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리숙한 농부의 농사일기> (38) 좋은 품질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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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프링클러. ⓒ 김연미

스프링클러 꼭지에서 일제히 물이 뿜어져 나온다. 스위치 하나 올렸을 뿐인데 과수원 입구에 있는 물통의 물이 스프링클러를 통해 하우스 안에 일제히 뿌려지는 것이다. 자주 보는 광경이지만 늘 신기하고 재미있다. 물이 한 곳으로만 집중되지 않도록 스프링클러 꼭지가 좌우로 반복하여 움직이면서 물을 골고루 뿌려댄다.

흙 위의 마른 낙엽과 지푸라기들이 오소소 소리를 내며 물을 받아든다. 차가움에 놀란 듯, 목마름에 반가운 듯. 움찔 움찔 몸을 일으키던 지상의 마른 것들이 몇 방울의 물을 더 받아내고 편안하게 몸을 누인다. 편안해진 것들은 소리까지 제 몸으로 받아드는 것인가.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도 처음보다는 많이 편안해졌다.

물이 흙속으로 스며든다. 파삭파삭 일어나던 흙이 촉촉이 젖는다. 그렇게 젖어든 흙은 오래도록 그 물을 머금었다가 조금씩 나무뿌리에게 전달해 줄 것이다. 나무는 아기가 젖을 빨 듯 열심히 물을 흡수해 나무 꼭대기 끝까지 전달해 줄 것이고, 열매들은 더 싱그러운 얼굴로 농부를 대면해 줄 것이다.

수확기가 가까워질수록 한라봉 맛에 신경을 바짝 쓰는 중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더 이상 아쉬울 것 없이 좋은 색깔을 보이고 있지만 아직 맛은 만족할 만한 수준이 아니다. 신맛이 강하고, 단맛은 부족하다. 단맛은 일조량이나 온도 혹은 토양에 따라 달라진다고 하지만 신맛은 물로 조절이 가능하단다. 설 명절을 전후하여 수확하기까지 틈틈이 이렇게 물을 주면서 신맛을 조절하면 달고 맛있는 열매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2, 3일에 한 번씩 날씨가 좋은 날을 골라 물을 주면 열매에 있는 산도가 서서히 빠진다. 산도가 어느 정도 빠졌다 싶으면 물주기를 중단하고 햇빛에 잘 익기를 기다린다. 그러면 햇빛을 듬뿍 받으며 나무는 마지막 단맛까지 열매에 다 몰아주는 것이다.

좋은 품질의 첫째는 좋은 맛이다. 크기가 크고, 색깔이 아무리 고와도 맛이 없으면 좋은 품질이라 말할 수 없는 것은 자명하다. 물론 ‘있다’와 ‘없다’의 차이가 약간씩 다르기는 하겠지만 절대치의 기준은 있는 것.

좋은 맛을 위한 농부들의 노력은 상상을 초월한다. 단순히 화학비료에만 의존하는 농부는 경쟁에서 일찌감치 밀려나 있다. 과수원마다 거름을 내는 것은 기본이고, 짚을 깔고, 파도에 밀려온 해초를 걷어 말렸다가 깔아주기도 한다. 파도가 심한 다음날 아침 시어머님은 누구보다 먼저 바다로 나가셨다. 파도에 밀려 온 해초를 걷기 위한 것이다. 나무 등껍질 같이 마른 해초를 간수하는 일은 만만한 게 아니었지만 어머님은 그 일을 멈추지 않으셨다. 아직 나는 한 번도 해초를 걷지 못하였고...

최근에는 각종 발효액을 희석하여 뿌려주면 좋다 한다. 만들어 놓기만 하고 먹지 않는 발효액들을 어떻게 처리하나 고민하고 있었는데 잘 되었다싶다. 내년 봄에는 집에 있는 각종 발효액들을 다 모아다가 나무에 뿌려봐야겠다. 처음이라 가시적인 효과가 나타나지는 않겠지만 몇 년 지속적으로 하다보면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으리라. 죽어가는 소나무 뿌리에 막걸리를 뿌려주면 되살아난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그게 귤나무에도 적용된다는 것은 처음 알았다. 그 많은 나무에 막걸리를 주려면 집에서 막걸리를 만들어야 하나, 막걸리 공장에 거래를 터야 하나.

과수원 바닥이 흥건해졌다. 이제 스프링클러를 잠가도 되겠다. 흥건해진 흙속의 물이 나무줄기를 따라가 열매의 신맛을 제대로 씻어내 주기를 바라며 스위치를 내렸다. / 김연미(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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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미 시인은 서귀포시 표선면 토산리 출신이다. 『연인』으로 등단했고 시집 『바다 쪽으로 피는 꽃』을 펴냈다. 2010년 제2회 역동문학상 우수상을 수상했다. 젊은시조문학회, 한국시조시인협회, 제주작가회의 회원으로 활동 중이다. 최근 서귀포시 표선면 가마리에서 감귤 농사를 시작한 ‘초보 농부’인 그는 <제주의소리>에 ‘어리숙한 농부의 농사일기’를 통해 하루하루 직접 흙을 밟으며 겪은 일상의 경험들을 풀어놓을 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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