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리숙한 농부의 농사일기> (34) 노단새미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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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풀숲이 길을 가로막아도 보란 듯이 빠져나가는 물을 보며 나도 저 물처럼 어디론가 흐르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 김연미

  “여보세요. 농부님, 저기 저 샘물을 떠다 나무 아래 좀 숨겨주세요.”
밭을 가는 농부에게 다가와 다급한 목소리로 애원을 하는 처녀. 
  “그러지요. 어려운 것도 아닌데.”

심드렁하게 말을 받은 농부, 마침 점심을 먹고 난 빈 그릇에 물을 떠온 농부는 나무 아래 놓아둔 소질메 속으로 물그릇을 숨겼다. 그리고 아무 일 없다는 듯 밭을 갈았다. 그런 농부 등 뒤에서 홀연히 물그릇 속으로 사라지는 처녀. 그리고 잠시 후, 행색이 남다른 사내가 나타나 주변에서 무언가를 찾아 이리저리 헤매다 스스로 찾기를 포기했는지 농부에게 다가와 물었다.
  “저 농부님, 여기 이 근처에 헹기물이라는 데가 어디요?”
  “헹기물? 여기서 나고 자랐는데, 아직까지 그런 이름 들어본 적이 없소. 딴 데 가서 알아 보오” 

중국 황제의 명을 받아 제주도의 산혈과 물혈을 끊으러 들어온 고종달이 유일하게 끊지 못하고 돌아간 곳. 내 고향 서귀포시 표선면 토산, ‘노단새미’와 ‘거슨새미’에 얽힌 전설의 한 토막이다. 그가 가지고 왔던 지도에는 이미 이 샘을 지키는 신이 고종달을 피해 헹기물 속에 숨을 것이라는 것까지 미리 알고 표시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걸 알 리 없는 고종달과 농부였기에 이 두 개의 샘은 아직까지 그 맥이 끊기지 않고 솟아날 수 있었다. 토산봉 기슭을 가운데 두고 샘은 두 곳에서 솟았다. 한라산 쪽으로 거슬러 오른다 하여 거슨새미, 오른쪽으로 돌아 흐른다 하여 노단새미라는 이름이 붙었다. 

마을과 가까운 곳에 있는 거슨새미에서 사람들은 물을 길었다. 아직 동이 트지 않은 새벽, 물동이를 지고 집을 나서면 길가의 나무들이 우뚝우뚝 검은 그림자로 다가왔다. 은밀하게 다가오던 도깨비 이야기며, 꼬리 아홉 달린 여우 이야기들이 불쑥불쑥 그 검은 그림자 뒤에서 나타날 것만 같았다. 같이 걷는 엄마의 치맛자락을 움켜쥐고 걷다 얼핏 고개를 들면, 나무의 우듬지와 우듬지 사이 별빛 가득히 깔린 길이 우리를 안내하고 있었다. 어둠속에 또 다른 어둠이 공포로 다가오던 지상의 길과는 달리 하늘에 난 길은 아름다웠다. 졸린 듯, 말을 거는 듯 깜빡이고 있는 별빛을 보며 걷다 보면 길은 어느 덧 샘 앞에 닿아 있었다. 

거슨새미 샘터 앞에 일렬로 나란히 서서 차례를 기다리는 물동이들. 사람들은 자기 차례가 올 동안 끼리끼리 모여 앉아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아이들 이야기와 농사 이야기, 날씨 이야기, 동네 대소사가 다 여기서 퍼졌다. 한쪽에서 조용조용 머리를 숙이고 있으면 다른 쪽에서 확자한 웃음소리가 물방울 소리처럼 퍼졌다. 우왁스럽고 팍팍한 말투 속에서도 오늘 아침 물을 뜨러 오지 않은 얼굴에 대해 안부를 걱정하는 말들이 오고갔다. 

다섯 살짜리 계집애가 종알거리듯 물은 쉴 새 없이 흘러나왔다. 맑고 투명했다. 풀잎에 맺혀 있다 문득문득 떨어지는 한 방울 물까지 웅덩이에 고였다. 가만히 바가지를 들어 물을 뜨면 바닥에 가라앉아 있다가 미처 담기지 못한 잔 나뭇가지와 이파리들이 황급히 몸을 일으켜 따라오다 제 풀에 다시 주저앉았다. 맑은 물이 바가지 안에서 찰랑거렸다. 사람들은 조심스럽게 그 물을 물동이에 담았다. 한 방울도 흘리지 마라. 흘린 물을 다시 주워 담을 수 없는 일이니... 누군가 조용조용 타이르는 말이었다. 

그럼에도 흐른 물은 다시 흘러 길 아래 빨래터로 모였다. 널따란 웅덩이를 파고 둘레에 넓적한 바위 몇 개 얹어 놓았다. 무심하게 만들어진 곳이었지만 물은 그 웅덩이에서 한참을 머물다 갔다. 머무는 동안 바위와 바위 사이, 혹은 그 주변에 창포와 미나리들을 키우고, 마을의 모든 빨래거리를 깨끗하게 빨아냈다. 그 한 켠은 마소들의 차지가 되었다.  

빨래는 아이들 몫이었다. 어른들이 밭에서 일을 하는 동안, 학교 갔다 돌아온 아이들이 집안 일을 도맡다시피 하던 시절이었다. 아이들에게 빨래는 일거리이면서 놀잇감이었다. 친구들과 빨래터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하고, 집안 여기저기 널려 있는 옷가지들을 챙겨 빨래터에 닿으면, 먼저 온 아이들이 좋은 자리를 차지해 옷가지들을 적시고 있었다. 넓적한 바위에 물길이 좋은 곳이 제일 좋은 자리였다. 웅덩이 구석 쪽에는 온갖 나뭇가지며 부유물들이 떠 있었다. 가끔 물뱀이 헤엄을 치다 사람들 눈에 띄여 서로 기겁을 하기도 하고, 누군가 버리고 간 헌옷들이 썩어가는 나뭇가지에 걸려 있기도 했다. 목마른 마소가 와서 물을 마시는 것 외에는 아무도 그쪽으로는 가지 않으려 했다. 

작은 아이들은 작은 옷들을 빨고, 큰 아이들은 아버지, 어머니의 큰 옷가지들을 빨았다. 열심히 비누칠을 하고, 방망이질을 해도 때는 쉽게 빠지지 않았다. 오히려 방망이질에 옷감이 상해 바지에 구멍을 내곤 했다. 무릎과 팔꿈치에 다른 천을 덧댄 옷들이 흔했다. 남루한 생활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옷들은 주변 나뭇가지, 돌담, 바위에 등을 대고 몸을 말렸다. 빨래가 마르는 동안 아이들은 고무줄놀이나 방치기, 공기놀이를 하며 놀았다. 

평야처럼 넓다 하여 이름 붙여진 ‘넌밭’에서 소의 울음과 농부의 목소리가 아련하게 들려오고, 가끔 동네어른들이 마소의 물을 먹이러 오거나 지나갔다. 이름 모를 산새들의 울음소리도 풍경으로 고스란히 그려질 것 같은 오후, 가끔 푸드덕거리며 꿩이 날았다. 한여름 해가 설핏 기울 때쯤이면 바짝 말라서 보송보송해진 옷가지들을 걷어 집으로 돌아왔다. 마른 흙길이 아이들 발 아래서 풀석풀석 일어났다. 

겨울이 되어 물이 차가워지면 산자락 너머에 있는 노단새미로 사람들은 모였다. 여기는 여름에 물이 차갑고, 겨울에는 따뜻한 물이 솟았다. 물은 항상 일정한 온도를 유지하고 있었는데, 바깥 공기에 따라 사람들이 느끼는 체감의 차이였으리라. 산자락 절벽 아래 고개를 숙인 것처럼 지형을 다듬어 사람들은 땅속으로 흐르던 물길을 밖으로 꺼내놓았다. 물이 흐르는 길을 따라 단을 높이고, 그 단 위에 빗살무늬 토기와 같은 웅덩이 몇 개 파 놓았다. 산 속에서 나온 물은 차례로 그 웅덩이를 채우며 지나갔다. 웅덩이를 다 채우고도 남는 물은 쉬지 않고 웅덩이에서 넘친 물과 함께 아래의 빨래터를 채웠다. 작은 새들이 속살거리는 것처럼 아름다운 물소리가 쉬지 않고 들렸다.  

노단새미에서는 어른들이 주로 빨래를 했다. 마을에서 멀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여기까지 빨래를 하러 오는 경우는 손이 시린 한겨울이었다. 한겨울에 사람들은 맨손으로 빨래를 했다. 밖에는 하얀 눈이 펑펑 쏟아지는데, 빨래터 안에는 하얀 김이 모락모락 피어났다. 방망이 소리에 동네 어른들의 이야기소리에 웃음소리가 왁자왁자 이어졌다. 신선들만 산다는 곳이 여길까. 빨래를 마치고 집에 가면 한 백년쯤 시간이 흘러 아무도 우리를 알아보지 못할 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하기도 했다. 고종달을 피해 헹기물에 숨었던 그 신이 깃들만한 곳을 찾아보기도 했었다. 콩짜개란 잎에 맺히는 물방울 그 너머에 있을까 아니면 저 빗살무늬 토기 같은 웅덩이에 숨어 있을까. 그러나 아직까지도 그 신을 만난 적은 없었다. 

마지막 헹굼을 끝낸 빨래들을 나무에 걸쳐놓았다가, 집으로 가기 위해 걷어보면 옷은 처음 걸칠 때 그 모습으로 얼어붙어 있었다. 추운 겨울이었다. 빨래를 마친 후 집으로 돌아오는 어머니의 두 손이 매번 퉁퉁 불어 있었다. 금방이라도 절벽 아래로 떨어져 내릴 것 같은 바위와, 흙을 받쳐주는 아름드리 나무, 아버지 팔 근육 같은 나무의 뿌리가 불끈 솟아나 있었다. 온 힘을 다해 흙더미와 바위로부터 노단새미를 지켜내고 있던 커다란 나무의 모습은 낯이 익었다. 그 옆으로 에피소드처럼 작은 나무들이 편안한 표정으로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절벽에 다닥다닥 붙어 자라는 콩짜개란 잎에 불현듯 맺혔다가 불현듯 떨어지는 물방울들. 그 물방울의 파문은 물속에 잠긴 자잘한 것들의 형체를 흔들며 밖으로 퍼졌다. 물길이 흐르는 대로 옮겨지던 시선이 빨래터 끝 무성한 풀숲에서 멈춰졌다. 맑디맑던 물이 빨래터를 나갈 때쯤엔 허연 거품을 물고 있는 경우가 태반이었는데, 물은 제 몸에 붙어 있는 거품을 풀숲에 거르며 빠져나갔다.  몸체를 잃어버린 거품이 바랭이, 모시풀, 물여뀌 대궁에 붙어 있다가 조금씩 꺼졌다. 

빨래터 너머 풀숲 어딘가에 있다는 또 다른 샘의 이야기며, 물길 끝에 아주 큰 하천이 있다는 이야기, 그 하천의 끝은 바다라는 이야기는 나중에 알게 되었다. 풀숲이 길을 가로막아도 보란 듯이 빠져나가는 물을 보며 나도 저 물처럼 어디론가 흐르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웃 샘과 만나 하나가 되고 그 하나가 하천에 닿아, 끝내 바다에 이르러 드넓은 세상을 둘러보리라는 것은 내 가슴 저 밑바닥에서 아무도 모르게 흐르고 있었다. / 김연미(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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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미 시인은 서귀포시 표선면 토산리 출신이다. 『연인』으로 등단했고 시집 『바다 쪽으로 피는 꽃』을 펴냈다. 2010년 제2회 역동문학상 우수상을 수상했다. 젊은시조문학회, 한국시조시인협회, 제주작가회의 회원으로 활동 중이다. 최근 서귀포시 표선면 가마리에서 감귤 농사를 시작한 ‘초보 농부’인 그는 <제주의소리>에 ‘어리숙한 농부의 농사일기’를 통해 하루하루 직접 흙을 밟으며 겪은 일상의 경험들을 풀어놓을 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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