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리숙한 농부의 농사일기> (3) 더하기와 빼기 사이에서의 곡예비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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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무 둥치. ⓒ 김연미
엊그제 뿌려준 유기농 비료 위에 하얀 성에 같은 것이 끼어 있다. 손으로 만지면 손가락 세포가 미처 인식하기도 전에 녹아 없어져 버릴 것 같은 얇은 솜털 같은 것들이다. 하얀 베개 솜털을 한 줌씩 뽑아내어 여기저기 뿌려 놓은 듯하다. 비료를 뿌리고 난 뒤 준 물 때문에 유기농 비료가 분해되고 있는 것이리라.

약간 상한 닭똥냄새가 하우스 안에 꽉 차있다. 비닐 봉투 속에서 갓 나왔을 때와는 또 다른 냄새다. 그 냄새에 익숙해지기까지엔 내 경력이 턱없이 모자라다. 하우스 안의 열기는 냄새를 더 부풀려 놓고 있다. 익숙해져야 한다.  비료의 형체가 사그라들수록 나무는 더 튼튼해 질 것이고, 열매는 아름다울 것이다. 부지런히 양껏 양분을 흡수하는 냄새라 생각하자. 이 냄새가 의식되지 않을 때, 혹은 불편하지는 않게 되었을 때, 나도 누군가에게 농부라는 명함을 조심스레 내밀 수 있게 되지 않을까.

나무 아래 깔려 있는 짚을 걷어내고, 흙을 살살 긁어낸다. 지렁이 한 마리 움찔 놀라 바둥거린다. 앞과 뒤가 구별이 되지 않는 몸놀림. 가만히 있는 자신을 깨웠다는 강력한 항의가 몸부림에 배어 있다. 얼른 흙과 함께 다른 곳으로 옮겨준다. 놀라기는 나도 마찬가지다. 식물성 생명체만 가득한 밭에서 나 외의 동물성을 만나는 것은 그리 유쾌한 일이 아니다. 예쁘다거나 귀엽다는 단어와는 담을 쌓은 그것들은 통보 한 마디 없이 나타나 나를 놀라게 한다.

지렁이의 잠을 방해한 것은 미안한 일이지만 그렇게까지 호들갑 떨 필요야 없는 거 아닌가. 저나 나나 놀라기는 마찬가지인데 왜 나만 그 책임을 다 져야 한단 말인가. 흙을 긁어내는 손에 힘을 조금 뺀다. 언제 어떻게 나타날지 모르는 지렁이나 지네 같은 것들의 항의에서 좀 벗어나 보려는 속셈이다. 가끔 사슴벌레인지, 하늘소인지 바스라지다 남은 껍질이 흙과 함께 올라온다. 껍질이 나온다는 것은 여기에 얘들의 서식처가 있다는 말인데 아직 그 실체를 확인하지는 못했다. 올해엔 만나게 될까. 

나무 둥치를 감싸고 있던 흙부스러기들이 방울방울 굴러 나온다. 한라봉 아랫도리가 저항 한 번 없이 드러난다. 검은색이 약간 섞인 초록색 기둥이 흙에 물리는 지점. 잔뿌리 몇 개 선수치듯 나온다. 잘라낸다. 어디서나 모난 돌이 정을 먼저 맞게 되는 법. 잘려진 뿌리를 내려놓고 나무 밑둥치를 살핀다. 나무둘레에 선명한 띠. 아랫부분과 윗부분으로 나누고 있다. 애초에 탱자나무였던 것이 한라봉 순을 받아들여 한라봉 나무가 된 흔적이다. 다 잊은 듯 했지만 제 근본이 여기였음을 증명하는 부분이다.

탱자나무 부분이 아닌 한라봉 나무기둥에서 뿌리가 나기 시작하면 그 나무는 한라봉 나무로서의 수명을 다한 것이란다. 열매가 달리지 않고 가지만 무성해서 농부에게는 치명적이다. 그런 나무는 베어내야 한단다. 나무에게 준 거름이나 짚, 혹은 흙이 탱자나무와 한라봉 나무의 경계지점을 넘지 않도록 둥치에 쌓인 흙을 덜어내 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흔적조차 필요 없는 것처럼 여겨졌지만 탱자나무는 탱자나무의 역할이 따로 있었던 것.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지만 그는 제 역할을 묵묵히 수행하며 한라봉 나무로서의 정체성을 지켜내고 있었던 것이다. 제 역할의 중요성을 모르고 남의 일에 간섭하려고 들 때 우리 사회도 잎만 무성한 채 열매 하나 맺지 못하는 불구의 나무가 되는 것이려니...

아직 경계지점을 벗어난 잔뿌리는 없다. 적당한 시점에서 적당한 조치를 해 주는 것이다. 한라봉 나무로서의 정체성을 유지시키기 위해 농부가 해야 할 일은 생각보다 많다. 주는 것과 덜어내는 것 사이에서 적당한 지점을 잡고, 그 지점에서 꼭 필요한 무언가를 해 주는 것, 유능한 농부가 되는 첫걸음이다. 더하기와 빼기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곡예비행을 하고 있는 나의 하루가 짧게 간다. / 김연미(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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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미 시인은 서귀포시 표선면 토산리 출신이다. 『연인』으로 등단했고 시집 『바다 쪽으로 피는 꽃』을 펴냈다. 2010년 제2회 역동문학상 우수상을 수상했다. 젊은시조문학회, 한국시조시인협회, 제주작가회의 회원으로 활동 중이다. 최근 서귀포시 표선면 가마리에서 감귤 농사를 시작한 ‘초보 농부’인 그는 <제주의소리>에 ‘어리숙한 농부의 농사일기’를 통해 하루하루 직접 흙을 밟으며 겪은 일상의 경험들을 풀어놓을 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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