘길 수만은 없다.

공중은 이성적으로 움직이지 않으며 ‘정동’에 의해 쉽게 고양된다. 미국 공화당의 트럼프(Donald Trump)가 조롱거리가 되면서도 동시에 높은 인기를 유지하고 있는 것은 이와 관련하여 눈여겨 볼만하다. 그의 직설적인 화법은 고도 자본주의가 야기한 모든 모순들에 대해 반감을 가진 미국인들을 격동시키는 면이 있다. 먼 데 이야기를 할 것도 없이 한국 정치계의 선거 전략이 노리는 것도 저 ‘정동’의 움직임이다. 노회한 한국 정치의 ‘9단’들은 저마다 사투리를 쓰면서 지역 정서에 호소한다. 서로 정책을 베껴가면서 같은 색 옷을 입은 사람들끼리 결속을 다지는 풍경은 이제 전혀 낯설지 않다. 사회의 모든 영역이 다 그렇게 되어가고 있지만, 정치계 역시 연예계 비슷하게 변해가고 있다. ‘정당의 팬클럽화’라고나 할까. SNS가 민주주의 발전에 기여하리라는 믿음도 없지는 않았지만, 현실적으로 그것은 민심을 교란하고 감정을 동원하는 수단으로 더 자주 사용되고 있는 감도 있다. 초고도 정보화 사회가 급속히 심화하고 있는 동안에도 역사의 진전이 미미해 보이는 것은 왜일까. ‘헬조선’이라고까지 불리게 된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는 왜 퇴보한 것처럼 보이는가. 

그러나 ‘정동의 힘’을 지나치게 경계하는 것은 지식인의 좋지 않은 습성에서 비롯한 것인지도 모른다. 모든 일이 명철한 이성에 의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보통 사람들의 배꼽 밑에 꿈틀거리는 ‘생활 감정’이 늙은 지식인의 ‘지혜’만 못하다고 말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정동’의 어두운 면만 보고 지나치게 이리 재고 저리 재는 데 시간을 허비하다 보면, 의미 있는 어떤 일도 일어나기 어려울 것이다. 

이토 마모루는 한신대지진 이후 ‘FM와이와이’의 미디어 실천에 대해서도 쓰고 있다. 지진 수습을 위해 만들어진 사설 방송국이 다언어 방송을 통해 어떻게 지역 마이너리티를 공동체의 일부로 내화(內化)할 수 있었는지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저절로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운동주체들이 옳다고 믿는 일을 함께 밀고 나가는 것은 가치 있는 일이지만, 그에 못지않게 자신들이 즐거움과 보람을 느끼면서 일하는 것도 중요하다는 것을 이 사례는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점을 ‘포스트 사회운동의 유희성’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이 책의 저자는 ‘정동’의 두 얼굴을 모두 강조하고 있다. ‘정동’이 미디어에 의해 조작될 수 있다는 것을 경계하면서, 우리는 ‘정동’에 몸으로 반응할 수 있을 것이다. 분노하면서, 한편으로 즐겁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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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이지 교수

시인. 2000년 『현대문학』 신인추천으로 등단

김구용시문학상, 오장환문학상 등 수상

현 제주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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