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세통Book世通, 제주읽기] (18) 로베르토 웅거  『주체의 각성』 /이유선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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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베르토 웅거 『주체의 각성』(원제 : The Self Awakened) 이재승 옮김. 앨피. 2012년.
1. 우리의 불행은 운명인가?

요즘은 뉴스보기가 겁난다. 하루가 멀다 하고 이유 없는 살인이 저질러지거나 어이없는 사고가 발생한다. 서울 강남역에서 한 젊은 여성이 아무런 이유 없이 살해당하고, 혼자서 등산에 나섰던 중년 여성 역시 출소한지 얼마 되지 않은 범죄자에 의해 너무나도 허무하게 목숨을 잃었다. 이런 사건들이 절망이나 무력감에 빠진 개인들에 의해서 결과 된 불운이라면, 지하철 역사의 자동문을 수리하던 젊은이가 목숨을 잃은 것은 인간의 생명보다 효율성을 중시하는 소위 합리적인 관리 체계가 만들어낸 사회적 불운이다. 최근에 벌어진 신임여교사에 대한 집단 성폭행 역시 당사자에게는 평생 돌이킬 수 없는 불행한 사건이다. 

이런 일이 벌어질 때마다 우리는 한편으로는 안타까워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이 내게는 단지 TV 속의 뉴스일 뿐이라는 사실에 안도감을 느낀다. 그런 사건의 희생자들은 나와 내 가족이 아니라 단지 불행한 어떤 사람일 뿐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우리는 그런 사건들은 인간 사회에서 늘 있는 일이며, 어쩔 수 없는 불행이라고 여김으로써 안도감을 느끼는 스스로를 합리화한다. 이 세상의 정신병자를 모두 관리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범죄자가 다시 범죄를 저지르는 것도 완전히 막을 수는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또한 경제적인 효율성을 위해서는 우리 사회의 어떤 사람들은 위험한 일을 할 수도 있으며, 성욕은 제어하기 힘든 것이라서 여성이 처신을 잘못하면 성폭행을 당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합리화의 이면에는 운명에 굴복하는 무력감이 도사리고 있다. 한 사람의 개인으로서 나는 사회면을 장식하는 끔찍한 범죄에 대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 TV에 나온 전문가가 조언하는 대로 그저 혼자서는 등산을 하지 말고, 위기 상황에 대비해서 호루라기나 호신용 스프레이를 소지해야겠다고 생각할 뿐이다. 세상은 내가 상대하기에는 너무나도 막강한 거대한 벽으로 여겨진다. 간혹 등장하는 내부고발자들이 파멸하는 과정을 보면서 우리는 세상이 온통 잘못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알아도 나의 힘으로 그것을 바꿀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우리는 악순환의 고리에 스스로를 밀어 넣는다.

세월호 침몰 사건에 대한 우리 사회의 대처 방식을 보면 더 나은 사회에 대한 희망을 갖는다는 것이 얼마나 헛된 꿈인지 절감하게 된다. 대통령이 비통한 표정으로 해체하겠다고 선언한 해경은 여전히 건재하고, 사고 당시 정황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을 뿐 아직도 명확한 해명이 없다. 국가적인 차원의 사회적 불운을 겪게 된 희생자와 유가족들은 보상받고 위로받기는커녕 망각되거나 반정부 시위대가 되었다. 심지어 시위대가 된 희생자들은 소위 보수단체의 패륜적인 범죄에 의해 2차 희생을 겪기도 했다. 거대한 사회적 불행에 대해 정부와 사회가 대응하는 방식을 바라보는 개인들은 다음에 다시 일어날 불운한 사건의 현장에 자신이 있지 않기를, 그리하여 자신의 삶이 불운에 이어지는 사회적 폭력에 의하여 나락으로 떨어지는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그런데 개인적인 혹은 사회적인 차원에서 발생하는 불운에 대해 그저 그것을 운명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불가피한 것인가? 우연히 일어나는 불운은 인간이 어찌할 수 없는 한계상황인가? 우연히 가난한 집에 태어나 생계를 위해 위험한 일을 하게 된 젊은 노동자의 삶은 운명적인 것인가? 세월호에 아이들을 태워야 했던 부모들은 그보다 한 살 많거나 적은 나이의 자녀를 둔 사람들에 비해 단지 운이 없었을 뿐인가?

2. 미래를 급진화하기

하버드대학의 로스쿨 법철학 교수인 로베르토 웅거(Roberto Mangabeira Unger)는 그의 저서 『주체의 각성』(이재승 역, 엘피, 2012)에서 우리가 사회를 바꿀 수 있는 주체임을 각성하지 않으면 민주주의는 없다고 주장한다. 웅거는 실용주의의 복원을 주장하면서도 그 원조격이라 할 수 있는 듀이가 충분히 급진적이지 못했다고 비판하면서, 인간을 단지 사유하는 유기체로서만 보아서는 안 되며, 우연성의 바다를 헤쳐 나가는 저항적인 행위자로서의 주체 관념을 계승해야 한다고 말한다. 사회적 제도와 법, 관습 등이 인간을 압도하는 힘이 아니라, 우리의 실천을 통해서 얼마든지 바뀔 수 있는 것이고, 우리 각자에게는 바로 그와 같은 변화를 이끌어 낼 수 있는 힘이 있다는 것을 깨닫는 데서 실질적인 의미의 민주주의가 시작된다고 웅거는 주장한다. 우리가 민주주의라고 알고 있는 여러 제도로서의 민주주의란 단지 제도적 물신주의에 해당할 뿐이며 대의제 민주주의는 영구적인 혁신의 대상이다. 

웅거는 인간을 우연한 진화의 산물이라고 보는 점에서 다른 실용주의자들과 같은 인간관을 가지고 있다. 그렇지만 웅거에게 있어서 그러한 우연성은 인간의 한계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더 나은 존재, 그의 용어를 그대로 가지고 오자면, ‘신과 같은 존재’가 되기 위한 조건이다. 인간은 우연성의 경험에 맞서 투쟁하면서 더 나은 존재로 거듭난다. 우리는 우리가 만든 사회적 문화적 세계에 의해 고갈되지 않는다. 우리가 만든 그러한 세계는 유한하지만 우리 자신은 유한하지 않다. 웅거는 이러한 점이 우리가 이 세계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켜야 하는 이유라고 주장한다. 

웅거의 주장대로라면 우리는 세월호의 희생을 경험하고도 변하지 않는 사회, 젊은 노동자의 어이없는 죽음을 경험하고도 바뀌지 않는 제도, 젊은 여교사의 희생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여교사를 파견하지 않으면 된다는 안일한 대책을 내놓는 정부에 대해 대항해야 한다.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면 우리가 다시 불운을 겪게 될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그런 악순환은 우리를 다시 무력하게 만들 것이다. 이런 악순환의 고리를 끊기 위한 웅거의 제안은 ‘미래를 급진화하는 것’이다. 웅거가 말하는 미래의 급진화란 불행한 일을 발생시키는 기존의 구조를 넘어설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무엇이 대안적 구조의 단서인지, 자체 혁신을 조직하는 구조의 단서는 무엇인지 탐색하는 것이다. 

웅거가 스스로를 혁신하는 구조, ‘구조 파괴적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유는 그런 구조를 통해서 끊임없이 새로운 대안을 모색하고 제도와 의식구조의 변혁을 꾀하는 사회적인 실험을 해 나갈 수 있고, 그런 실험을 통해서 ‘위기에 의존하지 않는 변화’를 모색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웅거는 위기를 겪지 않고도 사회를 바꿔나갈 수 있는 방법이 있다고 믿으며, 그것을 영구혁신을 통한 민주적 실험주의라고 부른다. 

위기를 시뮬레이션하고 그 대안을 실험하는 구조를 만들기 위해서는 수많은 전제조건이 필요할 것이다. 정치의 활성화라든가 대의제 민주주의와 직접민주주의의 결합 등에 관한 웅거의 제안은 그다지 구체적으로 여겨지지는 않는다. 예컨대 웅거는 사회의 경제적 진보가 허용하는 한에서 모든 개인은 ‘사회적 기금 계정’이나 ‘최저수입 요구권’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그런 것이 현실적으로 어떻게 가능한지에 대해서는 자세한 이야기가 없다. 그럼에도 정치가 단지 사회적 행운과 불운의 영향력을 감소시키는 정도에서 역할을 그쳐서는 안 되며, 더 나아가 운명거부론에 기초해야 한다는 웅거의 주장은 일상적으로 사회적 불운에 노출된 우리로서는 매우 절실하게 다가온다. 웅거는 사회가 참여와 연결의 기회를 증가시켜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사회는 극단적인 불운에 극단적인 자비로 대응해야 한다”고 말한다. 고통을 겪고 있는 사회적 불운의 희생자들에게 잔인함으로 대하는 우리에게 웅거의 저 ‘극단적인 자비로 대응해야 한다’는 낭만적인 제안은 우리의 무력감과 위선을 드러내는 매우 뼈아픈 은유로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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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유선 교수

현 서울대학교 기초교육원 강의교수
고려대학교 철학과 및 동대학원 졸, 철학박사
전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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