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정홍의 또 다른 이야기> 그들은 과연 이 지역사회에서 ‘어떻게’ 존재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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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답 없는 물음

저는 오로지 동시대인이 가질 수밖에 없는 연민으로 묻습니다. “도대체 우리고장에 이른바 ‘사회적 어른’들이 존재하는가?” 여기서 다시 아프게 물을 수 있습니다. “그들은 과연 이 지역사회에서 어떻게 존재하는가?” 그러나 그 대답은 어렵습니다. ‘나’도 제가 비판해 마지않는 ‘그 사람’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도전적인 물음으로 출발하지만, 오늘도 제 이야기는 그저 ‘괴로운 글자’들을 늘어놓는, 그래서 더욱 ‘체념에 가득 찬’ 말투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비판의 깊이는 ‘비판을 받는 대상에 대한 이해의 깊이’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것은 철저한 ‘자기비판’입니다. 만일 사람들이 부지불식간에 저지른 똑같은 오류로부터 비판의 당사자를 구제하는데 도움을 주지 못한다면, 어떻게 다른 견해들을 논박하는 일이 어느 누구에게 이로움을 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용기를 냅니다.

우리 모두는 지난 국회의원 선거과정에서 일부 인사들의 ‘볼썽사나운 행태’를 직접 확인한 바 있습니다. 서둘러 이야기하는 게 아닌가 싶지만, 그렇다고 하여 이른바 ‘사회적 어른’들의 순기능까지 ‘낡은 것’으로 외면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아무리 일부 인사들의 행태가 못마땅하더라도, 이른바 ‘사회적 어른’들의 역할 자체가 무화(無化)되는 건 아닙니다. 그들의 기능은 어쩔 수 없이 낱낱의 개인으로 실현될 수밖에 없지만, 어찌 보면, 그들은 어떤 ‘특정한 개인’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회적 어른’들의 ‘보편적 권위’

지역사회는 단순하게 개인들의 개별적 이익의 집합으로만 성립되지 않습니다. 주민의식도 사회 구성원들의 다원적 이해의 합산만으로 형성되지 않습니다. 그것을 한데 묶는 결속력이 그래서 필요합니다. 그것을 가능케 하는 게 이른바 ‘사회적 어른’들의 ‘보편적 권위’입니다. 개인의 사적 이해가 한 지역사회 안에서 사회적 힘으로 용인되는 것도, 따지고 보면, 이성에 뿌리를 두고 있는 그 ‘보편적 권위’에 의해 중화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회적 어른’들이 있는 공동체는 그만큼 효율적이고, 그리고 인간적입니다.

그러나 어른도 어른 나름입니다. 어른이란 바로 ‘도덕의 규범자’임에도 불구하고, 반드시 말해야 할 곳에서는 ‘고뇌의 침묵’으로 대답하고, 시시비비를 가려야 할 곳에서는 ‘중용의 신중함’으로 위장하고, 갈등이 있는 곳에서는 ‘중립의 미덕’을 완성하는 듯한 비겁함으로 대신하고…. 그래서 ‘꼰대’소리 듣기 딱 알맞습니다. 그렇습니다. 그것으로 ‘보편적 권위’가 채워지고 있다면, 그것은 묵수돼야 할 게 아니라, 검증되고 회의(懷疑)돼야 할 대상입니다. 그에 대한 도전은 당연합니다. 요즘 그런 세상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고장의 일부 ‘어른’들의 행태는 이런 일반적인 이야기만으로는 그것을 설명하기에 한참 부족합니다. 그래서 많이 부끄럽습니다. 투표권을 가진 이상 누군가를 지지할 수 있겠지만, 여기저기 정치판을 기웃거리고, 패거리의 과두처럼 오히려 갈등을 조장하고…. ‘감정적 편향과 무책임한 착각!’ 억장이 턱 막힙니다. 그건 절망입니다. “한 두 사람의 행태를 보고, 모든 어른들을 낮은 수준으로 끌어내리는 게 아니냐”고 화를 내시는 분이 혹 계실지 모르지만, 그 말씀이 옳다고 하더라도, 그 한 두 사람이 마침내 물을 흐리고, 그리하여 사람 속을 긁어놓고 있다면, 어찌 아득하지 않겠습니까?

주체할 수 없는 욕심

너무 야박하게 말하는지 모르지만, 그건 ‘주체할 수 없는 욕심’입니다. 아무리 아니라고 우겨도, 그건 가슴속에 똬리를 틀고 있는 자만심과 허세입니다. 거기서 양심과 욕망이 합일 할 수 있다고 믿는 건 착각입니다. 공허한 욕심을 끝내 버리지 못하고, 거기에 집착하는 것은 욕구 그 자체의 성질이 일반인의 그것과 본질적으로 다를 뿐만 아니라, 그것이 사회문화적으로 규정된 망상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욕망은 억제되지 않습니다. 누구나 그것을 추구하며, 자신의 존재를 극대화 하려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자제와 절제가 필요합니다. 무엇이 자제돼야 하고, 무엇이 절제돼야 할 것인지를 분별하지 못한다면, 그건 불행입니다. 물론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제와 절제가 비록 쓸쓸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우리들의 삶을 반성할 수 있는 거울과도 같습니다. 공자가 “나이 70이 되니, 내 마음대로 행하여도 도리에 어긋남이 없더라”고 말한 것도, 따지고 보면, 자연적 욕구와 보편적 도덕의 완벽한 조화를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적 어른’일수록 치열한 자기성찰이 있어야 합니다. 편견과 원한으로 인한 이해관계 등에의 개입을 반성해야 합니다. 모든 사태를 공적 지평에서 해석하고, 그리하여 지역사회 전체의 관점에서 처신하는 평정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그만큼 신중해야 합니다. 그건 무한 책임입니다. 물론 세상사를 완전히 등지고 살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그러나 그 정도의 나이와 경력이라면, 그 무엇에도 흔들리지 않는 맷집 정도는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일체의 욕심과, 그것에 의한 공격성을 괄호 칠 줄 알아야 마음을 제대로 비울 수 있습니다. 거기가 전부입니다.

지역사회의 정상적인 발전을 위하여

그렇다고 하여 아무 것도 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은 절대 아닙니다. 그건 사회적 손실입니다. 저는 그 어떤 경우에도 그들의 은둔을 바라지 않습니다. 그들이라고 해서 ‘새와 짐승과 동군(同群)’하란 법 없습니다. 옛사람의 말대로 “말라비틀어져가는 오이‘일지라도, 제값에 팔려나가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아직도 꿈을 꾸고 있는 사람들은 그 꿈을 실현하기 위해 열심히 활동해야 합니다. 그건 나이와 경력과 무관합니다. 그러나 이기적이고, 부자연스럽고, 과장되고, 쓸데없고, 허세를 부리고, 계산적이고, 위선적이고, 가식적인 행위는 용납되지 않습니다. 볼썽사나울 뿐 아니라, 지역사회의 정상적인 발전을 위해서도 그건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저는 지금 무엇을 상대로 이렇게 열을 올리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모든 책임을 그쪽으로만 돌리는 것도 문제가 있습니다. 오늘의 논의를 희석시키고픈 마음은 추호도 없습니다. 다만 ‘바른 어른상(像)’을 정립하는 것 역시 우리 모두의 몫이라는 것만큼은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싶습니다. 무너뜨려야 할 권위주의는 그대로 둔 채, 사회적 힘으로 유지돼야 할 ‘보편적 권위’를 오히려 격하시키거나, 파괴해온 것이 아닌지, 똑같은 비중으로 반성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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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정홍 언론인.
가끔 시대를 이야기하지만, 그것 역시 우리가 만들어가는 과정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부 인사들의 행태를 비판하는 것 이상으로, 그런 일이 왜 생기는지를 성찰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리하여, 그런 구도가 우리들의 지지로 인하여 형성되고 있다면, 결연하게 그 지지를 철회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시대의 모든 허위의식을 털어내고, 우리의 실상을 대면하는 것에서부터 희망을 만들어가야 합니다. 역시 희망은 가능성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 강정홍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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