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리숙한 농부의 농사일기> (37)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규격’

noname01.jpg
▲ 맑은 하늘, 그리고 귤. ⓒ 김연미

하늘이 맑다. 이제는 잘 볼 수 없는 전형적인 가을 하늘. 12월 초순을 넘기고 있는 시점의 하늘에서 가을을 논한다는 것이 좀 어색하긴 하지만 오늘 날씨는 시간을 약간 뒤로 돌려도 될 것 같다. 햇살은 눈부시고 하늘은 파란색 바탕에 뭉게구름 몇 점 한가하게 떠 있다.

한 손에 가위를 들고, 다른 한손은 귤을 찾아 고개를 들었건만 귤보다 먼저 하늘이 내 망막에 들어와 앉는다. 이물질에 가려지지 않은 순수 민낯의 하늘. 어느 시인이 얘기했던 것처럼 손톱으로 툭 튕기면 쨍 하고 금이 갈 것 같고, 새파랗게 고인 물이 만지면 출렁일 것 같은 청정무구. 드물게 보는 파란 하늘이다. 내 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유독 날씨에 민감한 건, 날씨 때문에 피해를 당해 본 경험에서의 동변상련이리라. 올해는 귤 수확기 초반에 비 날씨가 좀 있긴 했지만 그나마 이 정도의 날씨라면 괜찮은 편이다. 오늘은 그 중에서도 행운처럼 주어진 맑은 날.

가운데 아주 높게 뜬 비행기 한 대 지나간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인식하지도 못할 것처럼 작다. 금방 보고도 꿈결인 듯 형체를 놓쳤다가 햇빛에 반짝, 몸체를 드러내는 비행기. 그 뒤로 하얀 꼬리구름이 길게 하늘을 가로지른다. 꼬리 옆에 손톱같은 낮달이 떠 있다. 가릴 것도 숨길 것도 없이 늘 제 자리를 지키는 달. 보이지 않는다고 우린 오랫동안 그 존재를 잊었었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하늘에게 빼앗겼던 정신을 수습한다. 하늘을 배경으로 서 있는 나무꼭대기에 매달린 귤 두 개가 정신 차리고 자기를 보라는 듯 햇살에 반짝인다. 막 세수를 하고 로션을 바른 열아홉 살 처녀의 탱탱한 두 볼 같다. 가위를 들고 모자라는 키는 까치발을 하고 귤 두 개를 따낸다. 반짝반짝 빛나던 귤이 내 손에 들어왔다.

넘치지 않게 내 손아귀에 들어와 안기는 걸 보면 이건 상품으로 분류해도 되겠다 싶다. 귤을 따면서 가장 난감한 게 상품에 해당하는 귤의 크기를 제대로 감별해내지 못하는 것이다. 크기별로 값이 달라지는 것도 문제지만 해당된 크기에 맞지 않는 것들이 모두 비상품으로 분류되어 판매를 못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가공을 하기도 쉽지 않다. 각종 규제 때문이다. 가공을 하려면 정해진 규격의 시설과 그 시설에 맞는 자본이 투입되어야 한다. 소농인들에게 그 자본은 버겁다. 어찌어찌 시설투자가 되어 가공식품을 만들었다 하여도 판매가 문제다. 대기업이 이미 완전히 장악한 유통망을 뚫을 재주는 없다. 애당초 시작하지 않는 게 정답이다. 

할 수 없이 비상품들은 폐기처분을 한다.  반짝반짝 빛나는 귤들, 새콤달콤 맛있는 귤들이 과수원 밭머리, 혹은 길가 한켠에서 썩어가는 모습은 이맘때 쉽게 볼 수 있는 풍경이다. 어떤 농부가 그 풍경을 제대로 바라볼 수 있을 것인가.   

이런 비상품으로 분류되는 귤의 양은 의외로 많다. 까딱 잘못해서 꽃이 좀 많이 떨어지거나, 낙과가 많이 되면, 혹은 반대로 꽃이 많이 피거나, 낙과가 예상보다 적게 될 경우 모두 정 규격을 벗어나버리는 것이다. 멀리서 보기엔 다 제 규격에 맞는 크기인 것 같아도 막상 따려고 가위를 대면 규격을 벗어나는 것들이 태반이다. 아무리 맛이 좋아도 원하는 규격에 맞지 않으면 모두 폐기처분 되어야 한다는 이 사실이 초보 농부인 내게는 도저히 이해되지가 않는다.

이 규정이 정말 농부들의 소득을 향상시키고 있는가. 지정된 크기의 귤이 정말 좋은 귤이라 말할 수 있는가. 크면 클수록 좋은 값에 팔리는 한라봉이나 천혜향 등은 왜 또 이것과 다른 규정을 적용하는가. 아직 내가 잘 알지 못하는 이러저러한 규정들이 나의 머리를 혼란스럽게 한다.

상품을 먼저 따내야 하는 과수원에서 나는 자꾸 큰 것들과 작은 것들 사이에서 헛손질을 하고 있다. 따 보면 너무 크고, 따 보면 너무 작다. 크고 작은 것들 사이의 간극이 유독 내 바구니에서 심하다. 귤을 나르는 사람은 자꾸 내 바구니에서 귤들을 골라 다른 바구니에 담는다. 내가 딴 귤에서 비상품 귤을 골라내는 것이다. 일손을 도우러 왔는데 오히려 일을 방해하고 있다. / 김연미(시인)

a1.jpg
김연미 시인은 서귀포시 표선면 토산리 출신이다. 『연인』으로 등단했고 시집 『바다 쪽으로 피는 꽃』을 펴냈다. 2010년 제2회 역동문학상 우수상을 수상했다. 젊은시조문학회, 한국시조시인협회, 제주작가회의 회원으로 활동 중이다. 최근 서귀포시 표선면 가마리에서 감귤 농사를 시작한 ‘초보 농부’인 그는 <제주의소리>에 ‘어리숙한 농부의 농사일기’를 통해 하루하루 직접 흙을 밟으며 겪은 일상의 경험들을 풀어놓을 참이다.


저작권자 © 제주의소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