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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존 메릴(John Merril) 정치학 박사는 21일 제주칼호텔에서 ‘제주4.3의 성찰’이란 주제로 강연을 펼쳤다. ⓒ제주의소리

미 정보조사국(INR) 전 동북아국장 존 메릴 씨 “당시 미국 군사고문들 학살 막았어야”

“제주도민 전체를 말살시키려한 이승만 정부의 초토화 정책은 매우 충격적이다”, “이런 이승만을 국부(國父)나 영웅으로 만드는 것은 실수다. 앞으로 탄생할 한국의 새로운 국정교과서에서 이런 사실을 정확히 다룰지 걱정이다”

이는 진보 논객이나 운동권 인사 입에서 나온 말이 아니다. 미국의 외교정책을 총괄하는 국무부에서 동북아시아 정보조사를 책임진 전직 동북아국장 존 메릴(72, John Merril, 정치학 박사) 씨의 말이다. 

존 메릴은 ‘제6회 제주4.3평화포럼’ 둘째 날인 21일 제주칼호텔에서 ‘제주4.3의 성찰’(Reflection on the 4.3 Incident)이란 주제로 강연을 펼쳤다. 

델라웨어 주립대학에서 정치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존 메릴은 2004년 국내 번역·출판된 <새롭게 밝혀낸 한국전쟁의 기원과 진실>의 저자로 소개되곤 하지만, 실은 1980년 하버드 대학교 석사학위 논문 <제주도 반란>(The Cheju-do Rebellion)의 주인공으로 더 알려졌다. <제주도 반란>은 국내외를 통틀어 최초의 4.3 논문으로 평가 받는다.

그는 학자 이전에 관료였다. 그것도 정보기관 관료다. 30년 이상 미국 정보기관에 몸담으며 국무부 정보조사국(INR) 동북아국장을 역임하는 등 한반도, 동북아 문제 전문가로 평가받는다. 현재는 은퇴 후 강의, 연구 활동에 매진하면서 미국 안에서 몇 안 되는 4.3연구자로 꼽힌다.

평화포럼에서 강연자로 나선 그는 자신의 경험과 연구에 근거해 제주4.3의 성격과 책임 문제, 나아가 4.3이 오늘날 한반도에 어떤 메시지를 주는지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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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존 메릴 박사의 강연 모습. ⓒ제주의소리

# '폭력의 무절제' 일깨워준 4.3...지금도 유의미

존 메릴은 “1980년 한국학술학회지에 논문을 투고하고 이어 델라웨어 대학에서 다시 연구 논문을 쓰면서, 4.3을 한국전쟁으로 이어지는 한국의 폭력 행태의 맥락에서 바라봤다”며 “은퇴한 미군, 한국군, 전 남로당원들과의 인터뷰와 미군·한국군 문서 같은 자료를 통해 4.3사건 당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림을 그렸다”고 운을 뗐다.

그는 “넓은 관점에서 4.3은 대중적 저항운동의 새로운 유형으로 봐야 한다. 이는 2차 세계대전 이후 아시아 전역에서 발전된 대중 저항운동의 하나”라며 “미국이 1948년 5월 10일 남한에서의 단독선거를 지지하고 지원하기로 결정한 것이 4.3사건의 가장 근접한 원인이다. 4.3사건에서는 대중저항과 자발성(Spontaneity)이 매우 중대한 요소”라고 평가했다.

한동안 4.3은 공개적으로 꺼낼 수 없는 은폐된 역사였고 국가추념일로 지정된 현재도 여전히 4.3의 진실을 왜곡하려는 세력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존 메릴은 잘 알고 있었다.

그는 “4.3은 한반도의 어두운, 그리고 소리 내서 알릴 수 없던 역사의 일부다. 이는 1946년 대구 10월 항쟁에서 1948년 여수-순천 사건, 보도연맹학살사건, 그리고 형제복지원 사태로 불리는 서울 올림픽 직전 한국정부에 의한 부랑자 집단 학대 및 학살 사건까지 계속되고 있다”며 “과연 내년에 발간되는 박근혜 정부의 새로운 국정교과서에 이 사건들이 어떻게 묘사될지 궁금하다”고 우려했다. 

존 메릴은 “4.3은 폭력이 얼마든지 통제를 벗어나 악화되기 쉽다는 것을 보여주는 일종의 경고”라면서 “내 논문은 ‘한반도에서의 적대적 분단이 계속되면 4.3과 같은 똑같은 폭력이 가능하다’는 메시지로 끝이 난다. 안타까운 것은 30년 전에 낸 결론이 지금도 유효하다는 현실이다. 오히려 상황은 더욱 나빠진 것 같다. 남북한 소통 채널이 현저히 축소되고 있다”고 남북 분단 상황과 회복 기미가 없는 냉전 분위기를 걱정했다.

그러면서 한가지 예를 들었다. 전직 국방장관, 국무장관 등 미국에서 중요한 직책을 맡았던 이들로 구성된 ‘보수적’ 성향의 집단 모임에 존 메릴이 참석했는데 이름 밝히기를 꺼린 어느 인사가 “이젠 단순히 북한의 비핵화만 이야기해서는 안된다. 분명히 비핵화는 중요하지만 평화와 안정을 한반도에서 어떻게 유지할지, 위기에서 안정으로 이동해서 어떻게 안정을 유지할지가 중요하다”고 지적했다는 것이다. 

보수적 성향 인사들마저 한반도의 안정과 평화를 강조할 만큼 현재 남북한 정세가 답보상태라는 의미로 풀이되는 동시에, 팽팽한 남북 긴장을 완화하는 실마리를 제주4.3에서 찾을 수 있다는 메시지로도 읽힌다. 

# 4.3 대학살의 책임 '극단적인 좌우 이념과 미국'

존 메릴은 4.3 당시 벌어진 대학살의 책임 문제도 강도 높게 지적했다.

“미군정 아래 남한에서는 미군이 지켜보는 가운데 4.3이 발생했다. 당시 미국의 군사고문들은 도처에 존재했는데 이들은 당시 대학살을 막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고 미국의 책임을 우선 언급했다. 

이어 그는 “제주도민 전체를 말살시키려한 이승만 정부의 초토화 정책은 매우 충격적”이라며 이승만과 그에 동조한 극우파의 책임을 꼬집기도 했다.

여기에 남로당 지도자였던 박헌영에게도 “1950년 남한 침략을 위한 스탈린의 지원을 받고자, 혁명의 열기가 폭발 직전이었던 남한을 더 격앙시켰다는 점에서 역시 비난을 받아 마땅하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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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존 메릴 박사는 제주4.3이 벌어진 가장 큰 책임이 당시 미국과 이승만 정권에 있다고 밝혔다.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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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4.3모델의 세계화, 보편화를 위하여'를 주제로 열린 제주4.3평화포럼에서 존 메릴 박사의 강연 후 이어진 토론 장면. ⓒ제주의소리

그는 “어젯밤 4.3유족회와 경우회를 만났는데 서로가 공동의 목표를 추구하면서 화합하는 모습이 굉장히 고무적이었다. 오랫동안 내가 품어온 비관적인 생각이 잘못됐다고 느낄 만한 계기였다”고 4.3 갈등을 해결하려는 자발적인 노력을 높이 평가했다.

주제 발표 다음에 이어진 토론회에서 좌장을 맡은 허호준 한겨레신문 부국장은 '4.3의 책임이 미군정이 더 큰지 이승만 정부가 더 큰지'를 존 메릴에게 물었다. 허 부국장은 15년전 4.3 당시 미국 군사고문들로 활약한 이들을 직접 인터뷰하면서 그들 상당수가 4.3의 존재를 모르거나 인정하지 않았다는 설명을 보탰다.

이에 존 메릴은 “광주 5.18에서도 알 수 있는데 우리는 우리가 지지하는 사람들의 말을 그대로 믿는 경우가 있다. 4.3을 알지 못하고 인정하지 않는 군사고문들도 당시 함께 일했던 사람들로부터 제대로 된 정보를 듣지 못했을 수도 있다”고 미국의 무관심 혹은 의도적 방치를 문제 삼았다. 

더불어 “초토화 정책을 실시한 이승만을 국부나 영웅으로 만드는 것은 실수다. 새로운 국정교과서에서 이런 내용을 정확히 다룰지 걱정이다. 한국인들은 학계에서 논의 중인 국정교과서에 대해 주시해야 한다”고 뼈있는 메시지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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