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세통Book世通, 제주읽기] (34) 정진국 『유럽의 책마을을 가다』/고영자 미학자·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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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진국 글·사진 『유럽의 책마을을 가다』 생각의 나무, 2008년.
파리에서 8년 동안 체류하다 귀국한지도 조금 있으면 벌써 10년이 된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내가 살던 파리 16구 빠시(Passy) 동네는 여전할까? 이 동네는 중세 때 포도밭 풍경이 펼쳐지던 수도원 마을이었다. 혁명 후 귀족의 삶을 모방해서 부유한 부르주와 계급들이 차츰 몰려들면서 부촌으로 성장했다. 1860년 파리시에 합병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지역과 관련한 사건과 인물들의 이름을 딴 무수한 도로명만 보아도 이곳의 역사는 유서 깊다. 물론 이 동네 또한 시대의 흐름에 따라 진보와 산업혁명의 길을 걸어오면서 많은 변화의 진통을 겪었다. 

그러면서도 ‘빠시 광장(Place de Passy)’을 중심으로 형성된 동네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긴 세월을 관통하며 오늘날 까지 이어지는 전통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니었다. 적어도 필자가 그 동네에 살던 때만 해도. 17세기 건립 역사를 가진 성당의 맑은 금속성 종소리가 매일 아침, 저녁마다 집 안팎으로 크게 울려 퍼졌다. 동네 시보(時報)인 셈이다. 빠시 사람들은 이 종소리에 일어나고, 미사에 참석하고, 출근 준비하고, 시장가고, 병원 등 간다. 저녁 종소리가 멈추면 주위는 참으로 적막했다. 근처 19세기 프랑스 문호 발자크 생가와 박물관에도 불이 꺼진다.

성당 바로 뒤로는 적당한 규모의 재래식 상설시장이 있었다. 도로 양쪽엔 조석으로 바게트를 조달하는 빵집, 카페, 청과물점, 정육점, 옷가게, 선물가게 등으로 장사진을 이뤘다. 하지만 스타벅스 커피점, 맥도널드점, 편의점과 같은 프렌차이즈 가게는 감히 발도 못 붙였다. 그만큼 동네 상인들의 텃새와 유대가 강했던 것 같다. 매일 열리는 시장은 활기를 띤다. 대부분 동네 사람들이 이용하므로 서로 이름은 몰라도 얼굴은 어느 정도 다 익숙하다. 

그 중에 필자가 잊을 수 없는 가게는 시장 골목 초입에 있었던 소규모 동네책방이다. 인문·사회과학 계열의 주요 신간 문고판이 메인이고, 거기에 신문, 잡지, 그리고 파리16구 지도와 역사책들도 섞여 진열된다. 주요 고객은 곱게 차려입고 지팡이를 짚은 이 동네 원로들이다. 이들은 책방 주인과 대화를 나누고, 책 이야기를 하거나 쉬어 가기도 했다. 내가 세 들어 사는 집주인 할머니도 이곳에서 여러 번 마주쳤다. 책방 주인은 책 팔 생각보다는 이웃 어른들과 대화에 몰두하느라 나 하나쯤 들어가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정말이지 이곳은 동네사람들을 위한 사랑방·수다방이었다. 

운영난은 별도로 치더라도 책방 주인(서적상)이 책에 미친, 즉 벽(癖)의 경지에 이르지 않고서야 어떻게 이런 업에 종사할 수 있겠는가? 10년이 지난 지금 그곳은 아직 건재할까? 왜냐하면 2000년대 들어 인터넷 주문 시대 그리고 대형서점(복합문화공간)의 등장으로 동네책방이 사라져가는 현상은 당시 파리에서도 예외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동네에서 사라지는 곳이 어디 책방뿐이었겠는가? 그래서 파리시 당국은 2000년 초부터 점점 사라져가는 동네상가를 살리는 제도를 마련하기도 한다. 2008년에는 운영난에 빠진 동네책방을 인수하거나 책방을 새로 열려는 사람들을 지원하는 제도를 마련하여 동네 작은 책방 살리기 운동도 시작했다. 이 제도의 실효성 여부는 중장기적으로 눈여겨볼 대목이다. 

이런 맥락에서 이번 호에 소개할 정진국 글·사진『유럽의 책마을을 가다』(2008년)는 세계화라는 경제논리에 저항하면서 보다 ‘인간적인’ 생활을 추구하며 새로운 형태의 독서운동을 표방하는 주인공들의 이야기들로 가득하다. 

“책이 설 자리를 되찾으려는 이런 현상은 그들로서는 이겨야할 투쟁이고, 지방문화의 활력을 도모하는 지자체로서는 정치적 실험이며, 책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는 지지하고 동참하는 사회운동이다.”(8쪽)라고 저자가 말하고 있듯이, 이 책에 소개되는 책마을 24곳(유럽10개국)이 바로 그러한 현장인 셈이다. 그것도 도시가 아니라 교통편이 매우 불편한 농촌의 군소서점 이야기라 그들의 생존전략이 남다르다. 그런 곳에서 우리가 미처 모르는 한 국가의 지방사, 어느 문필가의 걸작 희귀본, 한 시대를 풍미했던 추억의 철지난 잡지 더미, 전설로 회자되는 절판된 사진집 등을 만나는 재미는 더 쏠쏠하다. 그렇다고 이 책을 동네책방 찾아 떠나는 유럽 농촌마을 답사기 정도로 여기면 오산이다. 

“마을에 있는 ‘책’도 중요하지만 책이 있는 ‘마을’도 중요하다”(332쪽)고 저자가 말하고 있듯이, 책과 마을 그리고 그것들의 가치를 깨닫고 함께 지키는 사람들이 이 책의 진정한 주인공들이다.

예를 들어 저자가 찾은 프랑스 동북부 로렌의 ‘퐁트누아 라 주트’라는 책마을만 하더라도 그렇다. 이곳은 농사꾼과 책 파는 서점, 종이 만드는 사람들이 한데 어울려 사는 곳이다. 18세기 농촌 가옥 풍경을 유지하며 트렉터와 벽에 기댄 농기구들이 책들과 공존하는 이른바 책마을이다. 이런 참신한 책마을 발상은 우파 정객 원로 정치인 필립 세갱의 몫이라 저자는 언급하면서 일종의 ‘위로부터의 개혁’의 성공사례를 인색치 않게 소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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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퐁트누아 라 주트 마을 로터리) 전 세계 책마을 방향을 가리키고 있는 이정표. ⓒ정진국

필립 세갱은 다른 문화관료나 의원들이 화려한 공연단을 몰고 다니며 굿판을 벌리고 떡고물에 공을 들이는 동안, 진보적인 농촌 살리기 정책의 대안으로 책마을을 제안했다. 그것도 단순히 다른 책마을을 모방하지 않았다. 바로 농사와 책방이 공존하는 유례없는 방법을 실현하려 했다. 이를 위해 그는 유럽공동체 기금이나 여러 경로로 자금을 확보한다. 그는 이런 자금을 마을의 외관 치장이나 홍보물 제작 등에 쏟아 붓는 대신, 농촌 생활의 전통을 유지하는 데에 쏟았다. 농민이 경작생활을 그대로 지속하면서 더는 고향을 떠나지 않고 서점을 정착시키도록 도왔다. 또 숙박업소 같은 구색 맞추기 식 투자도 자체했다. 겉으로 보기에 마을은 초라한 농가들이 어깨동무를 한 형국이었지만, 이렇게 해서 맑고 풋풋한 전통적 생활방식이 보존되었다. 주민을 우선시하고, 관광 때문에 예상되는 부작용을 우선 차단한 것이다. 숙박은 지근거리에 있는 도시에서 해결하도록 했다. 농가는 목재와 회반죽이 뒤얽힌 18세기 농촌 가옥을 그대로 물려받았다. 일부는 서점으로 팔렸고, 고용도 증가했다. 이러면서 학자와 은퇴 교수들이 가세하며 인쇄박물관을 차리고 정기적 시장을 열다 1996년부터 본격적인 책마을을 띄웠다. (이상 109~113쪽 요약)

한 정치인의 이러한 신념에 따른 ‘위로부터의 개혁’이라면 얼마든지 우리도 환영할만하지 않은가? 이런 취지라면 ‘위로부터의 개혁’이란 말만 들어도 우선 의심을 하고 보는 우리네 시선과 태도도 분명 교정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한편, 이 책의 또 하나의 특징이자 매력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수록된 사진들이다. 저자는 시각예술의 역사, 미학과 관련된 책을 한국어로 번역해 온 번역가이자 미술평론가로 알려져 있지만, 사진작가이기도 하다. 이 책에 실린 사진들은 글 못지않게 깊은 생각과 예술적 감흥을 배가시키고 있다. 

예를 들어 프랑스 루아르의 포도주가 익어가는 마을 ‘앙비에를’의 ‘너 뭐읽니(케스툴리)’라는 서점 전경이 흥미롭다. 이 서점은 잡지와 아동물을 주로 다루고 있으며 담벼락 어디에나 만화를 읽는 소년들을 만화식으로 그려 확대한 표지판들을 서점 앞에 세워서 ‘만화와 이미지의 마을’을 부각시키고 있다. 저자는 이 서점의 이러한 특징을 렌즈에 포착하고 있다. 사진설명도 눈여겨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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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 뭐읽니’ 서점 앞. 그 뒤쪽이 부르고뉴의 전형적인 지붕을 올리고 고딕풍으로 벽날개를 붙인 수도원 건물이다. ⓒ정진국

또 하나 예를 들면, 룩셈부르크 비안덴 마을의 도서제(圖書祭) 때 골목길 건물 입구에 앉아 그림책을 들여다보는 어린아이의 사진(위 사진-우측)도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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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책을 들여다보는 어린아이는 천사보다 귀엽다. ⓒ정진국

금발머리에 빨간 재킷을 입은 꼬마아이의 그림책 보는 모습도 정겹지만, 그 배경이 되고 있는 건물 낡은 벽면, 4장의 축제 포스터, 축제용 천막 끄트머리 하나하나에도 시공간의 미학이 담겨있는 듯하다. 그러기에 이 마을 축제의 풍경을 묘사한 대목이 한층 돋보인다. “6인조 밴드가 풍악을 울리고 있다. 구경꾼이 삼삼오오 모여들고, 그 뒤로는 거대한 성채가 마을의 골목을 굽어보면서 하늘을 병풍처럼 막아선다. 생화로 장식한 테라스는 느닷없이 지상에 떨어진 하늘의 선물처럼 다소 비현실적이다. 길모퉁이 여기저기에 차려진 책상들은 동네 전체를 깔끔한 서재로 분장시켰다. 책상마다 펼쳐진 고서나 중고 서적은 정성스러운 포장과 손질 덕분에 싸구려 티가 나지 않는다.”(189쪽).

비안덴 마을의 꼬마아이들의 유년기 책 체험이 마을 규모의 이런 도서제(圖書祭)일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에 이르니 부러움이 절로 인다. 그러고 보니 이 글을 읽는 여러분들의 유년기 활자와 책 체험은 무엇인지 문득 궁금해진다. 

최근에 읽은 기사 중에, 우리 삶 가까이에 책을 접할 장소가 존재한다면, 그 사회는 곧 ‘책 읽는 사회’일 것이라는 말이 새삼 주목된다. 유럽에서 동네책방 사라지는 위기를 겪을 때 우리나라의 동네책방 사정도 마찬가지였거나 더욱 심각했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고 보니 마을 도서관이 없었던 시절 필자의 기억 속에 남은 어릴 적 책 체험 장소는 단연 우리 동네책방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서점 주인이 돌아가시면서 폐업한 것으로 기억한다. 그 이래 중·고교가 다 있는 읍 단위 마을임에도 학생들  참고서조차 살 동네책방이 내 고향엔 없다. 점점 ‘책 안 읽는 사회’로의 전락이려나.

불행 중 다행으로 예전 동네책방과는 조금 다르지만 제주에서 최근에 마을 작은 책방들이 문을 열고 있다는 소식이다. 구좌읍 종달리, 한경면 조수리, 남원읍 위미리, 한림, 대정읍 등지에 그 둥지를 틀고 있는 모양이다. 예나 지금이나 책방 주인장은 책에 미치거나 좋아하는 사람임엔 틀림없을 것이다. 나름 다 운영철학이라는 것이 있겠으나, 해당 마을과 연계한 중장기적 출판·도서·독서문화의 꽃을 피웠음 하는 바람 간절하다. 

그러려면 행정 당국의 동네책방 지원도 절실해 보인다. 최근 서울시가 지방자치단체 중 처음으로 지역 서점 지원을 위한 지역 서점 조례를 제정함에 따라 각 지방에서도 비슷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이런 움직임에는 제주도 행정의 발 빠른 대응을 기대해 본다. 위에서 언급한 프랑스 로렌의 ‘퐁트누아 라 주트’라는 책마을 프로젝트 규모는 아니더라도 제주 마을별 특색에 맞는 책방들이 대거 탄생했으면 한다. 

 ▷ 고영자(미학자·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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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대학교 탐라문화연구소 및 재일제주인센터 특별연구원

일본 오사카대학 대학원에서 미학(예술학) 전공으로 석사 및 박사학위 취득.
프랑스 파리사회과학고등연구소(EHESS) 연구원 역임.
부산대학교 예술대학 대학원 강사(미학) 역임.

현재, 근·현대 문화매체론, 제주미학론, 제주 ‘이미지’ 생성 및 변천사 등을 연구하고 있으며, 번역서로는 크리스틴 조디스 저《미얀마 산책》(2008년), 데이비드 네메스 저《제주 땅에 새겨진 신유가사상의 자취》(2012년),《서양인들이 남긴 제주견문록(1845~1926)》(2013년),《서양인들이 남긴 제주도 항해·탐사기(1787~1936)》(2014년), 《구한말 佛語·英語 문헌 속 제주도(1893~1913)》(2015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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