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리숙한 농부의 농사일기> (17) 어느 하늘 맑은 날의 한 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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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산 앞바다. ⓒ 김연미

하늘과 바다가 제 영역을 확실하게 구분하고 있다. 파란색이라는 이름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그 본질의 많고 적음에 따라 차이는 확연하다. 바다는 멀리 나갈수록 색깔이 짙고, 하늘은 바다와 가까워질수록 본색을 감추고 있다. 파란색이라는 개념과 눈에 보이는 색깔의 괴리와 그 다양성을 언어로 다 설명해내는 건 어림없는 일이다. 눈에 들어오는 대로 받아들이고, 돌아서면 잠깐 망막에 남은 여운을 즐기는 것으로 족할 일이다.

칼로 그은 듯한 하늘과 바다 사이의 수평선을 그대로 두고 하늘 가운데 쪽으로 듬성듬성 있던 구름이 순식간에 어디론가 사라진다. 이윽고 수평선 아래쪽으로부터 피어나는 하얀 기운. 오랫동안 억눌린 것들이 한 번 터지면 통제할 수 없듯, 걷잡을 수 없는 구름 덩어리들이 수평선에서 빠져나와 남쪽 하늘을 하얗게 채우고 있다. 동그란 꽃잎처럼, 이제 막 만들어낸 아이들의 솜사탕처럼. ‘저렇게 수평선에서 구름이 올라오는 건 이제 곧 장마가 끝난다는 뜻이지’ 산촌에서 자란 내게 시할머니께서 해주신 말씀이셨다. 파란 하늘색 바탕 위에 그려진 하얀 뭉게구름이 들려주는 할머니의 포근한 음성. 장마가 끝나려나...

장마의 긴 지루함 사이에 낀, 안개의 불투명한 시선 사이에 낀, 깨달음처럼 찾아오는 하늘 맑은 날의 한 낮. 일손을 멈추고 바다에 나와 있다. 어차피 한낮의 더위는 피해야 하고, 그 시간을 이렇게 눈 호강으로  채울 수 있다는 건 행복한 일이다. 일주도로에서 바다를 바라본다. 떠나간 연인을 먼발치서 바라보는 것처럼.

팽팽하던 수평선이 긴장의 끈을 놓는다 싶은 순간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들어오는 검은 구름. 하얗던 하늘이 금세 시커멓게 변했다. 오고가는 양도 없이 그대로 색깔을 바꾸는 하늘의 변신술에 잠시 어리둥절. 칼로 자른 듯 선명하던 세상이 순식간에 혼돈의 상태로 변했다. 툭, 투둑,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 내 앞의 여린 풀꽃 하나 크게 휘청인다. 차고 넘치면 덜어내야 하는 법. 검은 구름이 빗방울로 넘치고 있다.

토산 앞바다. 어릴 적에 학교에서 단체로 해양물놀이를 왔던 곳이고, 학교 운동장을 단장하기 위해 바닷돌을 주우러 왔던 곳이다. 백중날이면 부모님과 함께 물놀이를 왔던 곳이기도 하다. 그늘이 지는 바위 아래 터를 잡고, 우영밭에서 따온 수박 한 덩이 산물이 나는 물통에 담갔다 꺼내 잘랐었다. 검은 바위 위에서 속을 드러낸 수박의 빨간 색깔은 태양보다 더 강렬했다. 파도가 들어오지 않는 곳을 골라 입술이 새파래지도록 물놀이를 하다가, 바위틈마다 빼곡하게 들어있던 보말이며 참고매기를 잡았다.
 
그 바다를 앞마당에 두고도 손발 한 번 담그지 못하고 지나는 날이 많다. 내 삶은 바다에 있지 않았고, 바다의 주인이라 주장하는 사람들이 나타나면서 나는 바다로 가는 길을 잃어버린 것이다. 일주도로를 기점으로 바다 쪽은 아무도 제 것이라 하지 않았고, 아무라도 들어가 주인처럼 사용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는 사이 리조트가 들어서고, 연수원이 들어섰다. 땅에 말뚝을 박고 들어선 건물이었지만 그 건물들은 바다마저 제 영역의 둘레를 치고 사람들의 발길을 통제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영역의 바깥에서 포기라는 울타리를 착실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이제 어쩌면 먼 발치에서 바라보는 것도 돈을 내야 할지도 모를 일이다.
 
장맛비와의 일전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의외로 싸움은 싱겁게 끝났다. 무슨 사정이 생겼는지 몇 방울 떨어지던 비가 금세 그쳤다. 검은 구름이 제 표정을 다 바꾸지도 않은 채 동쪽으로 물러간다. 빗방울이 찾아들어야 할 번지수가 잘못되었던 걸까. 덕분에 날씨는 더 후텁지근해졌다. 지열이 지글지글 끓어오른다. 조금만 더 쉬었다 가자. 하늘과 바다의 이분법이 더 확실해질 때까지. / 김연미(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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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미 시인은 서귀포시 표선면 토산리 출신이다. 『연인』으로 등단했고 시집 『바다 쪽으로 피는 꽃』을 펴냈다. 2010년 제2회 역동문학상 우수상을 수상했다. 젊은시조문학회, 한국시조시인협회, 제주작가회의 회원으로 활동 중이다. 최근 서귀포시 표선면 가마리에서 감귤 농사를 시작한 ‘초보 농부’인 그는 <제주의소리>에 ‘어리숙한 농부의 농사일기’를 통해 하루하루 직접 흙을 밟으며 겪은 일상의 경험들을 풀어놓을 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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