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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루스 커밍스 교수는 21일 제주칼호텔에서 ‘미국의 책임과 제주의 학살'이란 주제로 강연을 가졌다. ⓒ제주의소리
<한국전쟁의 기원> 저자, 제6회 4.3평화포럼 참석...“피해·생존자 함께 진실 밝혀야”

영미 문화권 ‘한국학’의 최고 권위자이자 국내외를 막론하고 자타가 공인하는 한국전쟁 전문가로 손꼽히는 <한국전쟁의 기원>의 저자 브루스 커밍스(73, Bruce Cumings) 미국 시카고대학교 석좌교수가 제주를 찾았다. 그는 제주4.3 당시 섬 주민 수 만 명이 학살당한 배경에는 미국과 국내 극우파 세력이 자리 잡고 있다면서, ‘진실화해위원회’(과거사정리위원회)처럼 역사적 진실을 찾기 위한 과정이 계속돼야 하고 평화로운 화해를 위해 대척되는 입장에 선 생존자들이 손잡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브루스 커밍스 교수는 ‘제6회 제주4.3평화포럼’ 둘째날인 21일 오전 9시 제주칼호텔에서 ‘미국의 책임과 제주의 학살(American Responsibility and the Massacres in Cheju)이란 주제로 강연을 펼쳤다.

1943년생으로 미국 컬럼비아대학교 대학원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은 브루스 커밍스는 소위 ‘한국에 대해 가장 잘 아는 서양인 중 하나’로 불릴 만큼 한국과 아시아에 천착한 학자다. 그가 1989년 펴낸 <한국전쟁의 기원>은 한국전쟁이 발발하게 된 원인을 다각적으로 규명하면서 국내외를 가릴 것 없이 한국전쟁을 이해하는 중요한 기준이 됐다. 무엇보다 그의 연구가 높이 평가받는 이유는 방대한 미국정부 미공개 자료와 한국 내 사료를 기반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2007년에는 제1회 후광 김대중 학술상을 수상했다.

브루스 커밍스는 이날 강연에서 ▲4.3 발생 과정에서 미국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 ▲진전된 미래를 위해서는 남아있는 이들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설명했다. 

# 제주4.3과 미국의 관계

그는 제주4.3이 발생한 원인으로 미국의 존재를 명확히 했다.

브루스 커밍스는 “4.3은 미국이 자신의 명령으로 발생된 행위에 대해 법적인 책임을 지고 있을 때 발생했다. 그러나 범죄자들을 처벌하는 대신에 미국 지도자들은 반란세력을 강경 진압할 것을 명령했고, 마침내 진압된 것에 만족해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이승만 대통령이 남한 단독정부를 수립하기 전까지인 1945~1947년 제주는 평화로운 상태를 유지했다고 말했다.

그는 “미군정은 육지의 공식 수뇌부를 지정한 반면, 제주민들은 자신들과 관련한 업무를 자체적으로 다루도록 했다. 그 결과 북한과는 어떤 중요한 연결 관계도 없으며 몇몇은 육지의 남조선노동당과 희미하게 연결된 좌파세력이 견고하게 자리를 잡게 됐다”며 “제주는 육지와는 대조적으로 1945~1947년 평화롭게 운영됐다”고 설명했다.

주한미군사령관 존 하지(John R. Hodge)가 1947년 10월 미 의원들이 내한했을 당시 제주에 대해 “국제공산당으로부터 별다른 영향을 받지 않은, 제주인민위원회가 평화롭게 통제하고 있는 진정한 공동체적 지역(communal area)”이라고 소개한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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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루스 커밍스 교수는 제주4.3이 발발한 후 벌어진 학살의 책임에는 미국과 극우파 세력이 있다고 강조했다. ⓒ제주의소리

그러나 이승만의 남한 단독정부 수립 이후 극우파 세력과 정치인이 제주에 들어오면서 분위기는 바뀐다. 브루스 커밍스는 “미군 CIC(방첩부대) 자료에 따르면 제2대 제주지사였던 유해진은 육지 출신인 극우파 인물로, 우익청년단체와 모종의 커넥션이 있었다. 반대당을 무자비하고 독재적으로 다루고 이승만 정부를 지지하지 않는 자라면 당연히 좌파라고 생각했으며 1947년에는 수 개월 동안 그가 확실히 승인한 단체 이외에는 누구도 집회를 열지 못하도록 했다”고 밝혔다.

유해진 지사는 극우파 테러범과 함께 일했던 육지인들과 북한출신의 피난민들로 제주 경찰대를 꾸려 탄압을 가한다. 브루스 커밍스는 “당시 면 사무소 직원들은 유 지사에 아첨하는 정치꾼들로 채워져 직접 식량배급을 통제했다. 1947년 비인가된 곡물수집량은 공식 수집량의 5배에 달했다”고 밝혔다. 보다 못한 미군 조사관이 유 지사를 해임할 것을 미군에 요청했지만 윌리엄 F. 딘 장군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대규모 4.3학살로 상황이 악화되는 과정을 미국은 사실상 묵인·방조한 셈이다. 

당시 서울 검찰관을 맡은 원택윤은 “좌파세력 선동이 아닌 공권력의 무능으로 인해 문제가 발생했다”고 말했고, 제9연대장 김익렬 중령은 “반란이 일어난 것은 전적으로 경찰의 탓”이라고 피력한 바 있다.

브루스 커밍스는 이런 과정 속에서 “미국은 진압 감독, 반란 진압군 일상훈련, 수감자 심문 및 게릴라 세력을 찾아내기 위해 미군 탄착 관측기 사용 등의 방식으로 반란 진압에 직접 가담했다”고 강조했다. 1948년 미20연대장 브라운 대령은 ‘게릴라 단체들로부터 해안 마을을 보호하도록 무기 소지 폭도를 체포 및 무고한 시민에 대한 살해와 위협을 근절한다는 확실한 임무를 경찰에 지시한다’는 방침을 세운다.

브루스 커밍스는 “미국 공식 자료에서는 1만 5000명에서 2만명의 제주민이 사망했다고 1949년 보고했고 한국 정부의 공식 수치는 2만7000여명으로 보고된다. 그러나 당시 제주지사는 6만명의 사망자가 발생했고 4만명이 일본으로 피난갔다고 미 정보국에 은밀히 전달했다”며 “공식적으로 3만9285채의 집이 붕괴됐지만 도지사는 ‘언덕 부근에 놓인 집 대부분’이 사라진 것으로 봤다. 실상은 400개 마을 중 170개만이 남아있다. 결국 5~6명 중 1명의 주민이 살해되고 절반가량의 마을이 파괴됐다”고 설명했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미국은 1950년 6월 한국전쟁 발발 직전 "내란 당시 사망한 공산당 동조자들 친인척이 5만명 있을 것으로 추측된다. 제주 내 체제 전복의 가능성이 존재한다"고 추정하기도 했다. 결국 4.3 학살의 시작부터 예비검속까지 미국이 깊숙이 개입돼 있고 극우파 세력이 행동에 나선 셈이다.

# 화해, 상생 위해, 남아있는 자 손 잡아야

브루스 커밍스는 한국전쟁 전후 일어난 사건이 수면 위로 드러날 수 있었던 이유는 ‘한국 민주화 투쟁의 과실이자 시민사회의 부상’이라고 평가했다. 그러면서 4.3을 겪은 생존자들은 여전히 정신적·육체적인 고통을 겪고 있다고 강조했다.

브루스 커밍스는 김성례 교수의 연구를 빌려 “남겨진 반란자의 부인은 경찰의 괴롭힘으로 인해 자폐증, 긴장증 심지어 자살로까지 몰린다. 유족들은 행여나 블랙리스트에 올려질까 두려워 죽은 이의 이름을 거론하거나 제사를 올릴 수도 없다. 친족 한 명이 공산당으로 낙인 찍히면 연좌제에 따라 수십 년 동안 가족 모두의 목숨이 위태롭기 때문”이라며 “고통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잊는 것이 즉각적인 치료법이겠지만 효과는 오래 가지 않는다. 당사자의 의도와는 관계없이 아픈 기억이 고개를 들고 죽은 자들이 꿈속에 나타나고 잔혹한 행위는 악몽으로 다시 찾아온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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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루스 커밍스 교수의 강연 현장. ⓒ제주의소리

브루스 커밍스는 한국전쟁 당시 주민들 간의 갈등으로 많은 인원이 숨졌지만 세월이 지난 2006년 가해자를 지목하지 않은 채 오로지 희생자만을 위한 합동 위령제를 지낸 전라남도 구림마을의 예를 들며, 평화로운 화해를 위해 4.3으로 대립되는 양 쪽의 노력이 필수불가결하다고 봤다. 이런 노력은 남북한의 평화를 위해서도 큰 역할을 할 수 있다고 평가했다. 또한, 남아공 사례를 본뜬 진실화해위원회 활동을 높이 평가하며 이러한 노력도 계속 이어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한국의 진실화해위원회는 남한이 수십 년간 민주화와 인권을 위해 투쟁해온 노력의 최대 산물이다. 위원회는 포괄적이고 날카로운 진실규명을 통해 남아공의 경험에서 정의했듯이 치유와 회복, 그리고 평화와 화해를 추구한다”며 “피해자와 생존자가 밝히는 진실은 회복적 진실이 돼 1945년 8월 딘 러스크 중령이 38선을 그은 이후로 허락되지 못했던 남과 북의 평화로운 화해를 마침내 달성할 수 있도록 하는 잊혀진 전쟁에 대한 레퀴엠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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