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기 위해 숨을 멈춰야만 하는 여인들이 있다. 온종일 숨을 참은 대가는 이승의 밥이 되고, 남편의 술이 되고, 자식들의 공책과 연필이 되었다.'

영화 <물숨>의 시놉시스 일부다. <물숨>은 지난달 29일 전국의 영화관 71곳에서 개봉했다. 개봉 준비로 한창 바쁜 고희영(50) 감독을 개봉 이틀 전인 27일 서울 용산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인터뷰 도중 배급사인 (주)영화사 진진의 장선영 차장도 인사차 방문했다.

최고의 제작진이 의기투합한 영화, 그 힘은 재능기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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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물숨> 고희영 감독ⓒ 오마이뉴스 김영숙.
<여명의 눈동자> <모래시계> <태왕사신기>에서부터 지난해 방영된 <힐러>까지 수많은 히트작을 만든 작가 송지나와 재일교포 2세로 일본에서 활동하는 피아니스트이자 뉴에이지 음악 작곡가인 음악인 양방언이 이 영화에 힘을 합쳤다. 양방언은 2014년 소치 동계올림픽 폐막식 공연 음악감독으로 명성을 알렸다.

"이 영화를 보고 뜨거운 무언가가 내 안에서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며 예고편 내레이션에 참여해 <물숨>을 응원하고 있는 배우 채시라와 '행복을 그리는 작가'로 알려진 스페인 출신의 에바 알머슨(Eva Armisen)도 이 영화제작에 힘을 보탰다. 에바는 우리나라 여러 기업과 협업해, 대중들에게도 그녀의 그림은 익숙하다. 

무슨 조화(造化)이기에 세계적으로 유명한 예술인들이 이 영화에 함께한 걸까?

"송지나 작가는 제 멘토예요. <SBS>의 '그것이 알고 싶다'라는 프로의 선배작가이기도 하죠. 송 작가는 고등학교까지 제주에서 자라 제주도 정서를 잘 알 것 같기도 했고요. 2008년 6월에 영화작업을 시작했고, 2009년에 송 작가를 찾아갔어요. '해녀' 관련 영화를 만들려하고 5년 정도 걸리는데 작가로 함께 참여해 달라고요."

송 작가는 흔쾌히 승낙했다. 그러나 약속한 5년을 훌쩍 넘어 7년의 촬영과 후반 작업 2년까지, 영화를 완성하기까지 약 10년의 세월이 흘렀다. <여명의 눈동자>에서 열연한 배우 채시라도 송 작가와 인연으로 <물숨> 예고편 작업에 함께했다.

"제 영화는 음악이 중요해요. 어느 날 양방언씨 음악을 듣는데 음악에서 바람소리가 들려 소름이 끼쳤어요. 아버지 고향이 제주라던데 그의 유전자에도 제주가 담겨있나 봅니다."

고 감독은 서울 종로에 있는 양씨의 소속사를 찾아갔다. 그때가 소치 동계올림픽 음악감독으로 활동할 때라 불가능하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고 감독은 '7년간 영화촬영을 했는데 10년이 걸려도 좋으니 기다리겠다'고 했다. 소속사 관계자는 어이없어했고, 이 얘기를 전해들은 양씨는 고 감독을 찾아와 영화를 보고 함께하겠다고 했다.

에바 알머슨이 <물숨>에 관심 있어 한다는 얘기를 들은 고 감독은 개봉 전에 영화를 보여줬고, 에바는 이메일로 '영화가 감동적이다. 도와주고 싶다'라는 장문의 글을 보내왔다. 세계적인 예술가의 호의에, 고 감독은 한국의 해녀를 알리고 싶어 에바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비매품으로 만든 기념품 몇 가지에 에바한테서 받은 해녀 그림을 넣은 것이다. 에바의 그림이 행복을 전해준다는 느낌을 받은 고 감독은 전 세계 어린이들에게 읽힐 수 있는 해녀 동화책을 만들자고 에바에게 제안했다. 에바의 동의로 '물숨'을 동화책으로도 조만간 만날 수 있다.

고 감독과 함께한 이들은 모두 재능기부로 참여해 영화의 의미를 더 살렸다.

'수평선'이 싫어 떠난 제주에서 삶의 진실을 찾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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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물숨> 스틸 컷ⓒ 영화사 진진
제주 출신의 고 감독에게 제주 바다의 '수평선'은 넘을 수 없는 선이었다. 스물넷에 겨우 '뭍으로 탈출'에 성공한 그녀는 <SBS>의 '그것이 알고 싶다' 작가로, <KBS>의 'KBS 스페셜' 프로듀서(PD) 등 독립PD로 활동하며 다큐 100여 편을 찍었다.

"새로운 아이템을 찾아 중국의 여인국을 취재할 때였어요. 그곳에서 미국인 여행가를 만났어요. 당연히 알 줄 알았던 한국과 제주, 제주의 해녀를 모르더라고요. 제주도에 살 때 관공서에서 해녀의 세계화를 강조해, 외국인들도 알 거라고 생각했죠."

'해녀는 이러저러한 사람이다'고 설명하니, 그 여행가는 '맨몸으로 어떻게 그럴 수 있나? 해녀는 플라스틱 허파라도 달았나?'라고 반문하며 고 감독을 거짓말쟁이로 여겼다. 그림을 그리면서 자세히 알려주니 '여인국을 취재할 게 아니라 네 고향을 취재하라'는 조언까지 했다.

언젠가는 해녀에 관한 영화를 만들겠다는 막연한 사명감을 갖고 있던 고 감독에게 위기와 기회가 함께 찾아왔다. 미국인 여행가로부터 충고를 들은 몇 년 후 암 진단을 받은 것이다. 싫었던 고향이, 고향 바다가 갑자기 보고 싶었다. 해녀가 없는 바다는 바다가 아니었다. 그만큼 익숙했지만 어렸던 고 감독의 눈에는 해녀가 없었다. 그러나 아픈 몸으로 본 해녀들이 신기했다. 어떻게 죽음을 불사하고 저렇게 뛰어들 수 있는지, 하루 종일 그들의 자맥질을 바라봤다. 그리고 결심했다. '해녀들의 삶을 영화로 만들자'.

그러나 제작과정은 가시덤불의 연속이었다. 무려 7년간 촬영했는데, 초반 2년은 카메라를 해녀들에게 들이대지도 못했다. '그것이 알고 싶다'를 촬영하며 온갖 흉악범을 만나 본 베테랑이지만, 더 어려웠다. 제주가 고향이고 제주 사투리를 완벽하게 구사하는 그녀에게도 해녀들은 곁을 주지 않았다.

"해녀는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빈 몸뚱이 하나로 살아가는 천한 직업이라는 인식이 강했어요. 그 뿌리 깊은 편견은 아직도 남아있어 카메라에 강한 거부반응을 보인 거죠."

실제 일본의 한 방송국 다큐멘터리 제작팀의 경우, 해녀들이 카메라를 던져 박살내는 일을 겪기도 했다. 그렇게 2년을 기다린 고 감독에게 손짓을 해온 언니가 있었다.

"추운 겨울이었는데 내가 불쌍해보였는지 와서 불 좀 쬐라고 하는데 눈물이 나더라고요. 그 언니가 바다에서 나올 때까지 7시간을 기다려 연락처를 받았죠."

그녀 이름은 이순옥(52)이다. 이씨는 자신의 직업을 떳떳이 여기며 사랑한다. 바다로 갈 때 화장을 하고 귀걸이까지 하고 집을 나선다. 바다에 들어가면 씻기고 잠수복에 가려질 텐데 왜 굳이 단장하는지 의아할 수도 있지만, 잠수복 속에서 청춘을 보낸 이씨에게는 이보다 더 중요한 외출이 없다. 그래서 바다로 나갈 때 늘 자신을 정성스레 가꾼다.

제주도 해녀들 가운데 가장 폐쇄적이라는 우도 해녀들은 그렇게 조금씩 고 감독에게 마음을 열었다. <물숨> 제작팀은 '폐쇄적인 해녀사회 속을 장기적으로 촬영하고 접근할 수 있었던 다큐멘터리는 아마도 우리가 유일할 것'이라고 자부한다. <물숨>이 호평 받는 장점 하나는 영화 속 바다의 모습이다. 고 감독은 지상 촬영 위주의 피상적인 해녀들의 모습에서 벗어나 수중과 지상을 5대 5의 비율로 촬영해 해녀들의 삶의 진실에 다가가려고 애썼다.

"그만 두고 싶지 않았냐고요? 글쎄요. 제가 아프면서 깨달은 건, 죽음은 두렵지 않지만 인생은 유한하다는 것이에요. 평생을 살 것처럼 인색하고 대충 사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할 수 있는 의미 있는 일을 하자는 생각을 했어요. 제주사람인 내가 영화를 찍는데도 이 정도로 힘들면 다른 사람들은 불가능하다고 봐요. 그러면 영영 해녀의 삶은 기록할 수 없겠다는 책임감과 의무감이 커서 그만 둘 수 없었어요."

'물숨'은 욕심을 다스리지 못하는 욕망의 상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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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물숨> 포스터ⓒ 영화사 진진.
"80대 노장 해녀들은 바다의 여전사들 같아요. 젊은 해녀들이 바다에 갈 때 그분들이 하는 말이 있어요. '욕심내지 마라. 만약에 나올 때 전복이 보여도 네 것이 아니다. 너희 숨만큼만 있다 와라' 욕심을 내서 내 숨을 넘으면 바다는 나를 삼킬 수 있지만 욕심을 자르고 내 숨만큼만 살면 인생을 행복하게 살 수 있겠구나. 저는 이 영화를 찍으면서 이 말을 건졌어요."

해녀들은 자신의 숨의 한계를 알고 있기에 숨의 마지막에 이르기 전에 바다를 나온다. 그러나 남보다 더 빨리, 더 많이 가지려고 자신의 숨을 넘어서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힌다. 그 욕망을 다스리지 못하고 숨을 넘어서는 순간 먹게 되는 숨이 바로 '물숨'이다. 그래서 '물숨'은 잘라내지 못한 욕망의 상징이며, 해녀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것이다. 선배해녀가 후배들에게 가장 주의를 주는 것도 바로 '물숨을 조심하라'는 것이다.

"영화를 찍은 지 3년쯤 될 때 어떤 분이 말하는 '물숨' 얘기를 들었어요. 그런데 그 말을 못 꺼내게 하더라고요. 금기어래요. 욕망의 숨이 '물숨'이란 걸 깨닫는 순간 내가 살아온 인생이 물숨처럼 욕망의 바다에서 허우적대는 게 보였고 해녀들의 바다 속 이야기를 내 얘기처럼 느꼈어요."

해녀들은 남편의 눈치는 안 보지만 바다의 눈치를 본다. 그녀들은 '바다는 욕심만 내지 않는다면 다 준다'고 말했다.

"그분들의 가슴에는 바다가 있어요. 자신이 아무리 힘들어도 욕심만 내지 않으면 바다는 친정엄마처럼 다 준다고 말해요. 한평생 자신을 먹여 살린 바다에 대한 경외심과 고마움을 잊지 않는 해녀들을 보면서 '나는 내 인생에서 이렇게 고마워해본 적이 있나?'라고 자문했어요. 병에 걸려 원망하는 마음이 컸는데 영화를 찍으면서 많은 위로를 받았습니다."

영화 보고 '해녀에 대한 편견 버렸다'는 말에 보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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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물숨> 스틸 컷ⓒ 영화사 진진.
<물숨> 시사회를 서울 압구정과 제주 두 곳에서 했다. 서울 시사회 때 해녀 몇 분을 초청하고 싶어 물질 날짜를 보고 잡았다. 해녀들은 누구의 말도 안 듣고 바다의 말만 듣는단다. 물질을 해야 하는 날에는 어디에도 안 가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사회 당일 풍랑주의보가 발령돼 오지 못했다. 제주 시사회 때 영화를 본 해녀들이 영화를 보는 내내 물질을 하고 나온 것 같다며 바다 장면이 나오면 같이 숨을 참느라 힘들었다고 했다. 자신들의 이야기를 잘 담아 고맙다는 말과 함께.

"제주시에서 해녀정책을 담당하는 공무원한테 문자가 왔어요. <물숨>을 보고 자신을 반성하면서 두 번 울었다고요. 해녀들에 대한 편견이 있었는데 이제 균형을 잡았다고 해서 보람을 느꼈습니다. 제주 기자들도 영화를 보고 생각이 많이 변했다고 하더라고요."

17회 전주국제영화제에서 2관왕을 수상한 <물숨>은 지난해 2015 인천다큐멘터리포트 러프컷 세일 선정작이 된 후 스위스 메이저급 배급사와 계약을 맺었다. 이탈리아와 스웨덴 공영방송에도 판매돼 조만간 방영될 예정이며, 15개국과 협상 중이다.

인천 서구 검단에서 18년째 살고 있는 고 감독은 기회가 된다면 인천에서도 다양한 활동을 하고 싶다고 말한 뒤, 영화 <물숨>으로 인천에서 불러준다면 언제든지 달려가겠다고 했다. 

# 이 기사는 <오마이뉴스>와 업무 협약에 따라 게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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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행복을 그리는 작가’ 에바 알머슨은 그림을 재능기부 해 기념품에 그녀의 그림을 넣어, 시사회에 온 사람들에게 나눠주었다.ⓒ 오마이뉴스 김영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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