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벼움과 속도가 지배하는 요즘, 옛 것의 소중함이 더욱 절실해지고 있다. 더구나 그 옛 것에 켜켜이 쌓인 조상들의 삶의 지혜가 응축돼 있다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차고술금(借古述今). '옛 것을 빌려 지금에 대해 말한다'는 뜻이다. 고문(古文)에 정통한 김길웅 선생이 유네스코 소멸위기언어인 제주어로, 제주의 전통문화를 되살려 오늘을 말하고자 한다. [편집자 주]

[김길웅의 借古述今] (6) 구렁이 보고 놀란 사람 쇠줄 보고도 놀란다

뱀 중에도 굵직하고 긴 놈이 구렁이다. 뱀은 그 경계색 때문에 징그럽다. 그만큼 경계색은 뱀의 방어 기제(機制)다. 독성이 강한 독사는 몸뚱어리가 비교적 작지만 구렁이는 엄청나게 커 더럭 겁먹게 된다. 긴 골목을 걸어 나와야 고샅에 이르던 아잇적, 돌담 틈에 몸을 사려 눈 번득거리던 구렁이를 수없이 보며 컸다. 그런데도 구렁이 하면 흠칫 놀란다.

일종의 트라우마(trauma)다.

트라우마는 ‘정신적인 외상(外傷)’으로 영구적인 정신장애를 남기는 충격이란 뜻이다. 시각적 이미지를 동반하면서 장기적으로 기억된다. 

고기를 안 먹는 사람에게는 소를 잡는 것을 목격한 경우가 많다고 한다. 도축 장면은 잔혹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채식주의자가 되기도 한다. 전쟁·재난·성폭행 같은 개인의 삶에 극적인 영향을 주는 ‘큰 트라우마’가 있는가 하면, 친구에게 따돌림 당한다든지 사람들 앞에 나가 발표할 때 실수한 것 등의 ‘작은 트라우마’도 있다.

사고로 인한 외상은 정신적 충격 때문에 사고 당시와 비슷한 상황이 됐을 때 안절부절못해 한다. 가슴이 콩닥거리며 불안해진다. 바다에서 익사할 뻔했거나 난파선을 탔던 경험이 있는 사람에게 에메랄드 빛 푸른 여름 바다는 더 이상 낭만이 될 수 없다. 트라우마 탓이다.

예전에도 매한가지였다. “구렝이 보앙 놀란 사름 쇠줄레 보앙도 놀란다”가 그 단적인 예다. 

‘쇠줄레’는 굵직한 쇠줄, 그것을 사려 놓으면 영락없이 구렁이가 몸을 사려 똬리를 튼 형상이다. 그래서 그걸 보면 놀란다 함이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 한 것이 이와 바로 통하는 속담으로 우리에게 친숙하다.
 
트라우마라 해 놓고 보니까 까탈이지만, 실은 ‘명약이 입에 쓰다’고 마음속 깊이 새겨 둘 말이기도 하다. 중요한 것은 강고한 의지요 단단한 마음먹기다. 한 번 실수는 병가지상사라 하지 않는가. 어떤 일을 하면서, 다시는 실수하지 않으려고 아귀 앙다물고 온힘을 기울이면 충분히 극복하지 못하란 법이 없다.

무슨 일을 함에 중요한 것은 성취동기다. 성취인의 행동특성으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반드시 이루고야 말겠다는 과업지향적인 자세가 아닌가. 그렇게 전력투구할 때 놀라운 힘이 생겨나는 경우를 종종 경험하곤 한다. 스스로 상상할 수 없던 초능력이 발동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너끈하게, 그에 더해 목표를 초과 달성하는 환희를 맛보곤 하지 않는가.

작은 트라우마와 달리 전쟁이나 재난 같은 큰 트라우마를 극복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요즘은 끔찍한 일들이 자행되는 세상이라 아이 가진 부모들 마음을 놓지 못한다. 어린아이가 그런 일을 당했다면 그 상처가 쉽게 아물 리 만무하다. 평생을 검은 그림자가 따라다니며 덜미 잡아 놓아 주지 않을 것이다. 

다행히 다양한 치유의 길이 열려 있다. 길은 사통팔달(四通八達)이라 한다. 의학적인 치료 말고도 독서, 글쓰기, 그림그리기, 음악 감상하기, 원예 등 정신적으로 몰입함으로써 조금씩 이전의 기억에서 떨어지는 방법을 찾아야 할 것이다.

하기는, ‘구렝이’쯤이야 하고 예전 시골 아이들은 길 가다 뱀을 만나면 우습게 여겼다. 녀석 머리 위를 손으로 빙글빙글 돌리며 정신을 어질러 놓고는 꼬리를 잡아 몇 번 공중회전 시켜 휙 집어던지곤 했다. 도시 아이들은 상상도 못할 일이다. 

경험이 쌓이면 익숙해지는 법이다. / 김길웅 시인·수필가·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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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보(東甫) 김길웅 선생은 국어교사로서, 중등교장을 끝으로 교단을 떠날 때까지 수십년 동안 제자들을 가르쳤다.1993년 시인, 수필가로 등단했다. 문학평론가이자 칼럼니스트이기도 하다. 도서관에 칩거하면서 수필, 시, 평론과 씨름한 일화는 그의 열정과 집념을 짐작케한다. 제주수필문학회, 제주문인협회 회장을 역임했다. 대한문학대상, 한국문인상 본상, 제주도문화상(예술부문)을 수상했다. 수필집 <모색 속으로>, 시집 <그때의 비 그때의 바람>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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