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세통Book世通, 제주읽기] (40) 리처드 도킨스 『만들어진 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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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처드 도킨스『만들어진 신』이한음 옮김, 김영사(2006).
1. 광화문에서

오랜만에 광화문에 나가 보았다. 학교 앞에서 탄 버스는 마치 MT라도 가는 듯 들뜬 학생들로 가득했다. 버스가 서울역까지만 운행했기 때문에 서울역부터는 걷기로 했다. 얼마나 거리에 있게 될지 몰라서 지하식당가에 들어가 우동 한 그릇으로 요기를 했다. 거리로 다시 나오니 다양한 깃발을 든 사람들과 마치 산책이라도 나온 것처럼 즐겁게 웃으며 오가는 사람들로 붐볐다. 30년 전에 군사독재 타도를 외치며 스크럼을 짜고 내달렸던 비장한 거리의 모습이 머릿속에서 겹쳐졌다. 독재 타도를 외치던 시위대가 언론사를 지날 때면 앞에서 선창하던 지휘자를 따라서 “어용 언론 자폭하라”는 구호를 외쳤던 기억이 났다. 그 신문사는 여전히 코리아나 호텔 건물에 건재했다. 

거리 복판에서 노조에서 나온 사람들이 자신들이 준비한 초와 종이컵을 나누어 주었다. 염치없이 하나 냉큼 받아들고 생판 모르는 옆 사람에게 촛불을 붙여달라고 부탁했다. 바람이 불어서 촛불이 곧 꺼졌다. 다시 부탁을 했지만 싫은 내색을 하지 않고 불을 붙여 주었다. 작은 연대감이 느껴졌다. 종이컵에 구멍을 너무 크게 뚫어서인지 촛농이 자꾸 손으로 떨어졌다. 돌을 들었던 손에 촛불을 든 셈이 되었다. 30년 전에 들었던 돌만큼이나 촛불 역시 어색하고 불편했다. 30년 전에 든 돌은 던지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소심한 나로서는 화염병과 최루탄이 난무하던 상황에서도 차마 돌을 던질 수는 없었고 그저 던지는 시늉만을 몇 번 한 것이 전부였다. 이번에는 얼떨결에 받아 든 촛불에서 촛농이 떨어져 얼른 버리고 싶었지만 차마 그럴 수가 없어서 초가 다 흘러내릴 때까지 촛농을 견딜 수밖에 없었다. 시간이 지나서 급기야 종이컵에 촛불이 옮겨 붙는 바람에 불붙은 종이컵을 바닥에 떨어뜨리고 발로 밟아서 꺼야 했다. 타다 만 종이컵을 다시 줍기가 애매해서 발로 길가로 밀어내고 걷는데 뒤에서 쫓아오던 젊은이들이 푸념을 했다. 시위가 끝나면 거리의 쓰레기를 누가 다 치우냐는 식의 자기들끼리의 한탄이었지만 내게는 부도덕한 꼰대에 대한 힐난으로 여겨졌고, 스스로가 부끄러워졌다.

시위는 투쟁이라기보다는 축제였다. 거리 곳곳에서 젊은이들이 자신들이 준비해온 예술 공연을 했고, 중앙의 무대에서는 가수들이 나와 열창을 했다. 인파에 휩쓸려 걷다보니 어느덧 무대 앞까지 와 있었고, 집에 돌아가고 싶었지만 어느 방향으로도 움직이는 것이 불가능했다. 생전 경험해 보지 못한 인파는 마치 꿈처럼 여겨졌다. 운동가요가 아닌, 나로서는 알 수 없는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 무질서하게 움직이면서도 서로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면서 질서를 유지하는 사람들, 자랑스러운 표정의 가족 혹은 연인들의 행렬은 묘한 비현실성을 만들어냈다. 

밤이 깊어지면서 사람들이 흩어지기 시작했고, 이사중이라서 며칠 신세를 지게 된 처가댁으로 돌아왔다. 박정희 시대에 대한 향수를 간직했을 연세 드신 장모님이 시위에 다녀온 사위의 외투와 신발의 촛농을 없애겠다고, 나의 만류를 뿌리치며 신문지를 대고 다리미질을 했다. 미안하면서 슬픈 느낌이 들었다.

2. 망상과 상상

어떤 정치인은 우리나라의 시위문화가 노벨 평화상감이라고 떠들었지만, 나로서는 그런 상을 받는 것보다는 그런 시위를 할 일이 없는 사회에서 사는 쪽을 택하고 싶다. 괴물과 싸우면 괴물이 된다는 니체의 말은 이번 싸움에도 해당할 것이다. 30년 전에 물리적인 폭력에 맞서 화염병을 들었듯이, 이번에는 종교적인 망상에 맞서 일종의 종교적인 의례로 맞섰다는 생각이 든다. 차이가 있다면 한쪽은 종교적인 망상이었고, 다른 한 쪽은 종교적인 상상이었다는 것이다. 

『이기적 유전자』로 유명한 리처드 도킨스의 도발적인 저서 『만들어진 신』은 종교를 민중의 아편이라고 비난했던 마르크스주의자들보다도 훨씬 심하게 몰아붙이고 있다. 동의할 수 없지만, 그에 의하면 종교는 모든 악의 근원이다. 도킨스는 매우 철저하게 논증적인 방식으로 종교적 교리들이 얼마나 근거 없는 것이며, 믿을 만한 것이 못되는 지 밝힌다. 논의가 부적절하게 확산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그는 초자연적인 인격신을 내세우는 종교로 대상을 명확하게 설정하고 있다. 그가 비판하는 대상은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교의 인격신이다. 진화생물학자로서 도킨스는 인간과 세계를 창조한 창조주로서의 신을 믿는 것은 집단적인 ‘망상’이라고 단언한다. 이 책의 원제는 ‘God Delusion’으로서 직역하자면 ‘신이라는 망상’ 정도로 번역할 수 있을 것이다. “누군가 망상에 시달리면 정신이상이라고 한다. 다수가 망상에 시달리면 종교라고 한다”라는 로버트 퍼시그의 말을 책머리에 인용하고 있는 도킨스는 종교 없는 세상이 도래해야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다고 확신한다. 

극단적인 주장에도 불구하고 그의 책이 읽을 만한 이유는 그가 매우 성실하게 그간 논의되어 온 종교와 과학간의 거의 모든 논쟁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궁극적으로 과학이 답할 수 없는 영역이 있으며, 그것이 바로 종교의 영역이라고 하는 주장에 대해 그는 신학자들이 어떤 전문지식이 있기에 과학자들이 할 수 없는 방식으로 우주론적 질문을 할 수 있다는 것인지 반문한다.(90쪽) 과학이 답할 수 없다고 해서 종교가 답할 수 있다는 식으로 넘어갈 어떤 이유도 없다는 것이다. 이런 그의 급진적인 태도는 종교와 과학의 공존을 주장하는 온건파들에게 어떤 여지도 허용하지 않는다. 근본주의적인 종교가 사회적인 문제를 일으키므로 세속적인 도덕과 모순을 일으키지 않는 온건한 종교는 해가 될 것이 없다고 주장하는 온건파들에 대해 도킨스는 “왜곡된 종교가 아니라 정상적인 종교”가 문제라고 못을 박는다. “불합리한 것을 당신이 믿게끔 할 수 있는 사람은 당신에게 잔혹한 행위를 저지르게도 할 수 있다”는 볼테르의 말을 인용하면서 도킨스는 정상적인 종교의 교리 자체가 불합리한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믿는 사람들은 얼마든지 잔혹한 행위를 저지르게 될 위험성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467쪽)

도킨스는 어린아이들에게 종교적 믿음을 갖게 하는 것은 일종의 범죄라고 생각한다. 모든 사람이 무신론자가 된다면 아마도 전쟁도 덜 일어날 것이라고 그는 생각한다. 

“전쟁은 경제적 탐욕, 정치적 야심, 윤리적이거나 인종적 편견, 깊은 슬픔이나 복수, 국가의 운명에 관한 애국심에서 비롯된 신념 등이 동기가 될 수 있다. 전쟁의 동기로 더 설득력이 있는 것은 자신의 종교가 유일하게 참된 종교이고, 모든 이단자들과 경쟁 종교의 추종자들은 죽어야 한다고 노골적으로 비난하며, 신의 병사들은 순교자의 천국으로 직행한다고 명확히 약속하는 경전의 뒷받침을 받는 흔들림 없는 신앙이다.”(420쪽)

오늘날 서구와 이슬람이 벌이고 있는 전쟁의 양상을 생각해보면 이런 지적은 설득력이 있다. 그러나 그는 종교적인 망상과 비종교적인 망상을 분리시키고 후자가 덜 위험하다고 생각하는 데서 설득력을 잃는다. 오히려 이런 대목에서는 악의 근원이 종교에 있다고 보았던 포이에르바하를 비판한 마르크스로 되돌아갈 필요가 있다. 인간은 사회적인 불행이나 고통에 직면해서 오로지 인격신에게로만 회귀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이 자신의 잔혹한 행동을 정당화해 준다면 어리석은 인간은 무엇이든 신의 위치에 올려놓으려 할 것이다. 왜곡된 ‘애국심’이나 ‘국가주의’ 등이 한국 사회에서는 집단적인 망상이 되어 박정희에 대한 숭배로 나타난다. 청문회에 불려 나와 마치 말 못하는 초등생처럼 연기를 했던 재벌들은 돈이라는 신을 숭배하는 망상을 공유하고 있다. 세월호의 희생자들에게 패륜적인 행위를 거리낌 없이 행했던 소위 ‘보수단체’의 회원들은 오로지 비합리적인 신념체계에 의해서만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초자연적인 인격신만이 아니라 물신화에 의해 다양하게 만들어진 신들에 의해서 사람들은 집단적인 망상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것이다. 

필자가 광장에서 경험한 것 역시 일종의 집단적인 신념이었다. 그러나 그것을 망상이라고 부를 수는 없다. 듀이는 종교와 종교적인 것을 구분하자고 제안한 적이 있다. 그가 말하는 종교적인 것이란 고정된 믿음의 대상과 관련된 것이 아니라 공동체 구성원들이 이루고자 하는 가변적인 목표에 관한 공통의 신념과 관련된 것이다. 그것은 아직 도래하지 않았기 때문에 상상에 의존한다. 광장에 나온 사람들은 우주의 기운이나 혼을 운운하는 비합리적인 광신과 부도덕에 대해 도덕적이며 합리적인 사회에 대한 상상으로 맞섰다. 망상의 자리에 상상을 가져다 놓을 때 사회적 희망에 대해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누군가 여전히 망상에 사로잡혀 잔인한 일을 지속하더라도 현실에 뿌리를 두고 있는 우리로서는 불편한 현실을 감내하면서 새로운 세상에 대한 종교적인 상상을 그치지 말아야 할 것이다./이유선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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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유선 교수

현 서울대학교 기초교육원 강의교수
고려대학교 철학과 및 동대학원 졸, 철학박사
전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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