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 카페 동인 8명과 함께 사화집 펴낸 고봉선씨
"보이지 않는 힘에 이끌려 '詩'에게로 갔다"

"누구나에게 꼭 가야 할 길이 있다고 믿는다. 나에게는 그것이 시를 쓰는 것이고 또 어떤 보이지 않는 힘이 나를 시를 쓰는 길로 인도했다"

기어오른다
자갈밭을 버걱버걱
내장이 파열하는 고통조차 끌어안은 채

저 담장만 오르면
자나깨나 그리던 님 날 반겨 주겠지
푸른 꿈 이파리에 펼쳐가며
어기적어기적 기어오른다

한 때는 추락의 현기증도 흥겨운 가락이었어
성급한 삭풍의 너름새 앞에
해밀 지닌 고운 가슴 잔인하게 부서진다
벙어리의 삼중고(三重苦)
흐느끼는 몸부림엔 열꽃만 가득하고

담장 끝은 지척인데
또 한 계절 망부석이어야 하나,
홍조 띤 작은 소망 마비되는 슬픔 앞에
한 웅큼 새빨간 그리움의 파편들은
눈물 되어 후드득 바람 따라 흘러간다.

- 고봉선 作 '담쟁이'

산골소녀로 자라며 유난히 들꽃을 좋아하고 책을 좋아하고 글 쓰는 것을 좋아했던 고봉선씨(45).

하지만 소녀시절의 문학적 감성은 성년이 되고 가정을 일구는 등 세파에 점점 퇴색돼 가는 듯 했다.

그리고 연이어 닥친 역경. 하던 일이 어긋나고 교통사고를 세번씩이나 당하는 등 그녀에게 세상살이는 그리 녹록치 않았다.

헤어날 수 없는 정신적 방황의 늪에서 허우적거릴 때 그의 손에 잡힌 하나의 지푸라기. 그것이 바로 시(詩)였다.

인터넷 카페 '시원문학회(http://cafe.daum.net/ckl0000)'를 알게 되고 그곳에서 시인 최광림 선생의 지도를 받게 되면서 그녀는 육신의 피곤함을 잠재우고 정신적 평온함을 찾게 됐다고 한다.

그런 그녀가 최근 8명의 동인들과 사화집을 출간했다. '풍경(風磬)이 있는 풍경(風景)'.

   
 
 
무난한 어린시절과 학창시절을 보내고 결혼을 하고…, 자못 평범한 듯 보이는 그녀의 삶에 파장이 일기 시작했다.

어려운 가계에 보탬이 되기 위해 시작했던 신문배달로 신만과 가까워지고 현재는 일간지 고객센터에서 근무하고 있는 고봉선씨는 당시를 "세상 온갖 시름 다 껴앉고 사람들에게 '나 불쌍하다'는 얼굴로 살아갔다"고 표현했다.

"내가 그런 얼굴로 세상을 살아가니 세상도 나를 홀대하더라고요. 힘들고 불쌍한 얼굴을 하고 있으니 동정은 하면서도 혀만 끌끌 찰 뿐이죠"

그러던 그녀가 자신만의 비밀화원으로 통하는 열쇠를 발견했다.

바로 인터넷 카페인 '시원문학회'의 만남. 카페에 가입하고 활동한 것은 5~6년 전이지만 그녀가 자신만의 '비밀화원'으로 시원문학회를 이용하게 된 것은 2년전부터였다고.

연이은 세번의 교통사고로 몸과 마음이 상처투성이였던 뜨거운 여름 어느날.
병원으로 가기 위해 나선 길.
횡단보도를 건너기 위해 신호대기 중에 눈에 들어온 것은 교차로 코너에 마련된 화단에 빨간색 작열하는 샐비어.

그때 문득 시상이 떠올랐다.

불볕을 머리에 이고 숨죽여 병원 가는 길
붉은 신호등 저편 푸른 화단엔
계절을 집어삼키려는 불의 여신인가,
주린 욕정에
요염한 자태(姿態) 하나 흐느적대고 있다

한여름
끓는 열기 사모하다 지친 갈증
차라리 불태우고자
농익은 나신은 태양을 마주하고 누웠다

그 붉은 유혹에 취해
감미롭게 다가오는 손 맞잡으면
이글대는 불꽃은 무희 되어 흐느끼고
먼 훗날의 말 없는 언약
햇무리 만들어 징표(徵表) 삼는다

아마도, 아마도 이 8월엔
환웅님 못다 펼친 홍익인간 이념으로
또하나의 건국신화 탄생시킬
고조선의 왕자를 잉태했으리
로터리 화단의 저 검붉은 사루비아는.

- '사루비아'

자신만의 비밀화원을 갖게 된 그녀는 서서히 변하고 있었다. 매사에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태도를 보이며 생활하게 됐다.

지역적 제약을 받지 않는 인터넷 카페를 통해 알게 된 동인들이 매월 한차례씩 갖는 오프라인 모임에 참석할 수 없는 그녀가 찾은 방법은 전화.

전화를 통해 시낭송을 하고 동인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시인 최광림 선생에게 지도를 받고….

그렇게 자신이 어린 시절 간직했던 문학적 감수성을 다시 깨우고 시를 쓰기 시작했다.

   
 
 
시를 쓰다보니 시에 본격적이고 체계적으로 공부하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고 올해초에는 방송통신대학 국문학과에 입학했다. 또 현재는 시조의 매력에 빠져 시조를 공부하고 있다.

가정에서는 아내로, 어머니로 서야하고 직장에서는 직원으로, 학교에서는 학생으로 살아가면서 또 시인인 그녀.

힘들지 않냐는 물음에 "모든 것을 완벽하게 해야겠다는 강박관념에 빠지면 그 모든 역할들이 나에게 중압감으로 다가올 것"이라며 "가끔 소홀할 것에는 과감하게 소홀하기도 한다"고.

"그 모든 역할들이 나에게는 기분좋은 긴장감을 주기 때문에 소중하다"는 그녀는 "누구나에게 자기가 꼭 가야할 길이 있다는 생각을 한다"며 "나 역시 곁길을 걷기도 했지만 시를 통해 비로소 내가 꼭 가야할 길을 걷게 된 기분"며 행복한 미소를 띤다.

이번에 출간된 사화집은 시원문학회 동인이면서 미래문학으로 등단한 시인 9명이 함께 했다. 북랜드, 7000원.

※ 사화집이란?
어원은 그리스어(語)의 앤톨로기아(anthologia)로 '꽃을 따서 모은 것'이라는 뜻이다. 짧고 우수한 시의 선집(選集), 특히 여러 작가들의 시를 모은 것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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