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밥상 이야기> (4) 보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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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말. ⓒ 김정숙

움직이는 대로 땀이 줄줄 쏟아진다. 이런 날 이 제주에 산다는 건 정말 신이 내린 축복이다. 전생에 나라를 구하지 않고서야 어떻게 이런 땅에 태어날 수 있었을까.

여름의 정점에 백중사리가 있다. 음력 7월 15일 백중을 전후하여 일 년 중 조수 간만의 차가 가장 큰 때를 가리킨다. 소라며 보말이 살찔 때이기도 하다. 섬이 제일 커지는 그 한 때, 웃뜨르인 중산간 마을 사람들까지도 바롯잡이란 걸 하러간다. 물 빠진 돌 밑이나 바위틈에 붙어 있는 보말도 잡고 몸도 담그고. 어른들은 더 깊은 물속으로 들어가 비교적 큰 수두리보말이나 먹보말을 잡았지만 아이들은 물가에서 작은 것들을 주워 모았다. 쉼 없이 파도가 달려와 등을 토닥여주고. 그렇게 집으로 돌아와 식구들이 모여앉아 까먹기도 하고 남으면 알맹이만 내서 졸임을 했다. 더운 날 상하지 않고 다음날 까지 먹을 수 있는 것이 조림 정도였으니.

보말도 거래가 되다 보니 예전보다 많이 줄어들었다고 한다. 보말 밭은 한정 돼 있고 수요는 늘어가고, 바다환경은 척박하고...

백중날이 아니어도 괜찮다. 제주에 사는 특권으로 썰물 때를 맞춰 바다에 갔다. 제주 바다에서만 가능한 일이라며 딸아이와 나란히 물에 잠긴 발 인증샷을 찍었다. 물속에 잠긴 맨 발이 파르라니 곱고 시원하다. 물이 빠지면서 삼각뿔 모양의 수두리보말이 보였다. 처음 접하는 딸아이는 나이가 무색하게 소리 지르며 즐거워했다. 모두가 사라진 건 아니었다.

두어 시간이 금방 흘렀다. 소쿠리에 담아 바닷물에 흔들어 씻으면서 작은 것들은 풀어주고 한 대접 정도 보말을 잡아 집으로 돌아왔다. 간혹 시장에서 사다가 맛 본 게 기억이 전부인 딸아이는 여전히 신통방통한 체험이라고 흥분을 감추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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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말조림. ⓒ 김정숙
보말 살이 끊어지지 않고 껍질모양의 나선형으로 쏙 빠지게 하려면 잘 삶아야 한다. 끓으면 물이 넘치지 않게 불을 조절하여 30분 이상 충분히 삶고 뜸을 들여야 살을 잘 낼 수 있다. 삶아서는 몇 개 먹지 않고 손을 놓는다.

예전의 우리들 입이 아닌 거다. 주섬주섬 까서 조림을 했다. 참기름에 간장 몇 방울 떨어뜨리고, 조청을 넣어 바글바글 끓이다가 보말을 넣었다. 불을 줄여 국물이 거의 없게 졸였다. 다 될 무렵 풋고추를 썰어 넣었다. 보말은 바닷물이 배어 있어서 간을 약하게 하고 물이 생기므로 물은 넣지 않고 졸인다. 바다향이 집안 가득 번진다.

보말조림은 밑반찬으로도 좋고 밥을 비벼 먹어도 훌륭하다. 보말은 감칠맛이 좋다. 찌개나 국, 칼국수처럼 육수를 내는 요리를 하거나, 죽을 끓여도 맛있다. 고사리와 맛 궁합이 좋아 같이 볶으면 별미다.

먹어야만 맛인가. 먹을 것만 생각하면 먹을 것만 보이지만 이제 넘쳐나는 먹거리와 우리의 철학은 그 경계를 넘어섰다. 바닷가에서 짠물 먹고 사는 보말뿐이겠는가. 한 입 먹을거리도 못되는 생명들과 교감 해보는 쾌감은 또 어떤가. 제 손으로 몇 개 잡아 보는 맛, 맑은 바닷물에 잠긴 발을 사진에 담고, 파도의 짓궂은 장난 좀 받아주는 여유가 오래오래 기억에 남는 별미 아닐까. / 김정숙(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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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숙 시인은 제주시 애월읍 납읍리 출신이다. 2009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조부문에서 당선됐다. 시집으로 <나도바람꽃>을 펴냈다. 젊은시조문학회, 한국작가회의, 한국시조시인협회, 제주작가회의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30여년 동안 제주도농업기술원에서 일하다 2016년 2월 명퇴를 하고 서귀포시 남원읍 수망리에서 귤 농사를 짓고 있다. <제주의소리>에 ‘제주 밥상 이야기’를 통해 제주의 식문화를 감칠맛 나게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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