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리숙한 농부의 농사일기> (32) 또, 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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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익어가는 귤. ⓒ 김연미

비 온다.
귤나무 이파리들이 빗방울의 무게에 휘청 뒤로 물러섰다가 제자리로 돌아온다. 나뭇잎에 부딪치는 빗방울 소리, 목덜미에 떨어지는 서늘한 감촉, 언뜻언뜻 내 코끝에 와 닿는 물비린내. 보이지 않아도 비의 존재는 충분하다. 그럼에도 귤을 따내는 가위를 놓지 못한다. 하나라도 더 따야지. 바람도 없이 고요하던 나뭇잎들이 소란스럽다. 그 소란스러움을 수직으로 내리꽂으며 빗방울이 떨어진다. 소란스러움과 빗방울의 수치가 정비례의 직선을 그으며 상승한다. 이파리와 열매마다 물방울이 맺히면서 손끝이 젖는다. 인정하고 싶지 않은 비의 실체, 이제 일손을 접어야 하는가.

꾸물꾸물했던 날씨. 기어이 빗방울을 떨어뜨렸다. 예보에 없던 비였지만 일기예보를 믿고 싶었던 것이지 비가 내리지 않을 거라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하늘은 잔뜩 흐렸고, 요즘 날씨의 비는 연속해서 내리기를 좋아한다. 이러다 혹시 올해도 작년처럼 날씨 때문에 감귤수확을 망치게 되는 건 아닐까.

일 년 농사에 어느 것 하나 중요하지 않은 일이 없고, 중요하지 않은 시기가 없다지만 수확보다 중요한 게 또 있을까. 일년치 노고와 보람이 한 순간에 다 물거품이 되는 경우를 우리는 작년에 보았다. 태풍도 없이 지나간 감귤과수원에 노랗게 익은 열매가 수확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던 시기. 쉬지 않고 내리는 비는 가을 내내 이어져 나무에서 열매가 썩도록 만들었다. 애타는 농부의 마음이야 있건 말건, 오고 싶으면 오고, 쉬고 싶으면 쉬면서 일을 하지 못할 만큼,  딱 그만큼씩 비가 내렸다.

귤 수확철이 되면 제주도 전체도민이 귤 따러 나설 준비가 되어 있다시피 하는데 허구헌날 내리는 비에 발을 구를 수밖에 없었다. 제때 따내지 못한 귤은 나무에 매달린 채로 썩어갔다. 추위에 부풀어 오르고 과육에 얼음이 박히고, 그러다 하얀 곰팡이가 슬거나 손만 대면 문드러지면서 떨어졌다. 툭툭 떨어져 내리는 열매와 함께 농부들의 마음도 그렇게 떨어져 내렸다. 날씨에 구애받지 않는 비닐하우스 농사를 짓고 있다는 게 얼마나 위안이 되는지 몰랐다.

비가 와도 비닐하우스 안에 있는 한라봉은 안전했다. 1월 중순 이후에나 따기 시작하는 한라봉 수확 철까지는 시간도 좀 있었다. 바깥세상이 어떻든지 간에 노랗게 익어가는 저 한라봉은 우리를 배신하지 않을 거라는 믿음을 가졌었다. 그런데, 폭설이 내렸다. 몇 십 년 만에 처음이라는... 눈발 하나 맞지 않았지만 하우스 안에 있던 열매들은 수직으로 내려간 기온 앞에서 모두 무사하지 못했다. 과육에 얼음이 박혔다 풀려난 열매의 맛은 이상했다. 달콤하고 새콤한 맛을 자랑하던 열매들이 하나도 먹을 수 없게 변해 버린 것이다. 눈물을 머금고 모두 폐기할 수밖에 없었다. 노랗게 귤 무덤을 이룬 한라봉과 천혜향이 동그란 눈망울로 농부를 쳐다보고 있었다. 왜 우리가 이렇게 버려져야 하나요? 이해하지 못하는 건 농부도 마찬가지였다. 하룻밤 사이에 일 년 농사가 물거품이 되어버리다니...

기후의 변화는 우리 생활을 좌우하는 가장 큰 요인 중 하나다. 자연을 존중하지 않았던 인간의 예의는 고스란히 인간에게 되돌려져 자연으로부터 어떠한 존엄도 지켜내지 못했다. 초강력 태풍이 오고, 가뭄과 홍수가 만연하다. 기후에도 빈익빈 부익부가 있어서 지역 간 날씨의 격차가 심하다. 그 피해가 고스란히 인간사회를 아프게 한다.

날씨를 예측할 수 없다는 건 농부들에게 가장 치명적이다. 때가 되면 기온이 오르고, 꽃이 필 때가 되면 풍부하게 비를 내려야 한다. 열매가 열려 성장을 하고 나면 서서히 기온을 내려 몸 안에 풍부한 과즙이 돌도록 해야 한다. 자연의 톱니바퀴에 따라 조력을 아끼지 않았던 농부가 그 열매를 따낼 수 있도록 날씨의 배려는 충분해야 한다. 그러나 지금 그러한 배려는 아무 데도 없다. 예측할 수 없는 기온과, 예측할 수 없는 비와 눈, 거기에 좌충우돌하는 동물과 식물, 그리고 인간이 있을 뿐이다. 자업자득이기에 누구를 탓할 수도 없다.

그 사이 빗줄기가 잦아졌다. 본격적으로 비가 내릴 모양이다. 서둘러 따낸 귤을 모아 천막으로 덮고 과수원을 정리했다. 오늘 작업은 이걸로 끝이다.

초록색보다 노랑색 바탕이 더 진한 과수원을 바라본다. 저 그림에서 노란색감을 다 빼낼 때까지 날씨는 우리 편이 되어줄 것인가. / 김연미(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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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미 시인은 서귀포시 표선면 토산리 출신이다. 『연인』으로 등단했고 시집 『바다 쪽으로 피는 꽃』을 펴냈다. 2010년 제2회 역동문학상 우수상을 수상했다. 젊은시조문학회, 한국시조시인협회, 제주작가회의 회원으로 활동 중이다. 최근 서귀포시 표선면 가마리에서 감귤 농사를 시작한 ‘초보 농부’인 그는 <제주의소리>에 ‘어리숙한 농부의 농사일기’를 통해 하루하루 직접 흙을 밟으며 겪은 일상의 경험들을 풀어놓을 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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