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밥상 이야기> (8) 곤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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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의 밭벼(산디). ⓒ 김정숙

‘곤밥’은 고운 밥이다. 보리밥이나 조밥과 달리 하얗고 고운 쌀밥이다. 쌀이 귀한 제주에서 쌀밥을 먹을 수 있는 날은 제사나 명절 때 뿐이었다. 제사나 명절을 기다리는 것은 순전히 곤밥 먹을 생각에서였다. 눈 비비며 일어나 제삿밥을 먹고 친척집을 돌며 여러 번 ‘곤밥’이라는 쌀밥을 먹을 수 있었던 날이 설이나 추석이었다.

곡식이 귀했던 제주에서 쌀로 만드는 송편은 추석음식이 아니었다. 교과서가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했었다. 제주의 떡 또한 모양이나 재료, 이름들이 독특하다. 한라산을 중심으로 동, 서 남, 북이 또 조금씩 다르다. 밀가루나 메밀가루를 이용하여 기증편, 새미와 인절미, 상외떡 중 어느 하나를 만들고 좁쌀이나 쌀가루로 시루떡을 만들었다. 쌀가루로는 절변, 솔변, 찹쌀로 기름에 지진 ‘우찍’이라는 걸 만들었다. 설탕이 들어가지 않은 떡들이라 그런지 밥보다 떡이 더 맛있었다고 기억되진 않는다.

텃밭에 벼를 심었다. 벼는 논에서는 물론 밭에서도 잘 자란다. 밭벼는 김 메기를 잘 해줘야 하고 논벼보다는 수확량이 적다. 처음 접하는 작물이라 그런지 텃밭은 벼를 잘 품어 주었다. 긴 장마, 폭염을 견디고 잔인한 혹명나방의 공작도 아랑곳없이 수줍은 이삭을 내밀었다. 제주에서는 밭벼를 ‘산디’라고 부른다. 가을로 가는 벼 이삭은 아름다움을 넘어 숭고하기까지 하다. 쌀보다는 짚이 필요하여 심은 벼를 어떻게 눈치 챘는지 참새, 직박구리, 비둘기가 번갈아가며 망을 보고 있는 중이다. 보리이삭은 탐하지 않으면서 벼이삭은 탐하는 걸 보면 새들도 쌀 맛을 아는 거다.

밥은 한식의 중심이다. 밥을 중심으로 반찬이 어우러지면서 한식은 완성된다. 반찬이 아무리 맛있어도 밥과 먹어야 맛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밥맛이 형편없으면 아무리 좋은 반찬도 밥맛을 구제하지는 못한다. 곤밥은 그중 제일 맛있는 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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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의 밭벼(산디). ⓒ 김정숙

밥은 힘이고 정이다. 밥은 밥만 먹지 않는다. 하다못해 맹물이라도 곁들여야 한다. 밥은 여럿이 같이 먹어야 맛나다. 밥을 먹으면서 서로를 알고 정을 쌓는다. 그래서 한솥밥 먹은 사람들은 혈연지기와도 같다.  

그러던 밥의 위상이 추락할 대로 추락한 때문일까. 더도 덜도 말라 던 추석이 의무감으로 다가와 스트레스로 넘는다. 더도 덜도 티 나지 않게 신경조절을 잘 해야 한다는 우스갯소리도 하면서.

곡식과 과일이 풍족하지 못하여 추석이라고 해도 재물에는 큰 의미를 두지 않았던 제주 사람들. 하지만 일가친척이 다 모여 집집마다 돌며 차례를 지내고 어르신들은 아이들에게 제몫의 떡을 받아주며 화목을 다지는 풍속은 육지와 사뭇 다른 제주의 모습이다.

추석의 백미는 이런 만남과 어우러짐이 아닐까. 하루하루 다르게 크는 후손들과의 만남, 땅속에 묻혀서도 포근한 조상님들과의 만남, 피와 살을 나누고 비빈 사람들의 만남이 추석이다. 행여 못 만난 사람이 있으면 달에게 말하면 된다. 한가위 달은 보고 싶은 얼굴을 다 데려다 주는 센스를 가졌다. 곤밥처럼 환하게. / 김정숙(시인)

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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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 시인은 제주시 애월읍 납읍리 출신이다. 2009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조부문에서 당선됐다. 시집으로 <나도바람꽃>을 펴냈다. 젊은시조문학회, 한국작가회의, 한국시조시인협회, 제주작가회의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30여년 동안 제주도농업기술원에서 일하다 2016년 2월 명퇴를 하고 서귀포시 남원읍 수망리에서 귤 농사를 짓고 있다. <제주의소리>에 ‘제주 밥상 이야기’를 통해 제주의 식문화를 감칠맛 나게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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