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벼움과 속도가 지배하는 요즘, 옛 것의 소중함이 더욱 절실해지고 있다. 더구나 그 옛 것에 켜켜이 쌓인 조상들의 삶의 지혜가 응축돼 있다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차고술금(借古述今). '옛 것을 빌려 지금에 대해 말한다'는 뜻이다. 고문(古文)에 정통한 김길웅 선생이 유네스코 소멸위기언어인 제주어로, 제주의 전통문화를 되살려 오늘을 말하고자 한다. [편집자 주]
 
[김길웅의 借古述今] (4) 심술만 해도 삼 년은 더 살겠다
 
세상에 왜 이런, 심술 더덕더덕한 사람이 없으랴.
 
“심술만 허(ㅎ+아래아) 여도 삼 년은 더 살키여”, 심술꾸러기를 보고 하는 말이다. 심술이 오죽 심했으면 그것으로 해서 삼 년은 더 살겠다고 했을까. ‘심술이 왕골(王骨) 장골(張骨) 떼라’는 말이 있다. ‘왕골 장골 떼’라는 속설에서 옛날 심술이 고약했던 사람들을 일컬음이라 한다. 그런즉 무슨 일에나 고약한 심술을 부리고 행패가 심한 사람이 있어 이를 두고 이르는 말이다.
 
심술의 파생어가 있다. ‘심술꾸러기, 심술쟁이, 심술퉁이’…. 
 
그나저나 심술꾸러기의 대표적인 캐릭터는 <흥부전>에 등장하는 흥부의 형 놀부다. 아마 그 이상이 없을 것이다. 이만저만한 심술퉁이가 아니다. 마음 착한 흥부와 달리 이름부터 놀부가 아닌가. 놀부는 오장육부에 심술보 하나가 더 있다고 해서 ‘오장칠부’라 했다.
 
놀부의 심술을 볼작시면, “초상난 데 춤추기, 불붙은 데 부채질하기, 해산한 데 개닭 잡기, 장에 가면 억매흥정하기(부당한 값으로 물건을 억지로 사려는 것), 집에서 몹쓸 노릇하기, 우는 아이 볼기 치기, 갓난아이 똥 먹이기…. 
 
어디 그뿐이랴. 또 있다. 제주(祭酒) 병에다 가래침 뱉기, 애호박에 말뚝 박기, 새 망건에 편자 끊기, 다된 혼인에 바람 넣기, 노점 든 놈 정갱이 훑기…. 이쯤에서 포복절도하게 한다.
 
결국 놀부의 심술은 당대의 민속과 관습, 도덕 등 거의 모든 분야에 걸쳐 무차별적으로 발휘되고 있다. 심술이란 원래 온당한 것이 아니다. 짓궂게 남을 괴롭히거나 남이 잘되는 것을 시새움하거나 질투하는 못된 마음이다. 
 
왤까. 한국인에게 심술 유전자라도 있는가. 심술에 관한 속담이 적지 않다.
  
“심사가 꽁지벌레라” 한다. 꽁지벌레는 왕파리 유충을 말하는데, 장독에 들어가기를 일삼는 놈이니 마음씨가 사나워 남의 일에 방해 놓기를 좋아하는 사람을 빗대어 하는 말이다. 
 
“심사가 놀부라”란 말도 있다. 본성이 아름답지 못하고 탐욕스러워 일일마다 심술을 부리는 사람을 일컫는다.
 
“심사는 없어도 이웃집 불 난 데 키 들고 나선다” 했다. 이쯤 되면 저울에 달아 봐도 놀부 심보 못지않을 성싶다. 심사는 없는데도 불 난 집에 키를 들고 나서서 바람을 부친다 함이니 불 난 데 기름 붓는 격이 아닌가. 남이 잘되는 것을 보면 얼씨구 좋아한다 함이다. 거 참, 심술 고약한 사람인지고. 본디 심술꾸러기란 남의 일은 무엇이건 못 되게만 훼방질하는 사람이렷다.
 
“심심하면 좌수(座首) 볼기 때린다”에 이르면 심술이 어지간하지 않은 게 여실해진다. 아랫사람, 힘없는 사람을 불러내어 잘못한 일도 없는데 꾸짖거나 때리는 것은 옳지 못한 일인데 하물며 심심풀이로 이런 행위를 할 수 없는 노릇이니, 잔인한 악취미를 비판하는 말이다. 심심하면 어떤 일이거나 파적거리로 삼으려는 것이니 타고나 심술꾸러기가 아닌가.
 
그러다 보니 심술이 경계 대상으로 떠오른 것일까. “심술거복(去福)”이라 말한다. 심술이 사나우면 오는 복도 걷어차 버리게 되는 것이니, 심술랑 제발 부리지 말라는 얘기다.
 
아무리 심술꾸러기라 하더라도 심술을 부리고 나면 뒤가 허할 것이다. 남을 위해 돕고 거들지는 못할망정 남의 일을 짓궂게 훼방 놓아 속 편할 리가 없다. 이런 자를 다스리는 무슨 좋은 방책은 없을는지. 어른을 훈육하기는 그른 노릇이고, 그렇다고 그 못된 심술이 곧게 펴질 때까지 외딴 곳에 가둬 놓을 수도 없는 일이고.
 
그러니 “오그라진 개꼴랭이 삼년 대롱에 찔러도 오그라진 냥 싯나”(오그라진 개꼬리 삼년 막대에 찔러도 오그라진 대로 있다 )라 한 것일 테다. 인성(人性)이란 선천적으로 타고 나는 것이라 바르게 고치기가 쉬운 일이 아니다. 수양에 의한 터득이나 종교적인 깨달음이 있다면 몰라도 하루아침에 구짝 패와진 사름(곧게 펴진 사람)이 되기는 어렵다. 오죽했으면 포은 정몽주의 어머니가 속을 죄며 애타는 마음을 노래했을까.
  
“까마귀 싸우는 골에 백로야 가지 마라./ 검은 까마귀 흰 빛을 새오나니/ 청강(淸江)에 고이 씻은 몸 더럽힐까 하노라.”
  
나쁜 사람들을 가까이 하다 보면 그들의 시샘을 받아 욕을 볼 수 있으니 그런 무리들과 가까이 하지 말라 한 훈계다. 시조 속에 등장하는 까마귀는 두 말할 것도 없이 심술꾸러기다. 심술꾸러기는 단지 심술로 힘들게 할 뿐 아니라 경우에 따라서는 가까이 있는 사람을 위해하고 인격에 큰 상처를 입히기도 한다.
 
사람 사는 세상인데 제주라고 그런 사람이 없었겠는가. 오히려 거칠고 메마른 섬이라는 열악한 환경으로 인해 퍽 하면 남을 못 살게 구는 심술궂은 언행에 휘둘렸을 법도하다. 생활에 여유가 없으니 마음도 넉넉지 못했을 것이란 뜻이다. 
 
혹여 그런 건 아니겠으나, 어찌된 게 심술 고약한 사람은 모질이 오래 살고, 법 없이 살 선량한 사람은 단명하다고 한숨짓는 걸 본다. 아쉬움에 하는 얘기겠지만…. / 김길웅 시인·수필가·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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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보(東甫) 김길웅 선생은 국어교사로서, 중등교장을 끝으로 교단을 떠날 때까지 수십년 동안 제자들을 가르쳤다.1993년 시인, 수필가로 등단했다. 문학평론가이자 칼럼니스트이기도 하다. 도서관에 칩거하면서 수필, 시, 평론과 씨름한 일화는 그의 열정과 집념을 짐작케한다. 제주수필문학회, 제주문인협회 회장을 역임했다. 대한문학대상, 한국문인상 본상, 제주도문화상(예술부문)을 수상했다. 수필집 <모색 속으로>, 시집 <그때의 비 그때의 바람>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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