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서귀포시 창작 오페레타 <이중섭>

서귀포시의 첫 창작공연 오페레타 <이중섭>에 대한 여론은 기대보다 우려가 높았다. 서귀포시가 야심차게 준비한 이중섭탄생100주년 기념 사업의 대표 프로그램으로 주목 받았지만, 지방자치단체(엄연히 따지면 행정시)가 얼마나 제대로 된 극작품을 만들 수 있을까라는 막연한 걱정과 함께, 지난 6월 17일 중간점검 목적으로 열린 하이라이트 공연은 이런 우려를 한층 키워놨다. 비록 주요 곡, 연기 일부만을 선보인 자리라 할지라도 내레이션, 노래 부르는 배우·연기자가 섞인 낯선 구성, 미완성이었던 무대 연출, 배우들의 숙련도 등 여러 면에서 많은 아쉬움을 남겼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하이라이트 공연에는 많은 서귀포시민들이 좌석을 채웠다. 그것은 서귀포의 대표 문화콘텐츠로 자리잡은 화가 이중섭, 시민의 세금으로 만든 첫 번째 창작공연이라는 기대를 업고 탄생할 작품이 부디 제대로 되길 바라는 마음이 모아졌기 때문일 것이다.

약 3개월이 흐른 9월 9일 오후 7시 서귀포예술의전당, 본 공연의 막이 올랐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변화는 제목이다. 6월까지 사용했던 <한국의 화공-중섭>에서 <이중섭>으로 간결해졌다. 

합창단과 관악단 배치로 사실상 ‘무대’를 생략했던 무대는 여러 표현이 가능하게끔 대폭 개선했다.

가장 바깥쪽에 이중섭의 은화지 작품 그림을 설치하면서 관객이 시작 전부터 집중할 수 있게 공간의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지난 공연에서 합창단과 관악단이 있던 안쪽은 낮은 높이의 단상이 놓이며 말끔하게 정리됐다. 가운데는 한 눈에 들어오는 직사각형 단상이 설치되면서 극 무대다운 공간을 창조했다.

관악단은 객석과 가까운 무대 아래에 자리 잡았고, 합창단은 배우로 출연했다. 외형적으로는 제 모습을 갖췄다는 인상을 주기 충분했다.

공연의 줄거리는 달라지지 않았다. 1937년 일본 유학 당시 이중섭과 마사코(이남덕)가 사랑을 싹틔운 순간부터, 이중섭이 가족과 떨어져 쓸쓸히 홀로 생을 마감한 1956년까지의 일대기를 그렸다. 불행했던 짧은 생애를 소개하듯 공연의 시작을 알리는 합창곡은 절대자에게 자비를 구하는 기도 <Kyrie eleison Kyrie eleison>(주여 불쌍히 여기소서, 주여 불쌍히 여기소서)이다.

결론부터 던지자면 <이중섭>은 <한국의 화공-중섭>과 아예 다른 공연으로 봐도 무방할 정도로 전혀 다른 느낌을 선사했다.

변화의 가장 큰 이유는 노래와 연기를 구분한 구성을 버리고, 노래를 맡은 성악가가 연기까지 소화했기 때문이다. 덕분에 진행이 단절되는 느낌을 상당부분 떨쳐냈다. 프로 성악가들의 일반 연기는 다소 어색했지만 지나친 정도는 아니었다. 오히려 노래 연기 비중이 높아지면서 <이중섭>은 오페레타 보다는 오페라에 가깝다는 느낌을 줬다.

미완성으로 남아있던 다양한 연출 역시 보강됐다. 시대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는 발레로 낯선 느낌이 강했던 무용은, 상체 위주의 부드러우면서도 절도 있는 동작으로 이전보다 자연스럽게 공연에 녹아들었다. 덕분에 이중섭과 마사코의 사랑, 이중섭의 죽음 등 중요한 순간마다 상징성을 표현하는데 사용됐다.

생전 이중섭이 남긴 명작을 무대 배경화면에 비추는 장치는, 한 단계 나아가 그림 일부분이 움직이는 기술로 발전하면서 신선하게 다가왔다. 무대 화면은 익히 유명한 작품뿐만이 아니라, 이중섭·마사코의 결혼사진, 세계 2차 대전 당시 폭격 영상, 은화지 제작 재현 영상 등 다양하게 활용하며 극의 완성도를 한층 끌어올렸다.

특히 이중섭과 마사코가 한국식 혼례복장을 입고 영원한 사랑을 약속한 네 번째 막 ‘우리가 이제 만났어도’에서는 실제 결혼사진이 화면에 등장하면서 객석에 커다란 감동을 선사했다. 

서귀포 생활 당시 식량으로 잡았던 게와 <서귀포의 환상> 작품 속 새 그림을 모형으로 제작한 것은 연극 <길 떠나는 가족>의 아이디어를 차용했다고 보여진다. 이중섭의 두 아들 태현, 태성의 매력을 뽐내고 잠시나마 행복했던 네 가족의 서귀포 생활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장치로 사용됐다.

화기애애한 이중섭의 개인전 분위기를 일순간에 얼어붙게 만드는 경찰, 이중섭에게 ‘빨갱이’라는 낙인을 찍어주며 결과적으로 그의 앞길을 막은 포대령도 짧지만 주어진 역할을 충분히 소화했다. 

합창단부터 아역, 조·주연까지 출연진들의 연기는 큰 흠을 찾기 어려울 정도로 빼어난 호흡과 역량을 자랑하면서 관객들의 환호성을 이끌어 냈다. 이동호 지휘자가 이끄는 서귀포관악단 역시 마찬가지다.

무엇보다 서귀포합창단이 <이중섭>을 완성한 알파이자 오메가라고 평가한다. 단원 40여명은 피난민, 결혼 축하객, 중섭의 동료 등 매 상황에 맞는 복장과 소품을 갖추고 멋진 연기를 선보이면서 무대를 꽉 채우는 존재감으로 최고의 활약을 펼쳤다.

<이중섭>은 연출, 연기, 기술, 연주 등 모든 면에서 기대 이상의 진보를 가져왔다. 관객들은 제작진, 출연진에게 열화와 같은 박수를 보내며 그 동안의 노력에 화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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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귀포시 창작 오페레타 <이중섭>이 9일 서귀포예술의전당에서 공연됐다.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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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귀포시 창작 오페레타 <이중섭>이 9일 서귀포예술의전당에서 공연됐다. ⓒ제주의소리

한 단계가 아닌 몇 단계 이상 발전한 공연이지만 다소 아쉬운 부분도 눈에 띄었다.

연출은 연출자 고유의 영역임을 먼저 밝히면서, 피날레에서 무대 맨 위에 올라 당당하게 고개를 들고 서 있는 이중섭에게 마사코와 두 아들이 절을 올리는 장면은 쉽게 납득이 가지 않는다. 이중섭은 영웅도 아니고 칭송받는 인물도 아니다. 초라하지만 누구보다 순수했던 예술가이기에 가족 옆을 편안히 지키는 마무리가 보다 ‘이중섭’다운 면을 보여주지 않을까하는 주관적인 아쉬움이 있다.

마사코 어머니는 주체적이다 못해 지나친 자신감이 부여된 여인으로 묘사됐다. 마사코의 순정과 이별을 보다 극대화하기 위한 캐릭터 성이라고 이해할 수 있지만 많은 남성들에게 ‘여신’이라는 이질적인 단어로 칭송받는 모습에서는 비현실적인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일본 본토 폭격으로 마사코의 안위를 걱정하는 이중섭이, 곧이어 어머니에게 결혼을 승낙 받고나서 활짝 웃으며 기뻐하는 모습은 보는 이의 고개를 갸우뚱 하게 만든다.

극 중 이중섭은 작업실이나 그림 그리는 장면에서도 미술 도구를 가지고 나온 적이 드물다. 서귀포 주민 ‘섬이’는 깨끗한 높은 구두를 신고 연기했다. 보다 정교한 소품 사용은 몰입감을 배가시킬 수 있다는 작은 생각을 더한다. 한 막이 끝나면서 주연들이 노래를 마치고 퇴장할 때 무대에 인사하지 않고 끝까지 연기를 이어간다는 자세로 신중히 퇴장하는 바람도 더해본다. 마이크와 조명도 일부 옥의 티를 남겼다.

첫 공연 연주는 서귀포관악단이 맡았지만 추후에는 관현악을 도입할 필요성이 있다. 실력 문제가 아닌 태생적 악기 특성을 고려한 측면이다.

지난 6월 하이라이트 공연이 끝난 뒤, 대본을 쓴 이영애 작가는 기자에게 “연기, 무대미술, 장치 등 많은 부분에서 더 좋은 모습으로 갖춰나갈 예정이다. 기대해주셔도 좋다”고 밝혔다. 결국 그녀의 포부는 허언이 아니었음이 증명됐다. 

오페레타 <이중섭>이 던지는 메시지는 사랑이다. 작가는 작품 속에서 이중섭이 비록 불행하게 삶을 마감했지만 진실하게 사람을 대했고 그림을 그렸으며 이 모두를 사랑했다고 말한다. 가족을 위해서라면 막노동도 마다하지 않고, 우정을 어느 것보다 소중하게 여기면서, 숨이 끊어지기 전까지 ‘우리 엄마’를 부르며 전쟁 피난길에 생이별한 어머니를 그리워한 애처로운 모습에서 ‘예술의 본질은 사랑’임을 강조한다. 그래서 <이중섭>은 감동을 선사한다.

서귀포예술의전당도 모자라 삼매봉 도서관까지 차량이 밀리도록 찾아와 <이중섭>의 탄생을 함께 해준 서귀포시민들은 멋진 ‘우리 공연’이 생겼다고 자랑해도 충분하다. 비록 여러 면에서 개선을 거듭해야겠지만 지역 대표 문화콘텐츠를 개발했다는 가능성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전국에서 지자체가 제작한 공연 가운데 가장 성공한 사례는 대구시와 대구국제뮤지컬페스티벌이 2011년 제작·초연한 뮤지컬 <투란도트>를 손꼽는다. 지금도 꾸준히 무대에 오르며 대구, 서울, 중국까지 수출되고 있다. 서귀포시의 <이중섭>이 <투란도트>를 넘어서는 순간이 오기를 기다리면서, 그동안 노력한 제작진, 출연진, 서귀포시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10일 오후 7시 30분에 두 번째이자 마지막 공연이 열리니 <이중섭> 무대가 궁금하다면 서귀포예술의전당으로 찾아가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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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귀포시 창작 오페레타 <이중섭>이 9일 서귀포예술의전당에서 공연됐다. ⓒ제주의소리

PS. 작품 속 인상적인 대목을 꼽으라면 이중섭 가족의 서귀포 생활을 그린 일곱 번째 막 ‘서귀포의 환상’ 중 한 장면이다. 서귀포 주민으로 등장하는 섬이는 “하늘이 내린 보석 같은 아름다운 낙원, 언제든 옵서예, 언제든 맘편히 옵서예, 혼저옵서예”라고 노래한다. 

이중섭의 서귀포 생활은 온 가족이 모인 만큼 정이 넘쳤지만, 끼니를 걱정할 정도로 경제적인 어려움도 컸다고 알려진다. 섬이의 대사는 얼른 이해되지 않았지만 제작자 입장을 고려해보니 이해(?)되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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