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리숙한 농부의 농사일기> (24) 유기농을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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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라봉 나무에 농약을 치고 있다. 농사를 지으면서 농약을 치지 않는 일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 김연미

여름순까지 돋아난 나무의 높이는 사람의 키를 간단하게 제압하고, 나무와 나무 사이 빈틈을 허락하지 않고 있다. 조심조심 심기를 건드리지 않겠다는 듯 몸의 유연성을 최대한 발휘하면서 나무 사이를 걷고 있다. 검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나무들, 포화된 초록이 제 색깔을 잃어버린 것일까. 초록빛을 잔뜩 머금은 이파리들이 그 한계치를 넘어 아예 검정색깔의 문턱을 넘어서려 하고 있다. 보호색처럼 둘러싸인 이파리 위 한라봉 열매들이 탐스럽다. 언뜻언뜻 향긋한 한라봉의 향기가 코끝을 스치고, 내 시선에 닿은 열매들이 뿌듯한 표정을 짓고 있다.

그러다 문득, 한라봉 향기에 섞여 들어오는 머리 아픈 냄새. 세상에 있는 기분나쁜 냄새들을 다 모아놓은 듯한 고약한 냄새가 정수리 끝까지 찌르며 들어온다. 농약냄새다. 슬며시 자리를 이동했다. 새순마다 가득 달라붙어 있는 진딧물을 없애기 위해 농약을 치고 있는 것이다.

며칠 전만 하더라도 보이지 않았던 진딧물이 오늘 아침에 와서 보니 새까맣게 달라붙어 있었던 것이다. 사람은 보이지 않은데 분수처럼 분무되고 있는 물줄기가 나무 사이를 세심하게 쏘아대면서 지나간다. 지나간 자리마다 뚝뚝 떨어져 내리는 물방울들, 그 물방울들이 새순에 달라붙어 있는 진딧물 덩어리들을 깨끗하게 씻어줄 것이라 믿는다.

명색의 농부가 농약을 한 번도 쳐보지 않았다면 그래도 농부라 할 수 있을까. 보름에 한 번, 적어도 한 달에 한 번 이상은 꼬박꼬박 약을 쳐야만 품질 좋은 과일을 생산할 수 있는, 그런 일을 하겠다는 사람이 말이다. 그나마 이건 평균적인 일이고, 날씨에 따라, 병충해 발생에 따라 몇 번이고, 시시때때로 약을 쳐야 하는 게 농부의 중요한 일 중 하나다.

사실 농사를 짓겠다고 할 때 가장 고민이 되었던 부분이다. 다른 것들은 다 할 수 있겠는데 농약 치는 것 만큼은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그새 지끈지끈 머리가 아파온다. 요즘은 살충제나 살균제에도 독성물질을 최대한 자제하는 추세여서 그 냄새가 덜 고약하다고 하지만 여전히 내게는 가까이 할 수 없는 냄새다. 덕분에 농약 치는 일은 고스란히 남편 몫이 되었다.

무농약과, 유기농 농산물을 꿈꿔보지 않은 농부가 얼마나 되겠는가. 생명을 연장하기 위해 먹는 음식물이 오히려 생명을 단축시키는 일이 된 지 어제 오늘이 아닌 지금. 내가 농작물을 키우게 된다면, 농약도, 화학비료도 사용하지 않는, 자연의 물과 공기와 바람만을 먹으며 자라는 농산물을 키워보리라. 그런 생각을 왜 해보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농사를 지으면 지을수록 그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절감한다. 창궐하는 병충해와 바락바락 악을 쓰며 달려드는 잡초들, 거기에서 농부의 몫으로 남겨지는 것이 얼마나 되겠는가. 화학약품과 화학비료를 사용하지 않고 병충해와 싸워 이길 수 있는 건 나 같은 어리숙한 농부가 꿈꾸기에는 어림없는 일이다. 남들보다 몇 배 더 강도 높은 노동과 신경을 쓰면서 농작물을 수확해도 제대로운 대가가 주어지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무농약과 유기농 농산물 생산을 포기하지 않는 수많은 농부들이 있다. 그들에게 존경과 응원을 보내는 것으로 만족한다. 언젠가 기회가 되면 나도 그들의 대열에 서서 한 몫을 담당해 보리라 하는 꿈의 한 가닥은 깊숙이 묻어두고 말이다. / 김연미(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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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미 시인은 서귀포시 표선면 토산리 출신이다. 『연인』으로 등단했고 시집 『바다 쪽으로 피는 꽃』을 펴냈다. 2010년 제2회 역동문학상 우수상을 수상했다. 젊은시조문학회, 한국시조시인협회, 제주작가회의 회원으로 활동 중이다. 최근 서귀포시 표선면 가마리에서 감귤 농사를 시작한 ‘초보 농부’인 그는 <제주의소리>에 ‘어리숙한 농부의 농사일기’를 통해 하루하루 직접 흙을 밟으며 겪은 일상의 경험들을 풀어놓을 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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