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리숙한 농부의 농사일기> (7) 귤나무 가시 다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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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귤나무에 솟아난 가시들. ⓒ 김연미

한라봉 꽃이 피기 시작하면 꽃을 따던 일손을 잠시 멈춘다. 개화된 꽃을 잘못 만지면 과일 모양이 좋지 않다는 말이 있어서다. 꽃이 떨어져 열매가 열리고, 그 열매들이 서로 성장의 기운을 다투다 힘이 부족한 것들 먼저 자연낙과가 될 때, 다시 농부의 손길은 바빠진다.

나무의 수세에 맞게 열매의 양을 조절하는 것이다. 하루 이틀 쉬고, 천혜향의 가시를 다듬어 주려 했다. 쉬는 사이 집안일도 하고 밀린 숙제도 하며 보냈다. 오랜만에 늦잠도 자고, 아이들과 도서관에도 갔다. 남들 출근해서 열심히 일할 때, 시간에 구애없이 여유를 부린다는 건 느껴보지 않고는 모르는 행복이다. 그런데 너무 놀았다. 천혜향 가시들이 벌써 힘을 주기 시작 했다. 

심지가 아직 덜 굳은 가시는 손으로 누르면 똑똑 소리를 내며 꺾였다. 가위를 댈 필요가 없어 일의 속도가 빠르다. 이 시기에 가시를 다듬지 못하면 대부분의 농부는 가시다듬기를 포기한다. 가위를 들고 하나하나 가시를 다듬는데 드는 시간이 너무 많이 들어서다. 우리 과수원에는 천혜향이 얼마 되지 않아 신경을 제대로 못 쓴다.

까딱하는 사이 가시 다듬는 시기를 놓치기 일쑤다. 천혜향의 가시를 다듬지 않으면 두고두고 일하는 데 방해가 되었다. 시도 때도 없이 장갑과 옷을 뚫고 살을 찔러댔다. 장갑을 두 켤레 끼고, 옷도 두껍게 입는다고 입었어도 샤워를 할 때 보면 온몸에 붉은 지렁이 기어가는 그림이 그려져 있다. 
 
아직 며칠의 여유는 있다. 이삼일 내로 작업을 다 마친다면 문제없겠지만 그건 좀 힘들 것이다. 며칠 내로 한라봉 열매솎기에 들어가야 하기 때문이다. 마음을 느긋하게 먹고 할 수 있는 데 까지만 하기로 한다. 휴대폰을 꺼내 다운 받은 파일을 연다. 며칠 노느라 듣지 못한 팟케스트 방송들이다. 듣고 싶은 방송을 골라 플레이를 한다. 부드러우면서도 지적인 남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혼자 일하면서 좋은 것은 이렇게 듣고 싶은 방송을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마음껏 들을 수 있다는 것이다. 노래 한 구절 제대로 듣지 못하며 지냈던 지난 시간들에 비하면 한량이다.

선기기간에는 각종 선거내용이 주를 이루었는데, 요즘은 선거 후의 정세변화와 경제문제가 주를 이룬다. 여소야대 정국과, 세월호 2주기, 한국형 양적완화, 그리고 52조 잭팟의 허와 실, 연립정부와 같은 현안들이 이어진다. 잊고 살았던 이야기와 매일 듣고는 있지만 정작 그 뜻조차 모르는 이야기들이 진행자의 입을 빌어 내 머릿속에 차곡차곡 쌓인다. 힘없는 자들을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길들여보겠다는, 힘 있는 자들의 권모와 술수에 대해서도 듣는다. 귀로 듣고 머리로 생각하고, 손으로 가시를 다듬고 있다.

귤나무의 가시다듬기야 말로 힘 있는 인간이 힘없는 나무들을 길들여가는 과정이다. 나무에 가시가 많다는 것은 아직 그만큼 덜 길들여져 있다는 뜻. 본성을 없앨수록 인간들의 입맛에 맞는 과일이 열릴 것이다. 농부의 입장에서 본다면 나무의 야성을 다 없앨수록 좋은 것이겠지만, 나무에게는 결코 용납이 되지 않는 일이다. 성성하게 나를 겨냥하고 바늘 끝을 세우는 저 시퍼런 의지가 쉽게 꺾일 것 같지는 않다. 

자세히 보면 오래된 나무일수록 가시는 적다. 몇 해를 두고 인간의 손에 의해 잘려진 그들의 가시. 더 이상 저항의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아버린 모습이다.  농부의 일거리가 줄어서 좋기는 하지만 그 모습은 씁쓸하다. 내 모습을 보는 것이다. 두루뭉술 좋은 게 좋은 거라며 나도 그렇게 살고 있다. 간혹 내 몸에 돋아나는 가시는 내 성격의 모남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누가 볼세라 황급히 감추려고만 했다. 그러면서도 늘 마음 한 구석에는 이렇게 살아도 될까하는 회환의 긴 똬리가 돌돌돌 말려 있고...

이어폰에서는 나를 길들이려는 세상의 이야기가 끝도 없이 흘러나오고, 나는 귤나무를 길들여보겠다고 쉬지 않고 가시를 다듬는다. 길들여지지 않겠다는 나무의 저항이 끝까지 나를 불편하게 한다. 백전백승의 승세가 시간이 갈수록 불리해 진다. 일망타진도 어렵고, 게릴라 전술을 펴는 그들의 공격에 성인군자처럼 깔려 있던 인내심마저 뒤집혀진다. 전세를 역전시킬 뭔가가 필요하다. 의연히 장갑을 벗는다. 잠시 휴전! 물마시고 하자. / 김연미(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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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미 시인은 서귀포시 표선면 토산리 출신이다. 『연인』으로 등단했고 시집 『바다 쪽으로 피는 꽃』을 펴냈다. 2010년 제2회 역동문학상 우수상을 수상했다. 젊은시조문학회, 한국시조시인협회, 제주작가회의 회원으로 활동 중이다. 최근 서귀포시 표선면 가마리에서 감귤 농사를 시작한 ‘초보 농부’인 그는 <제주의소리>에 ‘어리숙한 농부의 농사일기’를 통해 하루하루 직접 흙을 밟으며 겪은 일상의 경험들을 풀어놓을 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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