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교대 학장-국회의원 비서 출신 등 11명 연루...대법, 최종 무죄 확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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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7년 3월24일 경향신문에 대서특필된 간첩단사건 기사. 
유신정권 말기 제주사회를 발칵 뒤집어 놓았던 조작간첩 사건이 40년만에 누명을 벗게 됐다.

1977년 3월24일 언론은 '북괴 김일성'의 지령을 받고 재일교포 사업가로 위장한 '북괴 거물급 간첩' 강우규(당시 60세)씨와 그 일당 등 11명이 검거됐다고 대서특필했다.

수사 발표에 따르면 11명 중 강우규, 강용규(중문)씨 형제 등 10명이 제주출신이었다. 

특히 사건에는 제주교대를 설립하고 1-2대 학장을 역임한 김문규씨도 포함돼 있고, 현직 국회의원이었던 현오봉씨 비서 출신인 이오생, 김추백씨도 연루됐었다.

대법원 3부(주심 김신 대법관)는 북한공작원의 지령을 받고 기밀을 탐지하기 위해 국내로 잠입한 혐의(국가보안법 위반) 등으로 재판에 넘겨진 고(故) 강우규(1917년 출생) 씨 등 6명에 대한 재상고심에서 무죄를 선고한 원심을 그대로 확정했다고 19일 밝혔다.

16살에 일본에 건너가 1977년 45년만에 귀국한 강씨는 김일성의 지령을 받고 재일교포 사업가로 위장해 국내로 잠입했다는 이유로 중앙정보부에 끌려갔다. 

강씨와 동생 강용규씨, 그리고 국회의원 비서를 역임했던 이오생씨와 김추백씨는 물론 강씨의 초등학교 동창인 김문규 학장도 이 사건에 연루됐다.

중앙정보부에 끌려간 강씨는 구타와 전기고문, 물고문 등 모진 고문에 중앙정보부가 부르는 대로 일본에서 북한 공작원의 지령을 받고 간첩활동을 위해 국내로 잠입했다고 인정했다.

강씨의 동생 등 연루자들도 강씨에게 포섭돼 간첩활동에 따른 활동비 등을 제공받았다고 진술했다.

간첩사건 발표 3개월만인 1977년 6월 1심 법원은 강우규씨에게 사형, 그리고 동생 용규씨 등 10명에게 징역 1년6월에서 5년을 각각 선고했다.

1978년 3월2일 대법원은 강씨에 대해 사형판결을 확정했다. 하지만 사형은 집행되지 않았고, 11년간 옥살이를 한 강씨는 1988년 특별사면으로 풀려났다. 

동생 용규씨 등도 200여일 동안 고문을 받은 후 항소심에서 형량이 감형돼 집행유예로 석방됐다. 하지만 김문규 학장은 풀려난 후 후유증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강씨는 2007년 일본에서 숨졌고, 동생 용규씨와 김추백·이근만·이오생씨는 2010년 '수사기관의 가혹행위로 허위자백을 했다'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의 조사 결과를 받았다.

2014년 12월 서울고법 형사6부(김상환 부장판사)는 재심에서 강우규씨 등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고문과 가혹행위 등을 당하는 과정에서 한 진술은 증거 능력이 없다는 등의 이유에서다. 강씨가 조선노동당에 가입하거나 북한을 찬양하는 발언을 하고, 북의 지령을 받았다는 증거도 없다고 재판부는 판단했다.

조작간첩으로 몰린지 40년만에 누명을 완전히 벗게 됐지만, 강 씨 등은 이미 고인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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