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로 터전을 옮기는 이주민의 숫자가 한해 1만명을 훌쩍 넘어서고 있다. 특히 이들 중에는 적지 않은 문화예술인들이 청정한 자연환경에 매료돼 바다 건너 제주로 향한다. 여기에 제주사회는 자연, 사람, 문화의 가치를 키우자는 분위기가 그 어느 때보다 뜨겁다. 유례 없던 이런 변화 속에 제주문화의 미래를 고민하는 목소리 역시 높다. 전통과 변화 사이에서 제주문화의 정체성을 지켜내면서 끊임없이 진화해야 하는 상황이다. 이런 고민을 녹여내기 위해 제주출신 양은희 건국대학교 글로컬문화전략연구소 연구교수가 [제주의소리]를 통해 '양은희의 예술문화 이야기'를 연재한다. <편집자 주>

<양은희의 예술문화 이야기> (18) 중앙로 아트스페이스 씨의 고승욱 전시를 보고 

“거리는 산책자를 아주 먼 옛날에 사라져버린 시간으로 데려간다...거리는 그를...어떤 과거로 데리고 가는데, 이 과거는 산책자 본인의 것, 사적인 것이 아닌 만큼 그 만큼 더 매혹적인 것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이 과거는 항상 어떤 유년 시절의 시간 그대로이다...”(발터 벤야민, <산책자> 중에서)

제주시 중앙로에 갈 때마다 길을 건너려고 신호등 옆에 서면 저절로 건물들을 보면서 과거에 잠기게 된다. 동문시장 입구에서 중앙 성당 방향, 또는 역방향에서 초록색 신호등이 켜질 때까지 기다리는 시간은 1분도 채 안되지만 마치 순간이동 하듯이 과거로 돌아간다. 번잡한 초겨울 시장으로 떡볶이 먹으러 가던 일, 신발을 사러 어머니와 걷던 일, 엄한 얼굴의 약사가 무서웠던 약국에서 밴드에이드를 사던 일, 어릴 적 일들이 총총히 떠오른다. 이런 기억은 꼭 중앙로 신호등 옆에 서서 기다릴 때 강렬하게 나타나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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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앙로 건널목과 동문시장 입구. 사진 출처=다음. ⓒ제주의소리

중앙로에서 신호등을 기다릴 때마다 얻는 이 경험이 좋아서 신호등을 기다리지 않아도 되는 날이면 왠지 서운해질 때도 있다. 필자의 기억과 서운한 감정에 대해 이해하게 된 것은 발터 벤야민의 책을 읽으면서 부터이다. 근대 문명을 이론화했던 벤야민에게 파리나 베를린의 거리는 과거를 담은 기억의 장소였다. 도시라는 물리적인 공간을 돌아다니는 ‘산책자’ 즉 여유롭게 걷는 사람이 얻는 경험이 비록 사라지더라도 시간이 지나 그 공간을 마주할 때마다 되살아난다는 것이다. 도시와 인간의 관계에 주목하며 근대적 주체를 설명하던 그의 도시 인문학이 세삼 중앙로에서 유익하게 다가온다. 

중앙로는 일제가 계획했고 해방 후 만들어졌다. 꼬불꼬불한 조선 시대의 길과 달리 중앙로는 넓고 시원하게 뻗었다. 처음 생길 때 시원함만큼이나 많은 이들의 가슴을 아프게 했을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이 길은 아픈 기억과 추억, 연민까지도 갖게 한다. 강제로 만든 길이라는 기억은 멀어지고 쇠퇴한 근대 제주시의 뼈대이자 상징이 되었다. 좌우로 길게 늘어선 낡은 건물들은 필자의 기억 속의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3-4층 높이로 배열된 건물들을 볼 때마다 필자가 과거로 돌아가는 것은 바로 겸손하게 시간을 견디는 모습 때문이리라.   

중앙로 69번지에 아트스페이스 씨가 2012년 봄 문을 열었다. 사재를 들여 문화공간을 운영하는 안혜경 관장이 노형동에서의 6년을 접고 이전한 것이다. 노형동 시절 넓은 지하 공간 시절 첫 방문을 했을 때, 벽에 가득한 소장품을 보고 감탄한 적이 있다. 중앙로로 이전한 공간은 3층 갤러리, 4층 사무실로 나누어 운영하고 있다. 그러면서 안관장은 “구도심속에서 잊었던 옛 추억을 곳곳에서 만나는 재회의 기쁨과 낡은 공간을 새롭게 만들어가는 기쁨”을 누리고 있다고 한다. 필자와 다른, 자신만의 중앙로의 추억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10월 태풍이 쓸고 간 어느 날 저녁 필자는 아트스페이스 씨에 들러 <고승욱 사진전> 오프닝에 참석했다. 서울에서 작가이자 기획자로 활동하던 그가 고향 제주에 내려온 지 몇 년이 되었다고 한다. 지친 몸을 이끌고 자연과 사람에 둘러싸여 살던 그가 작년 구제주대학교 병원을 아트센터로 만드는 첫 전시 <터와 길>에서 전체 설치를 맡아 과거의 실력을 보여준 적도 있다. 이날 전시는 그가 올해 전국을 돌며 아픈 기억을 담은 장소에서 찍은 사진작업을 선보이는 자리이자 작가와의 대화를 통해 작업관을 피력하는 자리였다. 오후 7시경 도착하자 이미 사람들이 가득했다. 제주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김옥선 작가, 서울에서 활동하는 유비호 작가 등과 여러 사람이 모여서 제주어, 서울말, 영어로 대화를 나누며 전시를 축하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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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혜경 관장과 고승욱 작가. 늘어진 천이 사진에 사용된 소품이다. 사진 제공=양은희. ⓒ제주의소리

제주4.3평화공원에 있는 기념관의 백비에서 영감을 받은 고승욱은 그 백비의 슬픔을 천에 물감으로 표현한 후에 그 천을 들고 전국을 누비며 사진의 소품으로 사용하고 있다. 해질녘 풍광이 사라지기 직전 어두운 천을 높이 매달고 불을 든 모델을 앞에 세운 후 사진을 찍는다. 제주의 다랑쉬 오름 인근, 홍천의 와동분교, 지리산 실상사 등의 평범한 풍경이 어둠과 불빛의 대비를 통해, 그리고 희미하게 버티는 사람의 존재를 통해 기억 속에 가려진 과거를 조심스럽게 끌어낸다. 어둠에 가려져 윤곽선으로만 어렴풋이 보이는 나무, 건물, 오름의 모습은 보는 이를 빠져들게 만든다. 

작가와의 대화를 이끈 안관장은 시종일관 작가가 너무 겸손해서 작가를 알릴 수 있는 실마리를 물어보느라 힘들었다고 했다. 고향에 와서 살면서 제주를 다시 보기 시작했다는 작가는 4.3기념관의 백비를 보고 앞으로 2~3년간 작업할 수 있는 화두와 영감을 얻었다며 눈을 반짝거린다. 관람객들도 진지하게 질문했다. 어떤 이는 아름다움을 느꼈다고도 하고 슬프다는 이들도 있었다. 2016년 가을밤, 역사적 기억을 현대로 끌어와 사진 이미지로 뽑아낸 한 작가의 전시는 보는 이들에게 새로운 기억을 남기고 있었다. 전시는 10월 20일까지이다.

▲ 필자 양은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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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고교 시절 미술에 흥미를 갖기 시작했고, 영어교육학으로 대학을 졸업했지만 예술과 철학에 대한 호기심을 포기할 수 없어서 미학, 미술사, 박물관학까지 공부했다. 제주에서 나고 자라 대학까지 졸업한 뒤 서울, 뉴욕 등 세계를 다니며 공부와 일을 병행했다. 그동안 큐레이터, 갤러리 디렉터, 프로젝트 매니저, 교수 등 미술과 관련된 여러 일을 하면서 예술과 사회의 역학관계를 체험하고 연구하고 있다. 11년간 체류한 뉴욕을 현대미술의 눈으로 조명한 『뉴욕, 아트 앤 더 시티』 (2007, 2010)를 저술했으며, 『개념미술』(2007) 등 다수의 책을 번역했다. 현재는 건국대학교 글로컬문화전략연구소 연구교수로 재직 중이다. 세계를 돌면서도 언제나 마음은 고향을 향해 있었다. 특히 요즘 문화예술의 섬으로 떠오르는 고향 제주를 주목하고 있다. <제주의소리>를 통해 글로벌 시대의 제주의 문화예술 비전을 고민하는 일은 또다른 고향사랑의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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