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밥상 이야기> (15) 초기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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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버섯. ⓒ 김정숙

가을비가 잦다. 수확을 앞둔 작물들에게는 귀찮은 손님이지만 즐거운 생명도 있다. 죽은 나무나 부엽토가 키우는 버섯들이다. 가을 숲에 가면 단풍도 곱지만 축축한 구석에 핀 가지가지 버섯들을 볼 수 있다. 약도 되지만 독이 되는 것도 많다는 것을 알기에 손 놓고 구경만 할 뿐이다. 다행이다. 죽은 나무들이 피운 꽃을 지켜 볼 수 있어서. 아무 때나 온습도만 맞으면 피는 버섯. 자연을 감상하는 것만으로 배가 부른다면 얼마나 좋을까. 대신 인간에게는 경작의 지혜를 주셨다.

처음 보는, 이름도 독특한 버섯들이 시장 문을 두드린다. 사계절 시장에서 버섯이 피고 있으니 뭔가 기계적인 느낌도 살짝 들지만 식탁이 풍성한 것은 사실이다. 

뭐니 뭐니 해도 쌀쌀한 기온이 느껴질 땐 따뜻한 표고버섯 죽 한 대접 그립다. 싱싱한 표고버섯 향이 콧구멍으로 먼저 확 들어오는 죽. 제주에서는 표고버섯을 ‘초기’라 한다. 요즘 표고버섯 죽은 예전 초기죽 만큼 향이 못하다. 내 코가 늙은 건지 버섯이 자연미를 잃은 건지 모르겠다. 아마도 버섯 구하기 쉬운 것도 한몫을 하고 있을 것이다.

표고버섯은 초낭이라 불리는 참나무에서 자란다. 한라산에서 키운 표고버섯은 제주특산품이다. 참나무를 잘라 1년쯤 말리고 표고버섯 균을 접종한다. 진득하니 1년 이상 기다려야 버섯이 피기 시작한다. 정해진 기한은 없다. 온도와 습도가 맞을 때 까지 벙어리로 기다려야 한다. 1년이니, 2년이니 하는 인간들의 시간은 별 의미가 없다. 인위적으로 물을 주고 조절을 해 보지만 자연의 배려를 따라잡기엔 한참 역부족이다.

여름엔 빠른 속도로 자라 우산처럼 퍼지기 일쑤고, 겨울에는 거북등처럼 깨지며 더디게 자란다. 봄, 가을에 자란 버섯들은 단아하고 곱다. 단연 상품은 겨울에 자란 것이지만 그건 옛날이야기다. 참나무에 구멍을 내서 균을 넣고는 숲에 세워 표고버섯 피우기를 기다리던 그 시절도 갔다. 참나무 구하기가 어려워 수입을 하기도 했으나 요즘은 톱밥으로 만든 배지를 사용하여 생산하는 양이 많아지고 있다. 숲이 아니어도 곱상한 표고버섯을 연중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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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버섯. ⓒ 김정숙

버섯은 비싼 식품이었다. 어머니는 버섯 꼭지를 얻어다 조림을 해 주셨다. 김치뿐이던 밥상에 표고버섯꼭지조림은 정말 맛있었다. 표고버섯은 감칠맛이 좋은 식품중 하나다. 국물을 내는 요리에도 많이 사용하는 이유다. 참기름을 발라 구우면 고기 맛이다. 탕수육, 잡채, 전, 전골... 표고버섯의 쓰임은 아직도 새 영역을 만들어 가는 중이다.

그 중에도 나는 초기죽을 첫 번째로 친다. 마른 버섯을 불려도 좋지만 어머니들이 말씀하시는 ‘물초기’ 즉 생 표고버섯을 채 썰어 듬뿍 넣고 끓인 죽은 전복죽을 위협한다. 압력솥을 이용하면 우리들이 좋아하는 진득한 죽을 끓일 수 있다. 쌀은 익으면서 쌀알이 퍼지지 않는 타이밍을 잘 맞추는 것이 비결이다. 먹기 전에 소금으로 간하고 참기름을 두른다.

가을은 아는가. 차 한 잔, 죽 한 대접으로도 위로 받는 사람의 마음을. 아니다. 소소한 것으로도 위로를 얻는다면 비로소 가을을 아는 건지도... 비 잦은 이 가을도 어느 구석으로 원치 않는 바람 들겠지만, 쓸쓸하지만은 않겠다. / 김정숙(시인)

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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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 시인은 제주시 애월읍 납읍리 출신이다. 2009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조부문에서 당선됐다. 시집으로 <나도바람꽃>을 펴냈다. 젊은시조문학회, 한국작가회의, 한국시조시인협회, 제주작가회의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30여년 동안 제주도농업기술원에서 일하다 2016년 2월 명퇴를 하고 서귀포시 남원읍 수망리에서 귤 농사를 짓고 있다. <제주의소리>에 ‘제주 밥상 이야기’를 통해 제주의 식문화를 감칠맛 나게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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