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세통Book世通, 제주읽기] (26) 래리 쉬너 『예술의 탄생』 고영자 미학자·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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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래리 쉬너 『예술의 탄생』김정란 옮김. 들녁, 2007.
아니 왠 ‘상상의 박물관’? 거기다 또 난데없이 ‘문화의 슈퍼마켓’은? 서평 제목치곤 왠지 고약하고 불친절해 보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마침내 그리고 감히 이런 제목을 달고 글을 시작해 본다.

이번에 소개할 래리 쉬너의《예술의 탄생》(원서: 2001년/번역서:2007년)의 경우는 그 이야기보따리를 푸는 데 생각보다 많은 에너지를 소모했다. 사실, 올해 본지에 문을 연 ‘Book世通’ 서평 쓰기 제안을 수락한 후, 그렇다면 ‘나’라면? 하면서 서평할 책 리스트 업 작업할 때부터 이 책은 나의 리스트 상단에 올려 둘 정도로 마음에 두고 있던 책이었다. 그러면서도 이 책은 필자의 연구분야에 속한 미학/예술학 세계를 정면으로 다루는 이론서라, 신문의 성격 상 자칫하면 장황하고 지루한 미학강의가 되버리는 것은 아닐까하는 조바심 때문에 몇 번이고 망설이며 다음으로 미루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다가 이 책은 패스하고 다른 책으로 할까하는 망설임도 몇 번 있었고. 

그런데 요즘 우리 사회에 ‘문화’니 ‘예술’이니 하는 말이 무성하고, 이에 따른 다양한 문화예술 행사, 프로젝트 등이 일상생활 속으로 파고드는 현상을 보면서 아무래도 이 책을 통해서나마 한번쯤 우리의 문화예술의 현주소도 짚어 볼 겸, 번역판 발간 당시(2007년) 반짝 소개되었다가 그 이후론 대중적 차원에서 거의 주목을 받지 못한 책의 핵심을 필자 나름대로 소개하는 것도 유익할 듯하여 드디어 이 책을 책장에서 꺼내 들었다.  

‘상상의 박물관(Musee imaginaire)’ 얘기부터 시작하자. 이 표현은 프랑스 문인이자 행동파 지식인인 앙드레 말로(Andre Malraux, 1901~1976)가 쓴 책 제목이다(초판:1947년, 재판: 1951년, 3판:1965년). 그의 ‘상상의 박물관’에서는 미켈란젤로가 몽테뉴에게 말을 건네고, 고야와 보들레르가 대화한다. 그는 ‘상상의 박물관’ 속에서 신화서사에서 회화로, 소설에서 영화로 종횡무진 가로지르며, 서로 상충하는 목소리들을 ‘다성적 화음’으로 변형시키며 독자로 하여금 자유분방한 지적 유희를 만끽하게 한다.

여기서 우리는 앙드레 말로가 프랑스 제5공화국 출범 당시(1959년), 대통령 샤를르 드골이 신설한 문화부의 초대장관으로 발탁되어 문화를 통한 강한 프랑스 이미지를 만들려는 문화정치를 펼쳤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사실, 앙드레 말로의 문화예술 사상은 고도의 지적·정서적 수준을 요구하는 귀족적·엘리트주의적 색채를 띠는데, 이는 20세기 첫머리부터 꿈틀거리기 시작한 ‘신예술(다다이즘, 아방가르드, 대량복제예술)’, 팝아트나 대중문화의 급진적 부상과는 상반된 흐름이었다. 

그런 이유로 프랑스 사상가들 사이에서 조차 앙드레 말로의 문화부를 일종의 ‘종교’라거나, 그가 각 지방에 의욕적으로 설립한 ‘문화의 집’을 지배계급의 일방적인 문화규범과 미의식을 보급하는 곳이라고 비꼬기도 했다. 이런 맥락에서 말로가 꿈꾸는 ‘상상의 박물관’이 얼마나 엘리트주의를 표방하고 있었는지 우리는 짐작할 수 있다. 

물론 우리는 앙드레 말로 개인의 귀족적·엘리트주의적 취향을 비판할 권리는 없다. 다만 시대의 흐름에 역행한 특정 예술체계를 보편적이라 보고 이를 국가문화정책 차원에서 모든 국민에게 적용하려던 발상이 독단적이고 시대착오적이었다는 점이다.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은 이러한 엘리트 부르주아 문화가 유럽에서 1960년대까지 지속되는 양상을 두고 ‘문화적 중세’라고 까지 꼬집기도 했다.

어쨌든 필자가 앙드레 말로의 ‘상상의 박물관’을 언급하는 이유는 순수예술의 이상과 제도들이 지닌 보편성과 기원을 믿는 사람들이 여전히 있고, 그로 인해 인종적·계급적· 성적 편견이 암암리에 정당화된다고 보기 때문이다.《예술의 탄생》저자 래리 쉬너는 여기서 말하는 ‘예술’을 18세기(대략 1680년~1830년로 저자는 잡고 있음)에 탄생한 발명품(invention)으로 본다. 그런데 그런 예술이 대부분 교양 있는 엘리트들에게는 “정신적 투자의 장”일지 몰라도, 애초에 “계급과 성에 대한 편견으로 특징지어진 근대의 편협한 구성물”(p.18)이었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여기서 새롭게 태어난 “순수예술(시, 그림, 조각, 건축, 음악)은 공예와 대중예술(구두제조, 자수, 대중소설, 대중음악 등)에 대립되는 개념이 된다. 공예와 대중예술이 쓰일 용도와 재미를 따지고 기술과 규칙만을 요구하는 반면, 순수예술은 영감과 천재성을 중요시하고 정제된 기쁨의 순간 속에 작품 자체를 즐기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나 19세기를 지나면서 ‘순수’를 빼고 단순하게 예술 대 공예, 예술 대 오락, 예술 대 사회로 구분했다.”(p.13) 

그러니까 고대 예술 체계에선 장인과 예술가의 구분이 따로 없었고, 그들의 이상적 특성은 천재성과 규칙, 영감과 재주, 혁신과 모방, 자유와 봉사가 결합된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특성의 조합은 “18세기 와서 마침내 분리되었다. 영감, 상상력, 자유, 천재성 같은 ‘시적’ 속성은 예술가에게 돌아갔고, 기술, 규칙, 모방, 봉사 같은 ‘기계적’ 속성은 장인에게 속한다고 보았다.” (p.169) 

이런 흐름 속에서 예술가와 장인이 구별되고 미학적 관심사가 실용성과 일상적 기쁨으로부터 분리되었다. 18세기 말에 이르면 문화적 제도들(박물관, 극장, 연주회장, 아카데미, 문학교과 과정)이 유럽 주요도시에 탄생한다. 순수예술을 위한 독특한 시장과 대중의 출현, 예술가(자유, 상상력, 독창력을 지닌), 취미, 관조적인 미의식 개념 등이 등장했다. 이들 요소야말로 무엇인가를 순수예술로 규정하는 데 중추적 역할을 하게 된다. 

거기다 칸트와 실러와 같은 철학 거장들의 ‘미학(aesthetica)’ 사상 또한 18세기 말에 발전을 거듭했던 근대 예술 체계를 정당화 시켜주었다. 이런 맥락에서 발명된 ‘예술’은 계몽주의로부터 등장한 다른 많은 개념들처럼 전인류적인 개념으로 받아들여졌다. 

여기서 예술작품은 특정한 장소나 목적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존재하며, (장인들과) 합작품이 아닌 예술가 고유의 창조물로 여겨진다. 그리하여 “오늘날 우리는 셰익스피어의 희곡을 문학선집에서 뽑아 읽는 것처럼, 르네상스 시대의 회화를 (원래 있었던 장소를 이탈하여) 전문 전시장에서 감상하고, 연주회장에서 바흐의 수난곡을 듣는다.”(p.12) 말하자면 과거 갖가지 역사와 사연을 담은 제작품일지라도 원래의 쓰임과 환경에서 벗어나 세련된 연주회장이나 미술관, 극장 등에서 조용하고 경건하게 주목받고, ‘미적’ 경험의 세계로 인정받아 왔던 것이다. 적어도 근대 예술 체계에서는. 하지만 그 확고해 보이던 예술체계도 20세기에 들어오면서부터 그 주도권을 잃고 말았다.

그렇다면 ‘문화의 슈퍼마켓(cultural supermarket)’은 어떤가? 이 말은 《모더니티의 다섯 얼굴: 모더니티·아방가르드·데카당스·키치·포스트모더니즘》(원서: 1987년)의 저자 마티 칼리네스쿠(Matei Calinescu, 1934~2009)가 창안한 것이다. 칼리네스쿠는 책에서 이 용어를 앙드레 말로의 ‘상상의 박물관’에 빗대어 20세기 예술 상황은 그 반대로 돌아가고 있다는 차원에서 역설적으로 썼다고 적고 있다. 이 시대는 그야말로 무엇이든 예술이라 부를 수 있는 세상이라 예술작품 또한 대형 슈퍼마켓의 상품들처럼 ‘문화의 슈퍼마켓’ 진열대에 매우 다양한 형태로 넘쳐나고 있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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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화의 슈퍼마켓(cultural supermarket)’ 개념을 창안한 마티 칼리네스쿠(Matei Calinescu)의
《모더니티의 다섯 얼굴: 모더니티·아방가르드·데카당스·키치·포스트모더니즘》 영어판 표지.
《예술의 탄생》저자는 20세기 들어 “무엇이든 예술로 치는 이런 폭발적인 현상의 이유 중 하나는 예술계가 스스로 ‘예술’과 ‘생활’을 다시 합치려는 오랜 주제를 택했기 때문”(p.10)이라고 말한다. 이 상황은 저자의 말대로 오래된 전통으로의 회귀인지, 18세기에 확립된 특정 예술제도, 근대미학의 종말인지 필자로선 단견하기 어려우나, 오늘날 예술(작품)과 일상생활의 분리를 극복하려는 시도임에는 틀림없다. 

여기서는 일상의 소소하고 잡다한 감정을 비롯하여 정치 이슈와 관련한 것까지도 오늘날 새로운 예술체계를 통해 ‘문화의 슈퍼마켓’에 등장한다. 퀼트, 애니메이션, 컴퓨터 그래픽, 게임, 디지털 아트, 판타지 영화, SNS 등등. 이들에겐 앙드레 말로의 ‘상상의 박물관이 중세 유적에 불과하다.

물론 20세기 들어 ‘상상의 박물관’이 ‘문화의 슈퍼마켓’으로 리모델링했다 해서 예술의 본질이 바뀌는 것은 아니다. 바뀌는 것은 단지 예술개념과 체계일 뿐이다. 저자 래리 쉬너는 예술, 예술가, 미의식과 같은 개념에 관련한 모든 역사에는 동시대 지적, 제도적, 사회경제적 변화가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유럽에서 18세기 성립한 근대 예술 체계의 구조를 “우리가 치유해야만 하는 분열된 상태”(p.19)로 보았다. 이런 맥락에서 필자에게 21세기 전지구적 차원의 예술체계의 구조는 “가치판단을 유보한 일상과 예술의 디지털식(또는 가상의) 조합과 해체의 반복적 요구”로도 읽힌다. 

어쨌든 이 책에서 저자가 예술을 “그저 하나의 개념이 아니라 이상과 실행, 제도들로 이루어진 하나의 체계(역사적 구성물)”(p.18)로 보고, 이들 체계는 공동체의 문화적인 관습을 결정적으로 지배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점은 눈 여겨 볼 필요가 있다. 이때 해당 예술체계가 어떤 개념으로, 누구에 의해서, 누구를 위해서, 그리고 어떤 네트워크로 작동하는가에 따라 해당 공동체 문화예술의 특성 또한 명확해진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제주 문화예술체계의 구축사와 현주소를 진단하는데도 어느 정도 이론적 토대를 제공하고 있다.

 ▷ 고영자(미학자·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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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대학교 탐라문화연구소 및 재일제주인센터 특별연구원

일본 오사카대학 대학원에서 미학(예술학) 전공으로 석사 및 박사학위 취득.
프랑스 파리사회과학고등연구소(EHESS) 연구원 역임.
부산대학교 예술대학 대학원 강사(미학) 역임.

현재, 근·현대 문화매체론, 제주미학론, 제주 ‘이미지’ 생성 및 변천사 등을 연구하고 있으며, 번역서로는 크리스틴 조디스 저《미얀마 산책》(2008년), 데이비드 네메스 저《제주 땅에 새겨진 신유가사상의 자취》(2012년),《서양인들이 남긴 제주견문록(1845~1926)》(2013년),《서양인들이 남긴 제주도 항해·탐사기(1787~1936)》(2014년), 《구한말 佛語·英語 문헌 속 제주도(1893~1913)》(2015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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