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세통Book世通, 제주읽기] (32) 정세랑 『보건교사 안은영』/장이지 시인·제주대 국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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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세란 『보건교사 안은영』민음사.
오쓰카 에이지(大冢英志)는 일본 소설사를 ‘자연주의적 리얼리즘’과 ‘만화 애니메이션적 리얼리즘’으로 대별하여 설명하는 독자적 시각으로 알려져 있다. 이 용어법은 다소 편의주의적인 것으로 기존의 문예사조사적 지식과는 배치되는 면이 있다. 단순하게 말해도 된다면, 전자는 ‘현실’을 재현하는 수법이고 후자는 ‘만화나 애니메이션’을 재현하는 수법이라고 할 수 있다. 사소설(私小說)을 중심으로 한 본격소설이 대체로 전자에 대응되는 것이라면, ‘캐릭터소설’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흐름은 대체로 후자에 대응된다. 서브 컬처 영역의 라이트노벨이나, 대중문학으로 분류되어 온 장르문학의 본격문학으로의 유입과 같은 새로운 흐름을 설명하기 위한 고심이 이 명명에서는 느껴진다. 

각설하고 한국에서도 ‘만화 애니메이션적 리얼리즘’이라고 할 만한 경향이 힘을 얻고 있다. 김성중이나 배명훈 등의 활약은 괄목할 만한 것이었다. 정세랑의 『보건교사 안은영』(2015)도 이 흐름에서 중요한 작품으로 꼽을 만하다. 정세랑의 터치가 일층 명랑 만화적이어서 다소 가볍고 경쾌한 느낌이긴 하지만 말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 ‘안은영’은 거대한 어둠의 에너지를 봉인하고 있는 남녀공학 사립학교의 보건교사로 오컬트적인 능력의 소유자다. 그녀에게는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는 능력이 있다. “은영이 보는 것은 일종의 엑토플라즘, 죽고 산 것들이 뿜어내는 미세하고 아직 입증되지 않은 입자들의 응집체”(14면)다. 그녀는 그것들 중 사악한 에너지들을 무지개색의 장난감 칼과 비비탄을 내뿜는 장난감 총으로 흩어내는 비밀 임무를 수행한다. 여기에 학교 재단가의 일원인 한문교사 ‘홍인표’가 가담하여 학교를 둘러싼 어두운 에너지와 대결해간다는 것이 이 소설의 큰 줄거리다.  

여성과 ‘괴력난신(怪力亂神)’을 결부시키는 상상력은 그리 낯선 것이 아니다. 여성이야말로 전통적으로 이야기꾼의 역할을 맡아왔다. 더욱이 ‘안은영’은 보건교사로서 학생들의 상담역이기도 하다. 각종 고민(=이야기)이 흘러들어가는 장소로서 보건실은 그 의미가 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보고 느끼지 못하는 것을 보고 느낀다는 것은 그것이 비록 괴력난신의 어두운 것이라고 해도 ‘감수성’을 하나의 덕목으로 생각하는 여성들에게 있어 무의미한 것이 아니다. 여성과 오컬트적인 것이 자주 맞물리는 데는 그러한 이유도 있다.

학교가 괴담의 진원지가 되고 있는 것도 알기 쉬운 부분이다. 학교는 현실 사회와 분리되어 있고 독자적인 질서에 따라 움직이는 폐쇄성을 띤다. 그 폐쇄성은 이야기가 무르익기에 유리한 조건이다. 아이들은 학교 시스템이 부가하는 스트레스를 어두운 이야기에 전가한다. 그들은 자기들만의 신화를 만듦으로써 폐쇄공간에서 살아남은 ‘영웅’이 되어 현실 사회로 개선(凱旋)한다. 이 소설에서 작가가 ‘조슈아 장’과 ‘래디’라고 하는 연예계의 캐릭터를 등장시키고 있는 것도 비슷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연예계야말로 학교처럼 폐쇄적인 사회이기 때문이다. 

『보건교사 안은영』이 여러 면에 있어서 낯익다는 점은 이제까지의 논의로 어느 정도 밝혀졌다. 그것은 TV 드라마나 서브 컬처의 전형적인 설정 들을 답습하고 있는 데서 기인한 익숙함으로 여겨진다. 그럼에도 이 소설은 기존의 소설 이론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새로움이 있다. 캐릭터의 성격화에 있어 기존의 소설들은 많은 공을 들인다. 그것은 외양묘사는 물론 인물들 간의 갈등 등을 통해서도 이루어지곤 한다. 그런데 이 소설에서 정세랑은 매우 손쉬운 방법을 사용하고 있다. 한문교사 ‘홍인표’는 학교 재단가의 일원이라거나 다리를 전다거나 하는 정보와, 한문 지식이 있다는 정도만으로 성격화가 끝난다. 전학생 ‘박혜민’은 얼굴이 둥글고 입술이 붉으며 매점에서 자주 목격된다고 하는 정보만으로 간단히 규정된다. ‘혜민’ 스스로는 자신이 ‘NPC(non-player character)’가 아닌지 의심하고 있다는 설정도 있다. 이러한 편의주의가 이 소설의 ‘만화 애니메이션적’ 상상력의 일단을 만들고 있는 것은 흥미롭다. 

이 소설은 아마도 ‘키덜트’들을 위한 동화라고도 할 수 있을지 모른다. 결국 이야기는 ‘연애’로 귀착한다. 표지에 버젓이 ‘장편소설’이라고 적혀 있지만, 그보다는 ‘연작소설’이라고 해야 맞는 게 아닌가 싶다. 기존의 소설 이론에서는 ‘소설 미달의 형식’으로 부를 법하다. 작가는 어찌 보면 사춘기 소년 소녀 들을 포함하여 젊은이들의 방황과 고민이라고 하는 사소할 수도 있는 이야기에 오컬트의 옷을 입혀 늘어놓고 있다. 그 사소함을 보완하기 위해 역사교과서 문제라든지 대기업의 가족사 같은 문제를 슬쩍 건드리는 방식을 취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이렇게 단지 ‘건드리고 가는 것’은 정면 승부 같지 않아서 아쉬움을 남긴다. 

그럼에도 정세랑의 허허실실은 우리를 즐겁게 한다. ‘작가의 말’에서 그녀는 오로지 ‘쾌감’을 위해 이 소설을 썼다고 밝히고 있다. 실제로 이 소설은 독자들을 유쾌하게 한다. 적어도 그녀의 소설에는 몇 십 년이나 된 갈등이 해원굿 같은 것 한번으로 사라진다든지 하는 위선은 없다. 그동안 한국소설은 지나치게 진지했다. 그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 진지함을 독자들에게까지 강요해왔다는 것이 좋지 않았다. 신경숙 표절 사태가 많은 독자들에게 준 실망감의 근저에는 저 강요된 진지함이 가로놓여 있었던 것이나 아닌지. 독자들은 눈치 보는 일 없이 재미없는 소설에 대해 재미없다고 말할 권리가 있다. 그것이 아무리 옳고 선한 내용을 담고 있더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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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이지 교수

시인. 2000년 『현대문학』 신인추천으로 등단

김구용시문학상, 오장환문학상 등 수상

현 제주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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