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밥상 이야기> (12) 호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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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박. ⓒ 김정숙

초록이 점점 사그라든다. 하늘에서 내리는 햇살이 하루하루 가늘어 가는 상강 무렵. 울안의 호박을 거두어 들였다. 조선호박 모종 서너 개를 심었었다. 방향 잡으랴, 길 내랴, 꽃 피우랴. 노란 나팔 소리가 장마와 폭염 속을 헤매더니 호박 주렁주렁 열린 것이다. 태풍이 훑고 간 뒤에도 그런 일 어디 한 두 번이냐는 듯 덩그러니 남아 가을을 지킨다. 크건 작건 존재 자체가 푸근푸근하다.


조선호박은 병충해에 강하고 척박한 토양에서도 잘 자란다. 타고난 무공해 식품이다. 열매가 맺히면 그 크는 속도 또한 빨라서 꽃이 지고 일주일 정도면 어른 주먹만큼 큰다. 그때부터 따서 먹을 수 있다. 찌개, 볶음, 부침개, 전 등등. 풋 호박으로 시작해서 익을 때까지 만만하게 먹을 수 있는 식품이다. 황색으로 익으면 늙은 호박이라 한다.

익으면 익은 대로 나물이나 죽, 떡, 엿, 음료에 이르기까지 그 쓰임새가 다양하다. 늙은 호박은 겉이 단단하여 저장성이 좋다. 그렇게 나물로 뿐 아니라 식량이 부족한 시절에는 구황식품 노릇도 해온 효자식품이다. 잎에서 부터 꽃, 씨앗에 이르기 까지 버릴 게 없는 호박이다. 호박꽃은 꿀벌에게도 대박이다. 여기저기 꽃을 찾아다니지 않아도 되니까 말이다. 다만 한 가지, 별로 이렇다 할 맛이 없는 게 아쉽다. 그렇지만 현대인들이 먹어야 할 좋은 식품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호박을 주재료로 한 음식을 좋아한다고 손꼽을 이는 별로 없을 것이다. 아예 먹지 않는다는 아이는 물론 어른들도 있다. 이렇다 할 맛이나 향이 없어서일 것이다. 그래서인지 집집마다 심던 호박이 이젠 잘 보이지 않는다. 아무데서나 잘 자라고, 쓰임새 많아, 저장성 좋아, 영양적 가치 있어... 다만 특별하지 않을 뿐이다. 특별함을 찾는 시대 아닌가. 만만한 건 흠이 되기도 하는 세상.

살피지 않아도 옆에 있어 주고 바라 봐 주고, 아낌없이 내주면서도 자식 눈치를 보는, 익을수록 겉을 단단히 하면서도 속은 비우고 앉아 있는 호박! 어쩌면 우리 부모님을 닮았지 싶다.

음식도 시대를 반영한다. 사람들은 새로운 재료, 새로운 맛을 끊임없이 찾아간다. 한 시대는 흐르는 것은 흐르는 대로, 사라지는 것은 사라지는 대로, 새로운 것은 새로운 것대로 같이 공존한다. 강한 야생성으로 우리 과거를 같이 해온 조선호박이 새로움을 찾았으면 좋겠다. 흔해서 별 볼일 없었던 꽃의 이미지와 구황식의 이미지를 벗겨주고 싶다.

호텔 뷔페식 단골 메뉴인 호박죽은 시원하게 해서 먹으면 여름 별미가 된다. 호박의 적정보관 온도는 1~7℃지만 겨울에는 상온 보관해도 무방하다. 상온 보관 될 때 까지만 하고 그게 어려워지면 껍질을 벗기고 푹 삶아 냉동 한다. 시원한 호박죽은 특별하다. 삶아 으깬 호박에 찹쌀가루를 살짝 풀어 죽을 끓인 다, 설탕과 소금으로 간하고 차게 식힌다. 맛, 영양은 물론 색감이 좋아 솜씨 부리기도 좋다. 삶은 호박에 설탕과 생강즙, 사과를 넣고 잼을 만들어도 별미다. 생강은 호박 냄새를 잡아주고 사과는 호박에 부족한 산을 보충해 준다. 귤의 신맛 보다는 사과의 신맛과 궁합이 좋다. 개인의 취향일 수도 있다.  

‘사랑한다’는 말을 ‘밥 먹었느냐?’고 묻던 시대가 간다. 마당에 모인 호박이 한마디씩 한다. 사랑한다. 사랑해. 사랑합니다. 호박꽃처럼 이 시대 사랑이 또 만발한다. 주렁주렁 열려서 호박처럼 자라고 호박처럼 익었으면 좋겠다. / 김정숙(시인)

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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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 시인은 제주시 애월읍 납읍리 출신이다. 2009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조부문에서 당선됐다. 시집으로 <나도바람꽃>을 펴냈다. 젊은시조문학회, 한국작가회의, 한국시조시인협회, 제주작가회의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30여년 동안 제주도농업기술원에서 일하다 2016년 2월 명퇴를 하고 서귀포시 남원읍 수망리에서 귤 농사를 짓고 있다. <제주의소리>에 ‘제주 밥상 이야기’를 통해 제주의 식문화를 감칠맛 나게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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