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세통Book世通, 제주읽기] (28) 한수산 『군함도』 /장이지 시인·제주대 국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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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수산 『군함도』창비.
한수산의 『군함도』는 그 띠지에서 ‘역사소설’을 표방하고 있다. 이 소설에서 작가는 일제강점기의 징용 문제나 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와 같은 역사적 사실을 그 중심에 두고 있지만, 어떤 역사적 위인을 중심으로 서사를 전개하고 있지는 않다. 그는 역사적 환원론에 의거하여 운명론을 늘어놓지도, 계보학적 방법에 기대어 ‘또 다른 역사의 가능성’을 그리지도 않는다. 그는 미처 역사가 다루지 못한 것, 역사에서 고의로 누락되었거나 지워진 것을 고고학적으로 발굴해내려는 태도를 취한다. 역사적 위인을 그리고 있지 않음에도 이 소설을 ‘진정한 역사소설’이라 할 수 있다면, 바로 저 고고학적 역사 기술의 태도에서 근거를 찾을 수 있다.

소설의 무대가 된 ‘군함도’와 나가사키 일대는 일본의 대표적인 재벌 기업 미쓰비시의 탄광과 주요 공장 들이 밀집한 지역이다. 미쓰비시는 일제의 욕망에 편승하여 전쟁의 고혈을 빨아가며 재벌로 성장했다. 그곳에는 일제에 의해 징용으로 끌려간 조선 민중들의 피도 당연히 섞여 있다. 그럼에도 일본과 미쓰비시가 이 어두운 역사를 인정하려 하지 않고 전쟁 피해에 대한 배상 책임을 소홀히 하고 있다는 점을 이 소설은 새삼 일깨우고 있다. 이 ‘악의 카르텔’은 ‘군함도’라고 하는 하시마의 별칭에서 이미 분명하게 드러난다. 하시마가 ‘군함도’라고 불리게 된 것은 섬 전체가 요새화한 데서 기인한다. 민간 기업이 운영하는 탄광섬이라기보다 바다 가운데 떠 있는 감옥과 같은 것으로 ‘군함도’는 묘사된다. 그 가장 높은 곳에 일본의 ‘신사’가 자리 잡고 있는 것도 상징적이다. 

‘신사’와 근대화된 설비, 음습한 아파트와 미로와 같이 얽힌 갱의 그로테스크한 결합은 이 소설의 초반 흐름에 결정적인 기여를 하고 있다. 그 그로테스크한 섬을 무대로 일제에 의해 징용되어 왔거나 감언이설에 속아 온 탄광 노동자들이 노무계를 중심으로 한 회사의 일본인들과 갈등을 일으킨다. 조선인 노동자들은 자유를 찾아 목숨을 걸고 섬을 빠져나갈 궁리를 한다. 그들 앞에는 거친 바다와 일제의 추격, 조선인에 대한 일본인들의 차별의식이 기다리고 있거니와, 많은 사람들이 그 앞에서 죽거나 잡히거나 한다. 탈출에 성공한 자들도 나가사키의 또 다른 군수공장으로밖에 흘러갈 곳이 없다. 그리고 그곳에 미국의 원자폭탄이 떨어진다.

이 소설에서 작가는 ‘징용’이 개인의 파멸에 그친 것이 아니라 가족의 해체로까지 이어졌음을 강조한다. 탈출에 실패하여 끌려와 취조를 받던 중 젓가락으로 일본인을 찔러 나가사키의 형무소에 수감된 ‘태복’과, 그를 찾아 혈혈단신 일본으로 건너와 헤매다가 겨우 나가사키에 이르러 조선인 노동자들의 중간 관리자가 된 그의 아들 ‘길남’의 이야기는 그 대표적인 예다. 그 아비를 찾으러 왔다가 일제의 자본에 포섭되어 그 아비와 같은 처지의 조선인 노동자들을 착취하고 감시하는 역할을 떠맡은 ‘길남’이 원폭의 아수라장에서 일본인들에게 버려져 죽음을 맞는 장면은 역사적 아이러니를 내포하고 있다.

이 소설은 ‘고향의 의미’에 대해서도 묻고 있다. ‘고향’은 조선인 노동자들이 그리워하고 궁극적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장소지만, 유곽의 여자로 팔려온 조선인 ‘금화’에게는 돌아갈 곳으로서의 고향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녀를 기다릴 사람들이 없는 곳을 고향으로 부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어떤 의미에서 태평양전쟁에 동원된 위안부들은 고향으로부터도 버려진 존재였다. 그들을 위안부로 팔아넘긴 사람들 중에 조선인도 끼어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애써 외면하고 있다. 거기에는 그녀들의 가족과 친지, 이웃 사람들이 포함되어 있는 경우도 있었다. 그렇게 팔려간 여성들이 돌아갈 곳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 ‘금화’가 한 남자에게 마음을 붙이고, 그 남자가 섬을 떠나게 되자 시름시름 앓다가 바다로 뛰어드는 장면은 단연 문제적이다. 

이 소설의 후반부는 원폭의 순간을 여러 인물들의 시점에서 반복하여 묘사하는 데 바쳐지고 있다. 소설의 서사는 중단되는 감이 있으며 르포에 가까운 것이 그 자리를 대체한다. 역사적 시간이 멈추어버린 이 비극적인 순간에도 조선인들은 차별로 인해 제대로 된 구호를 받지 못하고 방치되거나 심지어 살해되기도 한다. ‘군함도’에서 노동쟁의를 일으키고 나가사키에서도 탄광을 폭파할 계획을 세운 ‘우석’도 자신을 사랑한 ‘금화’의 뼈를 손에 꼭 쥔 채 죽어간다. 그는 집단의 힘에 의해 세계를 바꾸어 나가는 데서 자신의 이상을 찾았지만 원폭에 의해 모든 것이 끝나버린 셈이다. ‘우석’의 이상은 이 소설의 다른 주인공 ‘지상’에 의해 다른 방식으로 이어진다. ‘군함도’에서 탈출해 일본인의 도움으로 살아남은 ‘지상’은 원폭의 순간 살아남는다. 그는 다른 생존 조선인 징용공들을 이끌고 일본인들의 멸시를 받아가면서 구호 활동을 전개한다. 그는 ‘사람과 사랑’에서 희망을 찾는다. 

이와 같은 주제의식은 매너리즘적인 휴머니즘으로 흐를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되지 않았다. 그것은 ‘지상’이라는 인물이 ‘군함도’와 나가사키에서의 체험을 부정하지 않은 데 힘입은 바 크다. 가령 일제의 그 지옥과도 같은 시간을 부정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그것은 정당해 보이기까지 한다. 그러나 그것은 어쩌면 관념으로 흐르기 쉬운 일일지 모른다. 지옥과도 같은 시간 속에서도 인간과 인간은 관계를 맺고 사회를 형성한다. 위안부의 기억도, 징용공의 기억도 모두 아름다운 것은 아니고, 전체적으로는 잊고 싶은 일이 가득하겠지만, 우리는 그것을 전부 부정하는 일만은 하지 말아야 한다. 그것은 그분들의 삶을 부정하는 길로 이어져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엄혹한 시절에도 ‘사람과 사랑’이 전혀 없었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이 점을 ‘지상’은 말하고 있다.

『군함도』에서 한수산은 모든 등장인물에 이름을 부여하고 있다. 민중들은 근대적 지식과는 구분되는 생활의 지혜가 담긴 속설이나 속담, 관용구와 같은 것들에 의지하여 대화를 한다. 그 풍부한 입담이 오히려 ‘시적’인 느낌마저를 주며, 인물들을 향한 작가의 애착을 짐작하게 한다. 그리고 인간의 변전에 대비되어 묘사되는 소양강 언저리 고향의 자연은 이 소설이 지향하고 있는 ‘회복해야 할 질서’가 무엇인지를 조금 드러내 보여준다.

이 소설은 여러 개작의 과정을 거쳤다. 2009년 12월 일본어판이 먼저 세상에 나온 후로 다시 5년여 만에 한국어판이 나왔다. 이 소설은 그 역사적 시각의 온당함은 물론이고 한국어로 된 소설의 아름다움이나 감동의 면에 있어서도 근작들 중에서는 그 비교의 대상이 없을 정도로 훌륭한 작품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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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이지 교수

시인. 2000년 『현대문학』 신인추천으로 등단

김구용시문학상, 오장환문학상 등 수상

현 제주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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