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세통Book世通, 제주읽기] ⑭ 김시종  『조선과 일본에 살다』 /장이지 제주대학교 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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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시종 『조선과 일본에 살다』윤여일 옮김. 도서출판 돌베개. 2016.
『조선과 일본에 살다』는 재일(在日) 시인 김시종의 자전(自傳)이다. 연재 때에는 「가도가도 꼬부랑길」이라는 제목이었으나 신서판으로 엮으면서 지금과 같은 제목이 되었다. 이 책은 제목 그대로 재일 디아스포라의 지난한 삶의 일단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그것도 해방된 조국에서 밀려나 다시 식민지 본국으로 건너갈 수밖에 없었던 존재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그 이면에는 4․3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우고 있다. 

김시종은 만년에 이르러서야 4․3사건에 대해 조금씩 말하게 되었다. 그 자신 남로당 당원이었던 점 때문에 ‘인민봉기’였던 4․3의 정당성이 훼손될지도 모른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일본으로의 불법입국을 자인하는 경우 한국으로의 강제송환 가능성도 부담감으로 작용을 했다. 

김시종은 자신이 열렬한 황국소년이었음을 고백하면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소위 ‘옥음방송’으로 일컬어지는 일왕의 항복 선언을 라디오로 들었을 때는 일왕에게 미안함을 느낄 정도로 그는 충실한 황국소년이었다. 일본의 노래, 소학교 창가와 동요 등은 그에게 있어 지극히 ‘다정한 것’으로 여겨졌다. 그는 소년잡지 『소년클럽』, 만화 『노라쿠로』, 성인 대중잡지 『킹』등 일본의 문자매체를 즐겨보았으며, 일본의 대중가요에 심취해 있었다. 기타하라 하쿠슈(北原白秋)나 시마자키 도손(島崎藤村) 등의 서정시가에 끌렸던 것도 극히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그는 일본식 단시형 문학의 리듬감에 도취하였고 거기에서 ‘서정’을 보았다. “이토록 부드러운 노래를 향유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어째서 전쟁을 찬양하고 그토록 무자비한 일을 저질렀던가.”라고 그는 적고 있다. 사실 ‘서정’이라고 하는 것은 ‘모성-교육’을 통해 국가가 만들어낸 것임을 상기할 때, 그러니까 저 ‘다정함’ 저편에 국가가 있다는 것을 떠올리면, 그의 의문은 다소 풀릴 수 있었을지 모른다.

1929년생인 그는 일본어를 ‘모국어’로서 받아들이고 있었다. ‘국어(일본어) 상용’을 둘러싸고 친구들끼리 ‘벌권 카드’를 서로 빼앗고 서로 징치하는 학교 분위기 속에서 그는 성장했다. 그런 그를 애처롭게 본 그의 아버지는 그에게 김소운이 우리 시를 일역한 시집 『젖빛 구름』(乳色の雲)을 주었지만, 거기서 그는 조선 문화에 대한 역자의 애착을 이해하는 대신 조선과 일본의 ‘심정적 동질성’을 느끼고 내심 쾌재를 불렀다.

해방이 되고 나서 일본어가 쓸모없어지자 그는 크게 동요하지만, 아버지가 우리말로 불러주시던 「클레멘타인」을 떠올리고 겨우 조선어의 세계로 걸어갈 마음을 추스를 수 있었다. 그는 청년문선대로, 최현 선생이 펼친 ‘제 고장 찾기 운동’으로, 친구 백준혁을 통해 독서회로, 교원 양성소 촉탁으로 나아갔다. 황국소년이었던 그가 사회운동의 길로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은 아버지와 최현 선생 덕이었다. 주목되는 것은 역시 모성적인 것을 매개로 한 ‘서정-국가’의 길이 일단 좌절된 자리에 부성적인 것을 매개로 한 ‘사회운동-국가’의 길이 열린 점일 터이다. 그는 남로당 연락원이 됐다.

이 책은 개인의 회상에 토대를 둔 것이지만, 1947년 3․1절 기념집회에서 이미 발아하기 시작한 4․3사건의 추이를 시간표적으로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공적인 기록으로서도 가치가 있다. 김일성의 성급한 ‘민주개혁’으로 인해 북조선에서 삶의 뿌리를 잃고 월남한 일군의 젊은이들이 ‘서북청년단’이 되어 극우로 흘렀다는 분석이나, 4․3 때 제9연대장 김익렬 중령과 무장대 김달삼 사이에 오간 평화교섭에 대한 증언 등은 당시의 시대적 분위기를 느끼게 해준다. 그 자신이 직접 연루된 제주중앙우체국 거사 실패에 대한 묘사는 이 책의 역자가 후기에서 지적하고 있듯이 반세기의 경과가 무색할 정도의 임장감으로 핍진성을 띠고 있다. 이 사건은 김석범의 『화산도』에서도 다소 변형되어 그려진 바 있다. 김시종은 ‘우체국 거사’ 실패 이후 친구의 도움으로 도립병원에 잠입했다가 다시 미군 임시 하우스보이를 거쳐 도일 직전까지 외숙부의 집에 몸을 숨겼다. 그 외숙부는 경찰이나 ‘서청’이 아닌 무장대에 의해 잔혹하게 살해됐다.

김시종은 일본으로 몸을 피해 오사카의 이카이노에 정착했다. 여러 잡일을 전전하다가 그는 일본공산당에 입당하고 나카니시 조선소학교에서 일했다. 그는 오노 도자부로(小野十三郞)의 『시론』을 접하고 자기만의 문학 세계로 나아갈 수 있는 동력을 찾았다. 북조선에서 박헌영 등이 숙청되고, 임화의 시에 곡을 붙인 「인민항쟁가」가 금지곡이 되는 것을 접하면서, 그는 북조선을 정말 믿고 따라도 되는지 일말의 회의를 품게 됐다. 그는 줄곧 조총련과 갈등하다가 1960년대 중반에 이르러 조총련과 완전히 결별했다. 그렇다고 한국 쪽으로 돌아선 것도 아니다. 그는 한반도의 ‘하나의 조선’을 마음의 고향으로 하여 지금까지 살아왔다.

김시종은 ‘재일을 산다’라고 하는 독특한 재일관(在日觀)으로도 유명하다. ‘재일로서 산다’가 아니라 ‘재일을 산다’라고 하는 것이다. 그 의미에 대해 그는 이 책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일본이라는 ‘한곳’을 같이 살고 있는 재일조선인의 실존이야말로 남북대립의 벽을 일상 차원에서 넘어서는 민족융화를 향한 실질적인 통일의 장이라는 것”(262쪽)이다. 

그의 이 자전은 한 개인의 내밀한 삶을 엿보기에는 다소 소략하다. 다분히 4․3사건 전후의 공적인 삶에 치중했다는 느낌이 든다. 그러나 이 늙은 재일 시인의 기록은 식민 통치를 겪고, 거기서 벗어나자마자 다시 분단국가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던 민족적 비극의 원형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작지 않다.

그는 해방기의 기근과 전염병의 창궐을 떠올리면서 “식민지 통치의 멍에에서 빠져나온다는 것은 이처럼 응분의 대가를 요구”(96쪽)한다고 적었다. 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동남아시아의 여러 국가들이 친일과 반일 사이에서 혼란을 겪었던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일본의 지배 이전으로 돌아가자니 서구의 식민 지배에 부화뇌동했던 자들의 복권을 초래할 것이고, 일제를 인정하자니 매국노가 되는 딜레마의 상황에 동남아시아의 많은 나라들이 봉착했다. 그리고 종전은 해방이라기보다 대혼란을 야기했으며, 식민지를 겪은 여러 나라들은 내전 상황에 몰리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의 경우는 동남아시아와는 또 다르지만, 미국과 소련 양대 세력의 각축 속에서 내전 상황으로 내몰렸다. 친일 세력은 반공을 기치로 내걸고 새 시대를 구가했고, 4․3 사건과 여순 사건을 거쳐 한국전쟁에까지 이른다. 이 일련의 역사적 사건들을 나열해놓고 보면 이것을 저 “응분의 대가”라는 말로 다 형용할 수 있을지 망설여진다. 

김시종은 죽음의 섬 제주를 뒤로 하고 일본을 향해 가슴 속에 청산가리가 든 주머니를 품은 채 밀항선에 올랐다. 해방된 조국에서 떠밀려 다시 식민지 본국으로 갈 수밖에 없었던 ‘제주인 디아스포라’의 한을 생각해본다. 그는 어버이의 임종도 하지 못한 채 반 세기를 타국에서 보냈다. 그야말로 ‘재일을 살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의 한(恨)은 분단된 조선에도, 그리고 제국 일본에도 걸쳐 있다. 제목의 속뜻에는 그런 점도 조금쯤 섞여 있을지 모른다. 일국의 차원에서가 아니라, 적어도 아시아의 수준에서 이 한을 다룰 수밖에 없다는 데 우리 후대 사람들의 고민도 깊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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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이지 교수

시인. 2000년 『현대문학』 신인추천으로 등단

김구용시문학상, 오장환문학상 등 수상

현 제주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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