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밥상 이야기> (13) 범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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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범벅. ⓒ 김정숙
그 난리를 치른 하늘이 아무렇지도 않게 쾌청하다. 가을다운 가을이다. 얼마만인가. 이렇게 끝없이 푸른 창공을 보는 것이. 봄에 고사리장마, 여름장마, 그리로 9월 중순의 장마처럼 지속된 비 날씨, 그리고 태풍 ‘차바’까지. 비는 비끼리 뭉쳐 축축한 날을 쌓고, 볕은 볕끼리 틈을 주지 않고 불을 붙이며 힘든 시간을 더 힘들게 했다.

봄볕 사이사이 더운 날 사이사이에 내리는 비는 얼마나 고맙던가. 서로 음양을 보충하며 싹을 내고 꽃을 피우고, 충실하고 달콤한 열매를 맺게 한다. 이를 모르지 않을 하늘이기에 살짝 겁도 난다. 자꾸 이러시면 어쩌나 하고.

가을걷이를 앞두고 있지만 성한 것이 별로 없다. 비에 잠긴 콩은 꼬투리 속에서 싹을 내고, 땅콩은 속이 썩어 빈 꼬투리 수두룩하다. 설익은 것들을 모아 범벅을 하기로 한다. 죽도 아니고 밥도 아닌 것이 범벅이다.

고구마. 감자, 무, 호박, 콩 등을 삶다가 거의 익으면 서로 엉킬 만큼 가루를 넣어 익혀낸 음식이다. 뜨거울 때는 밥보다 질고 죽보다는 되다. 식으면 떡처럼 덩어리가 지기도 한다. 여기에 소금과 설탕으로 간을 한다. 그래서인지 밥이나 죽보다 범벅이 맛있었다. 밀가루, 쌀가루, 메밀가루 등을 이용하는데 나는 메밀가루가 제일 맛있다. 그것도 고구마를 잔뜩 넣은 메밀범벅. 식으면 주먹만큼 덩어리를 떼어 들고 다니면서 먹었다. 끼니도 되고 간식도 되는 기특한 음식이다. 심지어 우리 동생은 소풍 때도, 가을 운동회 때도 범벅을 싸달라고 떼를 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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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범벅을 만들기 위해 준비한 재료들. ⓒ 김정숙

집에 있는 재료로 후딱 할 수 있는 요리, 김치만 있으면 되는 단품메뉴다. 넉넉한 집에서는 간식에 불과한 범벅이 제주사람들에게는 종종 끼니가 되어준 고마운 음식이다. 고구마범벅은 그나마 좋았다. 호박범벅, 무범벅은 어쩔 수 없는 끼니였다.

생활이 나아지면서 범벅은 잊혀져 가는 듯하다. 많은 주부들이 간편하면서 맛있고 영양가 있는 음식을 원한다. 그러면서도 칼로리는 낮았으면 한다. 하지만 그런 음식은 흔치 않으니 먹는 게 때론 고민과 고통이 되기도 한다. 범벅을 잘 활용하면 좋겠다.

사실 범벅이라는 단어가 주는 이미지는 좋지 않다. 뒤섞여 뭐가 뭔지 가려내지 못하는 답답함이 있다. 그러나 음식인 범벅은 하나하나의 재료가 서로 엉켜 각 재료의 맛과 섞인 맛을 함께 내는 음식이다. 개성은 존중하되 개인주의는 지양하는 범벅. 뜨거워도 좋고, 식어도 괜찮은, 이도 저도 품는 오지랖. 사람들 사이에도 종종 이런 범벅처럼 엉켰으면 좋겠다. / 김정숙(시인)

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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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 시인은 제주시 애월읍 납읍리 출신이다. 2009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조부문에서 당선됐다. 시집으로 <나도바람꽃>을 펴냈다. 젊은시조문학회, 한국작가회의, 한국시조시인협회, 제주작가회의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30여년 동안 제주도농업기술원에서 일하다 2016년 2월 명퇴를 하고 서귀포시 남원읍 수망리에서 귤 농사를 짓고 있다. <제주의소리>에 ‘제주 밥상 이야기’를 통해 제주의 식문화를 감칠맛 나게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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