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리숙한 농부의 농사일기> (20) 숲에 깃든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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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시 절물자연휴양림. ⓒ 김연미

직선과 직선 사이 햇살이 들어왔다. 무표정했던 수직이 밝고 부드러워졌다. 검게 굳어 있던 색깔이 잔잔하게 부서졌다. 부서지는 색깔은 갖가지 제 본색을 드러내며 숲속에 퍼진다. 맑고 가볍다. 햇살처럼 통통거리는 색깔이 숲속에 가득하다. 아직 사람들이 한산한 아침 아홉시. 혼자 멍하니 앉아 숲속의 느낌을 즐기기엔 안성마춤이다.

아침 숲속은 원초적이다. 세상의 때를 타지 않은 바람, 원시의 숲에 깃들어 있던 이슬, 이제 막 빛을 내기 시작한 태양, 자연의 일부임이 분명한 사람도 이곳에선 원시인들처럼 눈이 맑아지고, 작은 소리에도 민감하게 귀를 세울 수 있으며, 자연의 언어로 이들과 말을 주고받을 수 있다.

초록 모자를 쓰고 초록 옷을 입은 로빈훗과 그 부하들이 나무 기둥에서, 혹은 나무 꼭대기에서 불현 듯 내려와 내 앞길을 막아설 것 같다. 그들은 놀라는 나를 어르고 달래고, 장난을 치며 내 손을 잡고 노래를 부르고, 어깨를 토닥이며, 나를 나무 가지 위로 올려놓을 것 같다. 그들의 행동은 햇살처럼 가볍고 이슬처럼 맑다. 숲속은 그들의 영역. 바람을 타고 노는 나뭇잎처럼 나도 그들과 어울려 숲의 일부가 된다.

평상위에 하늘을 마주 바라보고 누웠다. 삼나무 숲이 남겨놓은 하늘 한 조각이 내 가슴에 내려앉는다. 손바닥만한 작은 하늘에 구름이 흐르고, 바람이 불고, 비행기가 날아간다. 틈틈이 새도 지나간다. 출렁이는 물처럼 삼나무 가지가 흔들리고, 가만히 올려다보노라면 약간의 멀미끼가 일어 눈이 감긴다. 바람이 살랑이고, 새가 울고, 주변이 조용해진다. 아차, 깜박 졸았다.

초등학교 동창들과 찾은 절물자연휴양림. 주변 산책로를 걷고 온다면서 일군의 친구들이 떠나고 몇은 그늘 아래 평상에 남아 앉기도 하고 눕기도 하며 마음껏 늘어짐을 즐기고 있다. 모두들 아침형 인간들인지 모임 시간을 아침 여덟시로 해 놓았다. 덕분에 한산한 주차장에 주차를 할 수 있었고, 수많은 평상들 중에서 마음에 드는 걸 골라 앉을 수 있었다. 

여름내 더위에 지친 몸과 마음을 풀어야 한다며 소집한 모임이었다. 아직 과수원 일이 다 끝나지 않아 참여에 약간 망설여지기는 했지만 정작 휴식을 제일 잘 즐기고 있는 나였다.

아랫동네에서 태어나 윗동네로 시집온 친구가 모임을 이끌었다. 유기농 귤까지 포함한 귤 농사에, 키위농사, 거기다 마을일까지 두루두루 살피며 사는 친구였다. 친정동네건, 시집동네건 친구 누구누구의 어머니 아버지들이어서 어느 한 사람 소홀히 지나칠 수 없는 형편이다. 작은 일 큰일 가리지 않고 동창 친구로서, 동네 이웃으로서 묵묵히 제 일처럼 해내는 친구였다. 작은 체구 어디서 그런 힘이 나는지 존경스럽기까지 하다.

작은 야유회 하나를 위해 일일이 전화를 걸어 근황을 묻고, 참석을 유도하고, 야유회 당일에도 끊임없이 회원들의 의견을 물으며 행사를 이끌어나가는 친구의 모습이 든든하다. 구성원들의 의견을 살피는 데 소홀히 하지 않는 친구가 있어서 우리는 편안하고 행복한 하루를 보낼 수 있었다. 이렇게 작은 모임에도 리더의 역할이 이렇게 중한데, 자치단체나 나라를 이끌어가는 지도자의 역량에 있어서는 더 말할 게 무엇이랴... 좋은 학력, 좋은 집안, 그런 거 다 소용없다. 누구를 위해서 일을 하고 있는지, 목적이 무엇인지, 분명한 사고와 정확한 방향성을 가지고 꾸준히 해 나가는 추진력, 그거면 족하다.

잠깐 친구의 농사 이야기를 들었다. 아직 초보 농부인 나에게는 이해되지 못하는 부분이 많았지만, 얼핏얼핏 그녀의 눈빛 속에 담긴 자부심과, 고난과, 힘겨움, 그리고 행복함은 충분히 감지되었다. 앞 뒤 따지지 않고 그저 자신에게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고, 거기서 행복을 찾아가는 친구. 그런 친구가 난 부러웠다.

배 고프다는 친구들의 성화에 느릿느릿 평상에서 일어났다. 그 그늘과 바람과 여유로움을 놔두고 속세의 뜨거움 속으로 들어간다는 게 영 내키지 않았지만 할 수 없는 노릇. 왁자한 웃음소리를 이끌며 산을 내려왔다. / 김연미(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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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미 시인은 서귀포시 표선면 토산리 출신이다. 『연인』으로 등단했고 시집 『바다 쪽으로 피는 꽃』을 펴냈다. 2010년 제2회 역동문학상 우수상을 수상했다. 젊은시조문학회, 한국시조시인협회, 제주작가회의 회원으로 활동 중이다. 최근 서귀포시 표선면 가마리에서 감귤 농사를 시작한 ‘초보 농부’인 그는 <제주의소리>에 ‘어리숙한 농부의 농사일기’를 통해 하루하루 직접 흙을 밟으며 겪은 일상의 경험들을 풀어놓을 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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