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 쉼] 수험생과 수험생 엄마의 분투기

아들은 올해 고등학교 삼학년이다. 몇 달 뒤에 대학입학수학능력시험을 치른다는 말이다. 그러니 나는 그 고삼생의 엄마다.

아들과 엄마의 대화는 아주 짧다.
“아니, 고삼이 어떻게...”
“고삼이 뭐...”
짧은 대화 뒤 흐르는 것은 깊은 정적. 대화는 끝나고 엄마와 아들 사이에는 불통의 물결이 격하게 출렁이기 시작한다. 쉽게 설명하자면 아들과 엄마는 저마다 하고 싶은 말들을 마음속으로만 쏟아 붓고 있다는 것이다. 

“아니, 고삼이 어떻게...”
(고삼이 대학생이냐? 최신 개봉영화를 한 편도 놓치지 않고 다 보고, 주말이면 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 주무시고, 이제 몇 달 남지도 않았는데... 선택과 집중! 지금부터는 공부에만 집중해!)
“고삼이 뭐...”
(고삼은 사람 아니냐? 고삼은 숨도 쉬지 말고 공부만 해야 되는 거냐고, 나도 고민하고 생각 많이 해. 엄마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한심하게 살지 않다고! 엄마의 눈으로 나를 보지 마. 내가 뭐 공부 열심히 안하는 것 말고는 뭐 큰 잘못 한 것도 없잖아.)

왜 이런 말들이 마음속으로만 오가냐고, 지난 경험으로 미루어보아 말이 계속 될수록 서로 말꼬리 잡으며 이건 너의 잘못, 저건 엄마 잘못으로 떠밀다가 파국으로 치달았던 과거사에서 배운 교훈 때문이다.

말해도 소용없을 때는 그냥 조용히 상황 넘기기. 그 교훈을 잘 되새기는 것은 아들이고, 종종 교훈을 잊고 아들을 설득하려다 원망만 한 줌 더 얹는 것은 엄마다. 엄마의 원망이 깊어질수록 목소리는 커지고 아들은 방문 닫고 들어가 버린다. 아들과 엄마의 오랜 싸움에 익숙해진 딸은 일단 창문부터 닫는다. 옆집이 교수님 댁인데, 큰 소리 나가서 창피하다고 말이다.

학기 초까지만 해도 그나마 근근이 오가던 짧은 대화가 요즘에는 더 뜸해졌고, 엄마와 아들은 각자 분노의 에너지를 삭이며 소 닭 보듯 서로를 외면하는 날을 보내고 있다. 아들이 다니는 학교에서는 친절하게도 한 달에 한두 번 모의고사 성적표를 보냈으니 확인하라는 문자메시지를 보내주었지만 두 사람은 보여주지도, 보려고도 안했다. 아들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래도 가끔은 보려고 하지 않은 성적이 문득 궁금해지는 날이 있었다. 그날은 순서대로 엄마와 아들의 짧지만 격한 대화가 이어지고 소통의 반대편에 있는 불통의 끝점을 만나곤 했다.

엄마가 고삼 아들이 공부 안한다고 속 끓일 동안 아들은 마술을 한다. 아들의 주장은 공부를 열심히 하다 잠깐 쉬는 동안 하는 거라 하는데,  열심히 마술 하다가 잠깐 쉴 때 공부한다가 나의 의견이다.

아들이 마술을 하겠다고 가족들에게 공식적으로 발표한 것은 고등학교 1학년 겨울방학을  거의 다 보낸 어느 날이었다. 더 정확히 말하면 개학을 삼일 앞둔 날이었다. 비장한 표정으로 아들이 가족들에게 발표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꾸준히 해온 온라인 게임은 이제부터 하지 않겠다. 그런데 미리 기대는 하지 마시라. 게임하는 시간에 공부를 하겠다는 것은 아니다. 난 지금부터 마술을 하겠다. 가족 여러분의 적극적인 성원과 지지를 부탁한다.” 

적극적인 성원과 지지에 대한 답을 들을 새도 없이 아들은 발표만 하고 휙 자기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 후 현재까지 아들이 걸어온 길을 간단히 정리해보자면

∨ 고등학교 2학년 동아리 제안서를 써서 마술동아리 만들고 회장이 됨.
∨ 축제 체육대회 때마다 마술 발표를 함.
∨ 가끔은 시청 광장 등지에서 거리 마술도 함.

아, 이 이야기만 들으면 아들이 굉장히 멋지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간혹 있을 것 같다. 그런데 이 멋진 삶의 이면에는 엄마의 피눈물과 인내와 숱한 협상이 있다는 것을 간과하면 안 된다. 다른 모든 공연 예술과 마찬가지로 마술은 자리 잡을 때까지 많은 시간과 교육비가 필요하다. 대학입학수학능력시험을 준비해야하는 아들의 많은 시간과 엄마의 금전적 지원 말이다.

주변 친구들 대부분이 수능 준비에 집중하는 동안(이건 내 생각이고 아들의 주장은 몇몇 소수 학생들만 공부한다고 한다) 아들은 열심히 밤새워 마술을 연습하고 동영상을 보며 기술을 익히고 어느 정도 시간이 흘러 자신감이 생기자 스스로 마술하는 모습을 찍어 유튜브나 페이스북에 올리기 시작했다.

이렇게 아들이 마술의 길을 갈 때 엄마는 무엇을 했을까? 송금을 했다. 아들이 장바구니에 마술 카드를 담아놓으면 빠른 배송을 위해 반드시 두시 전에 송금해야했다. 카드 비용은 아들의 용돈에서 해당금액을 제하는 걸로 합의했다.

가끔 할아버지 할머니가 주신 특별 용돈, 아빠에게 읍소해서 나 몰래 받은 용돈 등도 모두 마술도구를 사는데 사용됐다. 또 가끔은 아주 열심히 공부하겠다는 결심을 담보로 내게서 돈을 받아가기도 했다.

아들의 마술 수련은 갈수록 진전되었고 작년 여름에는 드디어 마술의 성지 방문을 실현했다. 2박3일간 가족이 함께 한 짧은 서울여행 여정에서 우리가 무려 한나절 이상을 머무른 곳은 아들의 주장에 의하면 카드마술을 하는 사람들의 성지라는 마술 가게였다. 사당역에 내려 7번 출구로 나와 5분정도 걸어가다 오른쪽에 보이는 큰 건물의 지하에 마술의 성지가 있었다. 아들이 흥분해서 마술 책도 사고 마술카드도 살펴보는 동안 나는 재미없다며 빨리 이곳을 나가자는 딸을 달래야 했다.

작년 12월 29일에는 마술 세미나에도 갔다 왔다. 마술세미나만 갔다 오면 수험생의 자세로 돌아가 1년간 열심히 공부하겠다는 아들의 말을 믿고. 같이 서울을 가서 각자 일정을 소화한 뒤 공항에서 만나기로 했다. 이틀 뒤 다시 공항에서 아들을 만났을 때 난 깜짝 놀랐다. 품안의 어린애인줄 알았던 아들이 갑자기 훌쩍 성장한 모습으로 내 앞에 서있었다.

아들은 나와 헤어진 뒤 광화문에 있는 교보문고를 들렸다가 사당역에 있는 마술의 성지로 옮겼고 세미나 후 존경하는 마술가의 집에서 자고 다음날 아침 시내를 구경하다 왔노라고 했다.

그렇다. 이젠 내가 따로 돌봐주지 않아도 아들은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있는 것이다. 대견하면서도 아쉬웠다. 그 날 이 후 아들에 대한 나의 잔소리는 반으로 줄었다. 아들은 이제 엄마의 세계를 벗어나 자신의 세계를 벌써 꽤 많이 구축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아들과 엄마의 일상은 변함이 없다. 여전히 격한 대화가 오가고 정적의 시간이 흐르고 성적표는 볼 때 마다 한숨 나오고, 그래도 공부라는 주제만 벗어나면 우린 아주 잘 지내는 아들과 엄마다.

영화 동주가 너무 좋다며 같이 보자고 졸라 둘이 다정하게 보고, 백석의 시에서 같이 감동받고, 요즘은 금요일 저녁에 하는 음악프로그램을 같이 보자 조르는데, 그건 안된다고 했다.
힙합은 나의 취향이 아니므로. 하여튼 이렇게 저렇게 고삼과 고삼 엄마의 여름날은 잘 가고 있다.

덧붙이는 글

유튜브, 인스타그램, 구글에서 '함석일'을 입력해보세요. 울 아들의 마술 영상을 보실 수 있습니다. 조회수를 올려주면 아주 좋아할 것입니다.

혹시 저처럼 고삼 자식 때문에 머리 아프신 엄마들, 한 번 모입시다. 여름 저녁 같이 모여 곡차라도 한 잔하며 고삼 엄마로 속상했던 사례발표대회라도 열어보게요. 그리고 마지막 마무리는 ‘그래도 믿고 사랑하기’로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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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람섬(홍경희 제주교재사 대표). ⓒ제주의소리
자, 구호 시작.
믿고 사랑하기!!! 믿고 사랑하기!!!  믿고 사랑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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