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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무를 다했다는 건 쓸모없음이란 낙인인가

김연미 33383331@hanmail.net 2016년 09월 24일 토요일 10:51   0면

<어리숙한 농부의 농사일기> (26)  의무를 다한 것들의 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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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무를 다한 비닐들. ⓒ 김연미

열매 묶기가 완료되었다고 해서 모든 일이 끝났다고 생각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얼마간의 여유는 있을 줄 알았다. 가끔 약이나 치고, 가끔 풀이나 뽑고, 그 정도. 그런데, 생각보다 일이 많다. 하우스 위 물홈을 청소하고, 부식이 되거나 녹이 슨 철제들을 찾아다니며 방청제를 바르고, 헐거워진 부분들을 다시 고정시키고... 봄부터 한여름까지 내부 일을 했다면 이제 본격적으로 비닐하우스 자체를 돌봐야 할 시기인 것이다.

태풍에 대비도 할 겸, 여름 온도를 맞추기도 할 겸 해서 걷어놨던 지붕 부분은 놔두고, 그 옆을 둘러쌌던 비닐을 내렸다. 한꺼번에 다 교체하기엔 버거운 일이라서 급한 부분부터 조금씩 교체해보려는 것이다. 철구조물에 올라가 단단히 고정되었던 핀을 풀어냈다. 디귿자로 만들어진 철제 홈 안에 비닐을 고정하고 있던 철사의 끝을 잡고 한 번에 확 잡아당겼다. 스프링처럼 들어가 있던 철사가 튕겨져 나온다. 그리고 그 안에서 외부의 힘에 눌려 있던 비닐이 슬그머니 몸을 부풀리며 빠져나온다. 압박으로부터의 해방이다. 그러나 그 해방의 감정에 기쁨이나 흥분은 없다. 느릿느릿 제 몸을 털며 주위를 둘러보는 표정이 복잡하다. 그런 비닐을 멋도 모른 바람이 와서 툭툭 건들어 댄다. 

애초 투명하고 고운 빛깔의 비닐이었을 터, 2,3년 똑같은 자세로 눈비와 바람과 차가운 공기를 막아내느라 불투명하고 얼룩진 얼굴이 되어 버렸다. 나이들어 간다는 건 세상의 때를 묻히는 일이라던 어느 책 한 구절이 생각난다. 습기가 빠지지 않아 늘 흥건했던 가슴 한쪽과, 굴곡진 삶의 한가운데서 꾸부정하게 굽어버린 허리가 바람에 자유롭다. 주름살 사이사이 깊숙하게 들어앉았던 찌든 때들도 허공으로 흩어진다. 그동안 삶을 불편하게 했던 것들이 핀 하나 풀어냄으로써 말끔히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왜 이렇게 슬픈 표정일까. 팽팽하게 당겨졌던 의무라는 줄 한끝을 놓친 이들의 표정이 저러할까. 붙잡는 것도, 붙잡을 것도 없는 비닐 한쪽이 상실의 표상처럼 아래로 머리를 내려뜨린다. 의무를 다했다는 건 쓸모없음이란 낙인이 찍히는 것인가. 이제는 그 형체조차 바람에 다 내어준 비닐 귀퉁이 얼룩진 얼굴 위로 자꾸 다른 이의 얼굴이 오버랩 된다. 주름진 얼굴에 눈동자가 슬프다. 그러나 굳이 그 이름을 부르지는 않으려 한다. 겨우 비닐쪼가리 몇 개 걷어내면서 감상적으로 불러도 되는 이름은 아니기 때문이다.

더 이상 수행해야 할 의무가 남아 있지 않은 비닐들을 난 조심성 하나 없이 잡아당기고 있다. 머릿속이 복잡해질 땐 몸을 움직이는 게 제일 좋다. 팔에 힘을 쏟는다. 몸 가운데를 뚫고 선 철제를 빠져 나오기 위해 비닐은 비명 하나 없이 제 몸을 갈랐다. 마지막 아픔처럼, 마지막 저항처럼. 출렁이는 비닐의 단면, 제 운명을 짐작한 것들의 저항은 오래가지 않는 법이다. 구겨지고 찢긴 비닐들이 사체처럼 바닥에 쌓였다. / 김연미(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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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미 시인은 서귀포시 표선면 토산리 출신이다. 『연인』으로 등단했고 시집 『바다 쪽으로 피는 꽃』을 펴냈다. 2010년 제2회 역동문학상 우수상을 수상했다. 젊은시조문학회, 한국시조시인협회, 제주작가회의 회원으로 활동 중이다. 최근 서귀포시 표선면 가마리에서 감귤 농사를 시작한 ‘초보 농부’인 그는 <제주의소리>에 ‘어리숙한 농부의 농사일기’를 통해 하루하루 직접 흙을 밟으며 겪은 일상의 경험들을 풀어놓을 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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