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밥상 이야기> (1) 호박잎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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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박잎국. ⓒ 김정숙

장마가 열흘을 넘어간다. 제 세상을 만난 수국이나 능소화는 빗속에 더 고고하고 어여쁘다.  허나 다 그런 건 아니다. 대부분의 텃밭 작물과 꽃들이 물에 지쳐간다. 열무처럼 잎이 흐물흐물 녹아버리는 것도 있다. 그래서 녹음이 짙푸른 여름철에는 오히려 먹을 만한 채소가 귀하다.

이 와중에 울타리를 기어오르는 호박 줄기가 당당하다. 장마도 가뭄도 잘 견디며 게다가 아무데서나 잘 자라는 조선호박. 지인의 자동차 트렁크에서 겨울을 보내다가 텃밭에 내려놓고 간 것인데 싹을 틔웠다. 몇 개를 추려 울타리 둘레에 심었는데 꽃을 피우며 나날이 성장 중이시다. 맛은 밤호박에 밀리고, 나물로는 애호박을 따라가지 못하고, 모양은 또 관상용호박에 밀리고...

둥글 넓적 펑퍼짐하고 넉넉한 게 꼭 우리 어머니만 같은, 이름조차도 ‘늙은호박’이다. 예전에는 월동준비로 집집마다 몇 덩이씩 잘 익은 호박을 마련했었다. 호박고지를 해두었다가 시루떡을 만들기도 하고 찹쌀가루를 넣고 만든 호박죽은 또 얼마나 달콤하던가.

무 깍두기처럼 큼직하게 썰어 데쳐내서 무친 ‘호박탕쉬’ 라는 늙은호박나물은 제사상에도 올라간다. 된장을 넣고 끓인 호박국은 국거리 나물이 뜸한 가을철 단골메뉴였고 갈치를 넣고 끓인 호박국은 별미였다. 이래저래 만만하게 쓰이던 조선호박은 이제 식재료 보다는 풍경으로 놓이거나 산모의 부기를 빼기위해 만드는 ‘호박즙’과 ‘호박죽’ ‘갈치호박국’용 정도로 명함을 내밀고 있다. 그러거나 말거나 오지랖 넓게 자리를 차지하고 열리기는 또 얼마나 잘 열리는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박꽃은 이제 흔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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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박잎. ⓒ 김정숙

나는 호박국 보다는 호박잎국을 좋아한다. 큼직하게 자랐지만 아직은 풋내가 짙은 호박잎을 대궁을 붙인 채 대여섯 개 잘랐다. 대궁 자른 부분을 꺾으면서 밖으로 제치면 까실한 껍질이 실처럼 벗겨진다. 대궁을 자르고 잎을 행주 빨 듯이 손바닥으로 비비고 주무르면서 풋내가 빠지도록 거칠게 씻는다. 나중에는 손으로 뜯으면서 헹궈 물기를 짠다. 미리 고아 놓은 소고기 국물에 호박잎을 넣고 익으면 메밀가루나 밀가루를 물에 훌훌 풀어 넣는다.

가루가 익으면 국물이 걸쭉해 지는데  제주사람들은 이것을 ‘집(짚)을 넣는다’라고 한다. 국간장으로 간을 하면 된다. 지금이야 고기를 넣고 끓이지만 예전에는 그냥 멸치정도면 금상이었다.

학교에서 돌아와 책가방 내던지고 식은 호박잎국에 보리밥을 말아 한 대접 후루룩 하고 나면 그제서 보이던 유년의 뜨락, 그립다. 하루걸러 하루 호박잎국을 끓인다. 고기도 넣었다 만두도 넣었다 하며. 그러거나 말거나 호박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성장 중이시다. 생각지도 않는 호박이 넝쿨째 굴러 들어와 내 텃밭은 장마에도 풍성하다. / 김정숙(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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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숙 시인은 제주시 애월읍 납읍리 출신이다. 2009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조부문에서 당선됐다. 시집으로 <나도바람꽃>을 펴냈다. 젊은시조문학회, 한국작가회의, 한국시조시인협회, 제주작가회의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30여년 동안 제주도농업기술원에서 일하다 2016년 2월 명퇴를 하고 서귀포시 남원읍 수망리에서 귤 농사를 짓고 있다. <제주의소리>에 ‘제주 밥상 이야기’를 통해 제주의 식문화를 감칠맛 나게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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